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종주기 [제10회] (라)
○ 단기 4334년(2001) 11월 11일 (일) 맑음. (제25일).
천문대와 제1연화봉 중간지점까지는 짙은 안개, 늦은맥이고개에서 2 Km 정도 전진한 지점까지는 계속되는 강풍 (때로는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거센 바람)- 금일 산행구간 : 죽령 → 고치령
03 : 00 기상, 면도, 세수
바깥 날씨를 살피니 대단히 추워서 종주 시작 후 처음으로 외투에 내피를 부착하여 입는다.
03 : 30 풍기 역전으로 나가니 택시기사 양정찬씨가 나와 있어 인사를 나누고 "딸야식집"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여야겠다고 말하자 기다리겠다고 한다. 야식집에 가서 어제 저녁에 주문한 김밥을 찾고 식사를 부탁하니 찌개 끓인 것이 다떨어졌다면서 밥 한그릇과 김치 두어가지만 내놓고 2,000원만 받겠다 한다.
뜨거운 물과 함께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양정찬씨가 들어온다.
가게에서 소주를 사 넣다. 이 소주로 오늘 산행을 마감하는 고치령에 있다는 산신각에 도착하면 안전산행을 감사하는 술한잔 올리고 참배를 하려는 것이다.
03 : 45 풍기역 앞에서 죽령으로 택시 출발
택시를 타고 가면서 물어보니 고치령 아랫마을 좌석리 포장도로까지 내려와서 풍기택시를 부르면 15,000원이고, 고치령고개에서는 30,000원이라 한다.
04 : 00 죽령 도착. (택시비 15,000원)
04 : 05 죽령 출발
손이 시려워 걸으면서 면장갑을 한켤레 꺼내서 양 손에 끼다.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겨우 10여 미터 앞밖에 안보이나, 천문대로 올라가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가므로 플래시를 꺼내지 않고 그냥 진행하다. 죽령 매표소는 불만 켜 있고 매표직원이 없이 텅 비어 있다. 아마 숙직실에서 자는가보다. 입장료 안내고 공짜로 통과하니 기분이 좋다.
공짜 좋아하면 이마가 벗겨진다는데, 그래서 내가 대머리가 됐나 하는 객적은 생각도 하여 본다.등산지도에는 죽령매표소를 지나 좌로 굽어지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갈라지는 산길로 질러가는 대간길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어 도로 우측을 유심히 살피면서 진행하나, 그런 샛길은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도로만 따라서 계속하여 올라가는 길이다.
오를수록 점점 서풍이 강하게 불고 안개인지 구름인지 자욱하여 이제는 겨우 10미터 앞도 간신히 보인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펴서 둘러쓰고 끈을 조이니 한결 낫다. 강풍에 몸이 휘청거려 발걸음이 너무 느려진다. 가끔가다 이정표가 나타난다.
비몽사몽간에 꿈길을 가듯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자욱하게 깔려있는 도로를 따라 한참 오르니 좌측으로 넓은 공터가 보이고 약간 우측으로 굽어지는 길을 따라 100여 미터가량 오르니 갑자기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굳게 잠긴 철대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한국통신 간판이 붙어있는 자그마한 건물이 대문 안으로 보인다. 지도에는 없는 이상한 곳이다.
황당하여 잠시 멍청하니 대문을 바라보다가 되돌아 나와 조금 전에 보았던 공터로 들어가니 헬기장이다. 그리고 그 공터를 한바퀴 돌아보았으나 더 이상 다른 길은 없다. 다시 도로로 나와서 배낭을 벗어놓고 플래시를 꺼내는데 아래쪽에서 도로를 올라오는 자동차의 불빛이 보인다. 황급히 손을 흔들어 차를 세우니 30대 후반의 부부가 탄 승용차이다.
