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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 종주기 - <여는 글>

by 박달령 2007. 10. 16.

◎ 백두대간 종주기 - 여는 글

 

내가 인생 여정에서 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40여년 전인 중학교 3학년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솟아 있는 해발 793. 5m 모악산(母岳山) 깊은 산자락 한 귀퉁이 산촌에서 남의

논밭 몇 뙈기를 빌어 소작을 하는 한미한 빈농의 집안에 태어난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 휴일

이나 방학이 되면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땔나무를 해 나르기 위하여, 또는 초여름이면 논밭에 뿌릴 퇴비

를 마련하기 위하여 나뭇짐, 풀짐을 짊어지고 모악산 산자락의 골짜기를 지게를 지고 누비고 다닌 것

이니 레저를 위한 등산이 아니라 가사를 돕는 노동을 위하여 산에 올랐던 것이다.  가끔 지게의 등짐

이 나뭇가지에 걸려 산비탈에서 넘어지고 구르기를 예사로 하였으나 곧 숙달되어 갔다.

 

가세가 빈한하니 고구마를 삶아놓고 시래기국이나 동치미 국물과 함께 끼니를 때우는 날이 허다 하였

다.  그러나 고구마는 전분이 진하게 함유되어 있어 잘 체하는 음식인데, 본시 성미가 급하여 빨리 먹어

치우다가 자주 체하여 고생을 하였던 탓에, 다른 사람들은 고구마를 별미음식이라 하면서 맛있게 먹지

만 나는 지금도 고구마가 눈에 띄면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어지고 쳐다보기도 싫다.  그때는 그렇게 가

난이 극심하였던 때였던 것이다.  초등학교때에는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때 영양실조로 땅에 쓰러지는

아이들이 가끔 나타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때에는 농사일이 없는 휴일날 가끔 마음이 울적할때면 대나무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채 모악산 자락 이곳 저곳을 쏘다니기도 하고 모악산 정상도 수차례 오르기도 하였다. 

그때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살았다.  운동화는 학교에 갈때만 신고 집에 돌아와서는 해질세라 아껴 모셔

두어야 하였던 시절이었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난 뒤부터는 누구로부터 변변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자립하기 위하여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게 삶의 몸부림을 치다 보니 산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산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설흔두살 때인 단기 4309년(1976년) 가을 직장 친선 등산대회 때에

속리산을 오르면서부터 였다.  실로 12년만에 산의 품에 다시 안겨본 것이다.  경북 상주군 화북면 상오

리를 들머리로 하여 천황봉을 올라 비로봉 - 입석대 - 신선봉을 거쳐 경업대 - 복천암 - 법주사로 하산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자주 산을 접하지 못하고 겨우 1 - 2년에 한번 정도씩 산행의 기회를 갖게 되었었고,

대개 북한산, 관악산 정도였다. 

 

특히 마이크로렌즈를 이용한 카메라 곤충사진에 몰두하다보니 산 기슭은 많이 헤매고 다니면서도 등산

대한 관심은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던 것이 40대 중반에 일찍 나타난 노안(老眼)현상으로 원시(遠視)가 되어 돋보기를 쓰기 시작하면

서 풀섶에서 자그마한 곤충을 찾아내어 찍어야 하는 사진활동에 제약을 받게되고 또한 날로 심하여지

는 공해로  곤충의 개체가 현저히 줄기 시작하면서 사진활동도 시들 해지게 되고, 지금부터 꼭 10년전

인 단기 4324년(1991) 경부터 수원의 광교산을 시작으로 산행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실로 35년만에 본격적으로 산자락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점점 산행의 연륜이 쌓이면서 내 생전에 남한땅에 솟아있는 산들만이라도 모두 올라 볼수 있을까 하는

정아닌 걱정거리가 생기게도 되었다. 한라산, 주왕산, 내연산, 점봉산, 가리봉, 가리왕산, 군자산, 금수

산, 운장산, 구봉산, 팔영산, 보현산, 남해 금산, 광덕산, 용문산, 주흘산 등등 등산 지도책을 보고 있노라

면 아직도 못오른 산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남아 있고,  이 산들을 다 오르려면 앞으로 10년세월로

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백두대간 종주기를 읽으면서 그 종주자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두대간 마루금을 걷고 싶은 충동에 서서히 중독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물

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이어져 있다는 백두대간의 능선을 따라 공식적으로 허용이 되는 진부령까지

