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록(追憶錄)
오밤중에 [기수빳따] 를 맞고서 탈영을 했던 군 복무 시절의 추억
by 박달령
2020. 3. 7.
내가 병역 의무복무를 위하여 충남 논산의 육군 제2훈련소 [수용연대]에 입소한 때는 1967. 03. 29.이었습니다. [수용연대]에서 1주일간 세월을 보내다가, [논산훈련소 제28연대 제6중대 제1소대]로 배속된 때는 1967. 04. 04. 이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인 1967. 04. 06. 논산훈련소 입소식이 거행 되었으며, 이 날이 내가 군 입대를 한 날이고, 이 날에 군번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육군에 입대한 훈련병들의 군번은 8개의 숫자가 연결되었었는데, 공통점은 맨 앞자리가 [11]번부터 시작하고, 이어서 숫자가 6자리가 이어지는 군번으로서 "[1173 5871]의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군번 모습은, ["11735871"]의 형태였는데, 나보다 2년 정도 앞서 입대한 선임병들의 군번은 ["11"] 의 단위가 아닌 "10" 의 단위로 시작되는 ["10xxxxxx"] 형태의 군번을 받아 사용 하였습니다.10으로 시작되는 ["10xx xxxx"] 형태의 군번을 받은 선임병들은 내가 부여 받은 ["11xxxxx"] 형태의 군번을 가리켜서 『와리바시 군번』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나와 대등한 직위의 후임병들을 부르면서, [후임병 들을 멸시하는 군번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었습니다. 『와리바시 군번』이라는 의미는 군번 앞자리 11번이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왜국어에 오염된 잔재가 없어지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나무젖가락 한벌(2개)을 세워놓은 모습이라는 뜻의 『와리바시』라는, 『쪽발이 왜놈 새끼』들인 [구구단 2단 끝 줄(2X9=18)놈들(이구우우우우~씨팔놈들)]의 용어를 인용하여 선임병들이 후임병들을 ["와리바시 군번"] 이라고 호칭을 하면서 후임 졸병(卒兵)들을 멸시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의 기초교육 훈련을 마치고 1967. 05. 17. 논산훈련소에서 졸업식을 마친 다음에, 야간에 운행하는 군용열차를 타고 경북 영천군에 소재하였 던 특수 병과인
["육군헌병학교"]에 도착하여, 1967. 05. 21. 배정받은 육군특수병과 [헌병학교]에 ㅡ [201기생 ]ㅡ 으로 입교(入校)하여 8주간의 헌병 교육 훈련을 수료하고,
1967. 07. 15. 졸업식을 마친 다음, 다시 야간운행 군용열차에 올라서 장거리 부대 로 이동을 하여 최전방, 6사단에 도착하여 보병연대나, 포병부대가 아닌 특수병과 양성학교 수료생으로 편성하는 여러 개의 [사단 직할중대] 중 하나인 특수병과 부대인 [헌병중대]에 1967. 07. 20. 배속되어 이 부대에서 본격적인 군 복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악질 고참병들은 이상과 같이 후임 졸병들이 전입을 하여 오면, 전입하는 당해 졸병들을 집합시켜 놓고서, 『신임 졸병들이 지켜야 할 3대수칙』 이라는 다음과 같은 졸병 고통의 규정을 암기를 하라고 엄명을 내렸었습니다.
ㅡ [ 고참병들이 교육을 시키는, 신임 졸병들이 지켜야 할 군대복무의 3대수칙] ㅡ
ㅡ [1] 주는대로 먹고~!!!
ㅡ [2] 시키는대로 일하고~!!!,
ㅡ [3] 때리는대로 맞아라~!!!
그런데 내가 이러한 육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선임 고참병]들이 [졸병]들을 향하여 사소한 사유로라도, 핑계를 내세워서 [빳따]라는 몽둥이로 무자비한 구타를 하여, 당시의 여가수이신 "이미자 씨"라는 여가수가 불러서 유행을 시킨 [슬픈 곡조]의 [『동백아가씨』]라는 유행가의 가사(歌辭)를 다음과 같이 [개사(改思)]를 하여 노래를 불렀던 반세기(半歲期) 이전의 서러웠던 추억이 떠 오릅니다.
[본래의가수 이미자씨의가사] ㅡ>[빳따 맞은 졸병들이 개사(改思)한가사] ㅡ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밤을, ㅡ>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빳따~!!!, ㅡ 내가슴 도려내는아픔에 겨워,ㅡ>엉덩이를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ㅡ 얼마나울었던가 동백아가씨, ㅡ>얼마나 울었던가, 육군 졸병들~!!!, ㅡ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지쳐서, ㅡ>빳따를 맞다 지쳐서, 울다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들었소. ㅡ> 엉덩이는 파랗게 멍이 들었소~!!!.