천문대쪽으로 오르는데 앞에 길이 막혔다고 상황설명을 하니 전에 한번 와본 일이 있어 어림짐작으로 올라왔는데 안개로이정표가 안보여 길을 잘못 들었다고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며 나더러 차에 타라고 한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차에 타고서 100여 미터 내려가니 우측으로 갈림길이 보이고 우회전하면서 바라보니 이정표가 서 있다. 올라오다가 이곳에서 좌회전을 하여야 하는데 안개로 이정표를 못보고 지나쳐 한국통신 시설물로 직진하여 버린 것이다. 귀찮아서 플래시를 꺼내들지 않고 그냥 발 밑만 바라보며 길만 따라 올라온 무사안일에 빠진 벌을 톡톡히 받은 것이다.
승용차를 세워 달랬더니 천문대까지 태워다 주겠다 하기에 백두대간 종주 중임을 말하고 차를 타고 가면 종주의 의미가 없으므로 내려서 걷겠다고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고 하차하다. 이정표에서 천문대로 안내된 길로 접어드니 생각하였던 바와는 반대로 길은 계속하여 약간씩 낮아진다.또 혹시 대간길이 아닌 다른 갈림길로 벗어난 것은 아닌지 불안하나, 사방은 지척을 겨우 분간할 정도의 안개로 휩쌓여 있고 어두워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완만한 내리막을 계속하여 진행하다. 콘크리트 길바닥은 서리가 두껍게 내려앉아 미끄럽다. 길가의 흙 길로 걸으니 조금 낫다.
어디서부터인지 오르막길이 시작되어 한참 가니 천문대 건물이 나타나고 날이 부옇게 밝아온다. 이제 플래시가 필요 없어 배낭에 넣고 조금 오르니 천문대 옆 공터에 아까 잠시 나를 태워 주었던 승용차가 정차하여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휴식을 하고 있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하니 마주 손을 흔든다.
제2연화봉은 이정표도 못보고 지나쳐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겠다.천문대를 지나 비로봉, 국망봉, 상월봉, 늦은맥이고개까지 약 10 Km 구간이 응달진 쪽으로 그 넓은 산비탈에 서리가 철쭉나무에 내려앉아 얼어붙은 상고대를 이루어 아침 햇살에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천문대를 지나니 도로는 끝나고 산길이 시작된다. 가끔 미끄러운 길이 나타난다. 희방사에서 오르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 제1연화봉을 오르는데 지루한 나무계단은 바닥에 서리가 내려 미끄럽고, 강한 서풍은 상체를 오른쪽으로 휘청거리게 만든다. 계단 우측 난간을 붙들고 의지하면서 오르다.
구름지대를 벗어나니 햇살이 눈부시다. 뒤돌아보니 천문대쪽에 구름이 강풍을 타고 단양에서 풍기 쪽으로 계속하여 넘어오고 있다.
07 : 00 제1연화봉 도착
비로봉에 이를 때까지 나타나는 계단도 마찬가지로 미끄럽고 서쪽에서 강풍은 계속 불어온다.
한참을 올라가니 비로봉 쪽에서 등산객 5인이 하산한다. 맨 뒤의 남자는 화장지로 양쪽 콧구멍을 막고서 걷고 있다.아마 콧물감기로 계속하여 흐르는 콧물을 주체하지 못하여 그러한 모양이다.
응달진 곳은 간간이 눈길이 나타나는데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기에는 좀 애매할 만큼 강설량이 적으나 길은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08 : 10 주목관리소 건물 도착.
강풍과 그리고 미끄러운 길바닥과 싸우며 오르느라 길이 좋은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먼저 와 있는 남자 5인, 여자 7인 등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식사중이다. 한쪽에 앉아 김밥 1인분을 꺼내어 아침인지 점심인지 애매한 식사를 하다. 배는 많이 고프지 않지만 고치령에 이를 때까지 마땅한 식사 장소가 없을것 같으니 여기서 먹어 치워야 하겠기에 소주를 한 모금씩 찔끔거리며 안주 삼아 꼭꼭 씹어먹으니 찬밥도 먹을 만 하다.