라도 터벅터벅 걸으면서 내나라의 등뼈를 내 눈으로 바라보며 밟아보고 만져보고 때로는 바위위에 드러

누워 보기도 하고,  흙냄새도 맡으며 확인하여 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 이 글을

쓰는 지금부터 3 - 4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조선일보사 발행 "실전 백두대간종주산행" 97년판도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선답자들의 경험담을 알고 싶어서 처음에는 전문산악인들의 종주기를 읽어 보았으나, 암릉이나 암벽, 급

경사 위험구간등을 대수롭지 않게 통과하여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 종주기는 나같은 아마추어에게는 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도 인터넷에 서울의 이종원님이 개설한 홈페이지의 백두대간 종주기와, 오케이마운틴

(주) 홈페이지에서 대전에 거주하는 필명 "구름나그네"님의 종주기를 읽었던바, 이 분들은 아마추어의 경

지는 넘어섰으나, 완벽한 전문 산악인은 아니어서 위험구간, 장애구간 등을 비교적 소상히 써놓아 도움이

될만한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이 분들의 종주기에는 97년판 실전백두대간종주산행의 설명이 잘못된 부분이나, 지도상 등산로 표시가

실과 다른 부분도 씌어 있기도 하여 이를 읽으면서 중요한 사항을 지도에 표시하고 메모하여 놓으니

그대로 산지식이 되었다.

 

때마침 운영하고 있던 종업원 3 - 4명의 구멍가게 수준인 사업도 시원치 않아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전

계획을 세우면서 인생의 재충전을 위하여 6개월 정도 예정으로 단기 4334년 9월 중순에 휴업을 하여

정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망설이고 벼르던 끝에 체력적으로 상당히 늦은 나이인 56세가 되는 단기 4334년 9월 22일부

염원하던 백두대간 종주의 첫발을 지리산 대원사를 지나 새재마을에서 내디디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리산 천왕봉은 11회를 올랐고 주능선 종주만도 8회나 하였건만 어찌된 일인지 새재마을이나 대원사

쪽에서는 지리산을 오를 기회가 없었기에 이번에는 거리가 좀 멀더라도 이쪽에서 오르기로 한 것이다.

 

종주는 나 혼자서 단독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다.

단독산행으로 결정한 것은 무슨 영웅심리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주로 혼자가 아니면 처와 부부동반으로 산행을 하여 왔는데, 가끔 여럿이 일행을 이루어

행을 할라치면 그중에 산행예절을 몰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이 섞여있어 다른 산행객들 보기가

민망스러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산에 갔다가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까닭에 나는 성격상 단

체산행을 달가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오르막길에서 과속을 하면 다리 근육이 거부반응을 일으켜 쥐가 나게되고, 내리막길에서 뛰면

무릎이 아파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하는등 나의 체질과 약점을 파악한 후부터는 산행계획을 세울때 20 -

30대 혈기방장한 세대들보다 산행시간을 20 - 30%정도 더 넉넉하게 할애하여 안전에 중점을 두고 나의

체력에 알맞는 산행을 하게 되므로 더욱 단체산행에 부적합하다.

 

그리고 단체산행을 하다보면 선두에 나서서 체력을 자랑하기 위하여 번개같이 내달리며 빨리 따라오라

고함치고 빈정대며 우쭐대기 좋아하는 자들이 한두명씩 나타나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

다.

 

단체산행시 가장 체력이 약한 사람을 표준으로 보행속도를 맞추라는 기초적인 등산예절도 모르는 사람

과의 단체산행을 달가워 하지 않게 된것이다.  내 돈쓰며 산행을 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 스트레

스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나의 산행 신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독도법도 군복무 시절 졸면서 귓가에 자장가처럼 들었던 지식밖에 없는 무식한 경지라서 2만5천분의 1

형도 같은 것은 아예 없는것이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길인 실정이라, 5만분의 1 등산지도가 수록된

97년판 "실전백두대간종주산행" 책자를 휴대하기로 하였다.  지금 뒤늦게 도북, 진북, 자북이니, 방위

이니, 전방교차법, 후방교차법 등을 공부 해봤자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라 독도법 지식 없이

천경개나 감상하며 그냥 터벅터벅 걷기로 한것이다.