젊은이들은 식사량이 적었는지 라면 여러 개를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 새로이 끓이더니 내가 찬밥을 먹고 있는 것이 안되어보였던지 종이컵으로 가득 뜨거운 국물을 떠서 권한다. 정말고맙다.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하며 국물을 받아 마시다.
이야기를 나누니 그들 일행은 지도에 없는 천동리 어의계곡쪽 길로 올라왔는데 신선봉으로 하여 구인사로 하산할 계획이라 한다. 늦은맥이고개까지는 나하고 같은 방향이다.
08 : 40 주목관리소 출발이제 햇살이 퍼져 산행을 하면 더워질 것 같아 우선 조끼를 벗어 배낭에 수납을 하고 젊은이들보다 먼저 관리소를 나서서 500여미터 떨어진 비로봉 정상으로 향하다.
09 : 00 비로봉(1439. 5) 도착
먼저 온 5인의 등산객이 주목관리소로 향한다.
찬바람을 맞으며 서쪽 넓은 산비탈에 장관을 이룬 상고대를 감상하다. 소백산의 바람은 참으로거세고 체감온도는 영하10도 이하로 느껴진다. 국망봉으로 향하는길도 간간이 눈길이 나타난다.
10 : 25 국망봉(1420. 8) 도착
50대 남자 1인, 20대 젊은 남자 4인 등 5인의 등산객이 먼저 와 있다. 그들은 입장료를 아니 내는 석천폭포골로 올라왔다 한다. 대간 종주하여 고치령까지 간다하니 멀리 보이는 갈곳산 부근을 가리키며 그곳이 부석사 뒷산인데 그곳까지 가느냐 하여 여기서 그 중간쯤에 고치령이 있다고 하자, 한 젊은이가 자기 할아버지 산소가 그곳에 있어 자주 간다며 이 지역 원주민들은 거기를 "고춧재"라고 부른다 한다.
10 : 45 상월봉(1394) 도착
대간길이 애매하여 여러 갈래길의 리본따라 한참 헤매다 주목관리소 건물에서 만났던 젊은이들에게 추월을 당하였다.그 젊은이들이 지나간 길은 상월봉 도착하기 100여미터 직전에서 좌회전한다. 그곳으로 내려가 젊은이들 뒤를 멀리 따라가니 능선길이 나타나며 대간 표지기도 보인다. 응달쪽으로 간간이 눈길은 계속되나 적설량이 너무 적어서 아이젠은 착용할 수 없으나 미끄럽다.
11 : 20 늦은맥이고개 도착
이정표에는 형제봉만 표시되어 있지 고치령은 표시가 안되어 있다.
구인사쪽 신선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대간 능선을 따라 약 1 Km쯤 내리막길을 동진하여 내려가니 눈길이 없어지고 포근한 낙엽이 깔린 길이 시작된다.
몇차례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지루한 능선길을 가다가 연화동 갈림길을 만나다. 지도상의 마당치는 어디인지도 모르고지나치다.
한낮 햇살이 내려 쪼이는데도 춥다. 하룻밤 사이에 기후가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어 버렸다. 어제는 내복 상의를 벗고 남방셔츠 팔 소매를 걷어올려 반 팔 상태로 산행을 하여도 더워서 진땀을 흘렸는데 오늘은 외투까지 입었어도 춥다.
14 : 20 1,032봉 헬기장 아래 우측 갈림길 도착.
봉우리 헬기장으로 올라서지 않고 그 우측 사면에서 갈림길이 갈라진다. 서 있는 이정표에 형제봉 2. 8 Km, 고치령 1. 9 Km라 쓰여있다. 이곳부터 고치령까지는 계속되는 내리막에 편안한 길이다.
15 : 00 고치령 도착.
금년 단기4334년도(2001)의 대간 종주를 마감하고, 겨울을 지나 이제 내년을 기약하여 본다.내년에 다시 종주길이 이어질 시간이 생길지 모르겠다.