 

산행 장비도 다른 대간종주객들이 보면 무식하다고 웃을 정도로 원시적이다.
고도계도, GPS도, 보이스펜도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외제 등산화, 외제 배낭, 외제침낭등도 없이 국산

일색이다.  아참 지팡이가 어디 것인지 모르지만 3단 접는식 "리키"라서 외제이고, 야간 등화장비가 독일

헤드랜턴이고, 등산화 깔창이 툴리스 제품이니 딱 세가지 외제가 있는 셈이다.  외래어로 된 등산 용어

도 서툴러 우리말로 풀어쓰기를 해야 이해가 빠르다.

 

등산에 관하여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이론을 배워 지식을 쌓거나 연습을 하여 실전을 익힌 일도 없이, 어렸

때 나뭇짐 지고 산자락을 누비던 감각으로 산행을 할 뿐이다.  이러한 실정이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

건 등산이 아니고 장난삼아 소풍을 가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력만으로 무장하여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저

돌적 돌격을 감행하던 지리산 남부군 빨치산식 게릴라 활동인지 헷갈리기 십상이겠다.

 

다만 한가지 "한타박스" 라고 하는 유행성출혈열 백신 예방접종을 하여 두었던 것이 확실한 준비라면 준

가 되겠다.

 

이 유행성출혈열은 얼마 전까지는 내가 군복무를 하였던 강원도 철원의 한탄강 일대에서만 발병을 하여

원체의 세균도 "한탄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세계 의학계에 보고 되었던 병인데 야생 들쥐가 중간숙주

서, 감염된 들쥐가 풀밭에 바이러스가 섞인 대소변을 배설하여 세균이 풀잎이나 땅바닥에 널려 있다가

곳에 사람이 앉거나 드러 눕거나 하는 등의 접촉을 하였을 때에 호흡기나 상처난 피부를 통하여 감염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치사율 7%에 이른다는 전염병이다.

 

군복무시 환자들을 본 바에 의하면 감염시 독감처럼 오한이 나고 점점 의식이 희미하여져 혼수상태에 빠

게 되는데 이 시기에 몇시간 내로 육군병원까지 후송하지 않으면 다른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이 병에 감염된 환자만 발생하면 육군항공대의 헬기가 동원되어 환자를 긴급 후송을 하였

며, 치료 시기를 놓져 사망자가 발생하였을 경우 병사들을 주의 시키지 못한 지휘관까지 문책을 당하기

하여, 멋모르고 잔디밭이나 풀밭에 드러누워 딩굴다가 성질 급한 선임하사 눈에 띄면 군화발에 촛대뼈

갈비뼈고 가리지 않고 인정 사정없이 걷어 채이며 두들겨 맞기도 하였던 공포의 병이었다.

 

그런데  유행성출혈열의 발병지역이 10여년 전부터 철원지역을 벗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어 매년 수백명

씩 발병을 한다기에 아무래도 찜찜하여 예방접종을 하여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행 속도가 원래 느리니 시간도 아깝고, 또 어떠한 사유가 발생하여 종주를 중도 포기하는 사태

일어날지 모르기에 표지기도 제작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산행 방법은 체력도 이미 쇠퇴기이고, 중간 지원을 받을 여건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연속종주와 구간종

의 중간 형태로 하기로 하였다.  2 - 3일, 때로는 3 - 4일 정도 산행을 하고 나서 귀가하여 볼일도 보고

며칠 푹 쉬어 체력을 회복하는 한편, 물자 보충을 하여 다시 대간에 올라 산행을 하는 계속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하였다.

 

숙박은 산장(유인 대피소)이 있는 곳은 산장에서, 그렇지 않은 곳은 민박을 구하고 불가피하면 비박을 하

나 여의치 못하면 적당한 곳에서 중간 탈출을 하여 여관이나 여인숙 등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제부터 써 나갈 나의 종주기는 이상 본 바와 같이 전문 산악인도 아니고 황혼기에 접어들어 거북이 걸

걸이로 걸어가는 엉성한 종주기가 될 것이며, 대간 종주를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도중하차를 할지도

른다는 불안감으로 시작한 종주길이었으며 인생살이의 한 과정의 기념으로 종주기를 쓰기로 한다.

 

진부령까지 종주를 마친 후에는 남북통일을 기다리게 될 것이, 내 생전에 통일의 그날이 온다면 비록 중

중간 고난도의 위험구간에서 커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부령에 올라서서 백두산을 향하여 또 다시

대간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가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