고도가 낮아져서인지 날씨가 한결 포근하여지고 바람도 잠잠하다.
산길에서 비포장도로로 내려서는 절개지 비탈로 두 군데나 내리막길에 대간 표지기가 달려 있는데 높이가 2 - 3미터나 되는 절개지 급경사여서 산행객의 발자국에 훼손이 심하다. 훼손되지 않게 도로로 내려서는 길이 없나 우측을 바라보니절개지 시작점에서 우회전하여 경사가 완만하여 지면서 도로로 내려서는 길이 있는데 나뭇가지에 가려서 잘 안보이니까사람들이 급경사로 내려서는 것 같다.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지를 꺾어내어 잘 보이도록 한 다음, 급경사 내리막으로 걸려있는 대간 표지기들 10여개를 모두 회수하여 완경사길 쪽으로 달아 나가면서 유도하여 놓다.이제는 급경사 절개지가 훼손되지 않을 것 같다.
고치령 도로에 내려서서 지도상에 산신각이 있다고 설명된 곳을 보니 편편한 마당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팔뚝 굵기의 나무를 심어 조경을 하여 놓았다. 이리 저리 찾아보았으나 산신각은 없다.
단양 쪽으로 고개를 넘으니 길 우측 공터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그 한켠에 돌 위에 앉아 무슨 음식인가를 먹고 있는 40대 후반의 등산복 차림 부부에게 산신각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니, 음식을 먹는 중에 대답을 드려 죄송하다면서 입안의 음식을 다 넘기고 난 다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산신각이 있어 지나는 길에 참배도 하고 갔는데이번에 오니 없어졌다며 나무가 심어진 편편한 마당이 산신각터라고 한다. 누가 무슨 이유로 철거를 하였는지 모르겠다는것이었다. 인터넷에서 공원관리공단에 질문하겠다 한다. 지도에 표시된 샘터를 물으니 모른다 한다.
(※ 주 ; 후일 인터넷 검색을 하여보다 고치령 산신각은 4334년(2001) 04월 23일 밤에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벽에 풍기에서 출발할 때에 작은 물병 하나에 소주를 사서 부어넣고 도중에 입도 대지 않고 가지고 온 것은 고치령 산신각에 술 한잔을 따라 올리고 무사 안전산행을 끝낸 데 대한 감사의 참배를 드리려 했는데 덧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할까. 전국적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산신각 중 또 하나가 이렇게 허망하게 없어져 버렸다는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그 동안 우리는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백인 우월주의 국가들의 교묘한 간접적인 교사(敎唆)를 받아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들을 미신이니 우상이니 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천시하며 파괴하여 왔는가 ?
거기에다가 식민지시대에 일제(日帝)는 우리 배달겨레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미신타파라는 미명을 빌어 전통문화 파괴에 혈안이 되어 가세하지 않았던가 ?
백인들로부터 주권을 지켰던 중국, 왜국(倭國)은 물론이요, 수백 년 식민통치를 받았던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기타 동남아시아국가, 중동 아랍제국 등은 그래도 전통문화와 전통종교를 잃지 않고 지켜나가고 있지 아니한가 ?
무엇이 미신이고 무엇이 우상이며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 나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에 고치령 산신각은 분명히 우리 전통 문화유산의 하나인데 이 땅에서 증발하여 버린 것이다.
산신각에 대한 답변을 하여 준 그 남자는 나에게 어디에서 출발하여 오느냐고 묻기에 백두대간 종주 중인데 오늘 새벽 죽령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 놀란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좌석리로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는 데 잠깐 사이에도 지프차 두어대, 승용차 서너 대, 봉고 등 소형승합차 서너 대, 소형트럭 몇 대 등이 지나가는 등 자동차 왕래가 꽤나 많다.
노면 상태는 정비를 하였는지 비포장길 치고는 양호하여 차량통행에는 큰 문제가 없겠다. 지도의 차량통행불가 표시와는좀 다르다.
약 500여미터쯤 걸어 내려가니 배가 고프다. 그러고 보니 강풍에 시달리며 적당한 장소가 없어 아침 08 : 10에 비로봉 주목관리소에 들어가 김밥을 먹은 후 여태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길가에 넙적한 돌이 있어 배낭에서 남은 김밥 1인분을꺼내어 소주 반주로 오래오래 꼭꼭 씹어 삼키다.
거의 다 먹어갈 즈음에 조금 전 고치령에서 만난 등산복 차림의 부부가 내려온다. 고치령에서의 대화시에 태도가 너무나 정중하고 겸손하였으므로 나도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서서 인사를 하며 마을로 내려가다가 너무 배가 고파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말하니, 자신들의 승용차가 한참 아래쪽에 있으니 같이 타고 가자면서 식사를 끝마치고 내려오라며 먼저 천천히가겠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부지런히 남은 김밥을 먹어 치우고 뒤따라서 약 1 Km 가량 걸어 내려가니 길가에승용차가 한대가 서 있다.
승용차 편승의 동승 편의제공을 받아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 남자 분은 안동에서 교직에 종사하며 1954년생,성명은 박양백이라 한다. 등산을 다녀오는 길인지 물으니, 등산은 하지 않고 가끔 부부가 이렇게 승용차를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산책 정도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에 영주로 가도 되고, 풍기로 가도 상관이 없으니 안동 가시는 길목에 두 군데 중 아무 데나 하차하도록 하여 달라고 하니, 풍기에 마침 볼일이 있으니 풍기로 가겠다 한다.
좌석리 세거리 마을 포장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이르니 길가의 어느 집에 "민박"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다. 아마 대간 종주객들이 가끔 묵어 가는 것 같다.
승용차를 운전하는 박양백 선생님은 고치령 산신각 복원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대단한 분이시다.
(※ 주 ; 그 후 이분의 활동상황에 대하여는 알 수 없었지만 4335년 말인지 4336년 초인지 고치령 산신각이 복원되었다는소식을 들었는데 이분의 활약도 일조하지 않았겠는가 추측된다.)
16 : 40 풍기역 도착
두분 부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풍기역으로 들어가 충북선 경유 서울행 17 : 25발 무궁화호 좌석을 문의하니 일요일이라 수원까지 좌석이 없다한다. 가능한 곳까지만 좌석을 달라 하니 청주까지 좌석이 1장 있다기에 구입하다. (열차비는 기록을 안하여 기억이 안난다.)
◇ 귀가
○ 단기 4334년(2001) 11월 11일 (일)
17 : 25 풍기역에서 무궁화 일반실 승차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청주까지의 차표를 반환하고, 수원까지 연장한 차표를 다시 받다.(청주-수원간 연장 요금 5,400원)
피곤하여 자리에 앉은 후 한참 지나 잠이 들었다 깨니 충주를 지나 청주로 가고 있다.
청주에서 좌석을 비켜주고 배낭에서 신문지를 꺼내들고 객실을 나와 출입문 계단에 신문지를깔고 걸터앉아 수원역까지 가다.
21 : 40 수원역 도착
시내버스로 귀가하다.
연속하여 4일간의 산행으로 며칠동안 쉬어야 할 것인데 그러고 나면 국립공원 구역은 11월 15일부터 산불방지 경방기간이어서 입산 금지가 되고, 날씨 또한 추워져서 겨울 산행은 무리가 뒤따를 것이다.
이제 겨울동안은 휴업신고를 하였던 영업을 내년에 재개하기 위한 구상을 하면서 근교산을 오르며 대간으로 뻗어 나가려는 욕망을 달래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산행이 안전하여지는 내년 5월 하순경부터나 다시 대간 종주를 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이전에 휴업하였던 영업을 재개 한다면 이제부터는 주말을 이용한 구간 종주로 전환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백두대간은 내년을 기약하면서 긴 겨울잠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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