그리고 당시의 악질 고참병들은 부대내에 항상 7~10여명 정도로 기억 되는데, 낮의 일과시간(08 : 00 ~ 17 : 00)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끝낸 후 내무반에서 저녁 21 : 00경 까지는 내무반 청소를 하거나, 내무생활의 방식을 교육을 받다가, 일석점호 준비를 하고 나서, 이상과 같이 후임 졸병들이 전입을 하여 오면 당해 졸병들 을 집합시켜놓고서 『졸병들이 지켜야 할 3대수칙』이라는 다음과 같은 [졸병괴롭힘 규정]을 암기하라고 엄명을 내렸었습니다.
<신임 졸병들이 지켜야 할 3대 수칙> ㅡ [1] 주는대로 먹고~!!! ,
ㅡ [2] 시키는대로 일 하고~!!!,
ㅡ [3] 때리는대로 맞아라~!!!
그런데 내가 이러한 육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고참병들이 졸병들을 향하여, 사소한 사유로라도 핑계를 삼아서 문책 하면서, 『빳따』라는 왜국식, 명칭으로 부르던, 곡괭이자루 크기의 몽둥이로 졸병들 엉덩이를, 매일 떡을 치듯이 구타하는, 악질 고참병들의 후임 졸병 구타행위가 공공연시 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악질 고참병들의 졸병 구타행위가, 공공연시 되는 풍조에, 견디기 힘든 졸병들은 휴일날에 몇 명씩 짝을 이루어, 부대장의 [외출허가]를 받아, 인근의 민가 식당이나 주점에서 외식을 하는 기회를 얻은 경우에는, 술을 몇 잔씩 마시면서 여러가지의 노래를 부르다 외출이 끝나고서 귀대하여야 할 시간이 임박하면, 부대로 되돌아오기도 하였었는데, 기억에 남아있는 노래 중
하나는 당시의 유명했던 여자 가수 [이미자] 씨가 부른, 『동백아가씨』라는 유행가를 아래와
같이 개사(改詞)하여 부르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서러움을 달래던, 서글펐던 추억이 떠 오릅
니다.
[본래의개화를 아니한[동백아가씨]가사]ㅡ>[빳따맞은 신임졸병들이 개화한가사 ㅡ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밤을, ㅡㅡㅡㅡㅡ>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빳따~!!!,
ㅡ 내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ㅡㅡㅡㅡㅡ>엉덩이를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ㅡ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ㅡㅡㅡㅡㅡ>얼마나 울었던가 육군 졸병들~!!!,
ㅡ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ㅡㅡㅡㅡㅡ>빳다 맞다 지쳐서 울다 지쳐서~!!!,
ㅡ 꽃 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ㅡㅡㅡㅡ> 엉덩이는 파랗게 멍이 들었소~!!!.
[그리고 나서, 본격적인 군 복무시절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967. 07. 22. 헌병중대 요원으로 정식 일보 등재, 순찰소대 배속
2) 1967. 09. 01. 일등병 진급
3) 1967. 09. 07. 헌병참모부 작전서기병 보직([작전계장 신우식 소위님], 중대선임하사관
: [김병열] 고령(高齡)의 육군 중사(重士)님)
4) 1968. 01. 21. 북한 특수부대(124군 무장공비 부대) 남파사건 발발.
([1.21사건] 또는 [김신조 사건]),
(이 날 밤의 전 장병 전역(제대) 중지, 휴가 중지 (전역 중지, 휴가 중지)
5) 1968. 05. 01. 육군 상등병 진급
6) 1968. 09. 27. 야간 23:00 경 최고 고참 [성실(병장)]이 내무반 졸병들 기상시켜서
몽둥이질을 하여 [기수빳따](육군헌병학교 201기)를 15대를 맞고 난 직후에,
(나의 윗 기수생인(헌병학교187기) 안상태 상병에게서 기수빳따15대 맞고 나서,
나의 아랫기수(헌병학교 206기) ["임 정" 상병]에게 기수빳따16대를 때렸습니다) 7) 1968. 09. 28. 전날밤 기수빳따를 맞고서 당시의 헌병중대장이시던 길형 대위님께, 악질 고참병들의 "기수빳다" 집행행위의 악행과, 기수빳다를 맞은 직후에 고참병들이
취침을 명령하여 이불속에서 내 소유인 칼빈소총과, 휴대품(실탄 30여 발이 들어있는
탄박을, 칼빈소총에꽂아서 장탄을 하여, 이불을 덮고 누워서 맞은편 침상에 누워있는
악행 고참병들 3인을 총살시키려고 겨누고 있다가, 잠이 들어버려, 총탄 발사를 하지
아니하고, 새벽에기상하여 군복을입고, 업무를행하던 사무실로이동하여, 책상에 백지
편지지를 가져다 놓고서 위와 같은 기수빳따의 악행 행위를 기재하여, 중대장 길형 대위님께 편지를 작성하여 편지봉투에 담아서, 중대장님의 책상 서랍에 넣어놓고,
밤새도록 장탄하여 숨겨가지고 있었던 칼빈소총도 중대장님의 책상서랍에 숨겨놓은
다음에, 즉각 1968. 09. 28. 새벽에 탈영을 하여버리고 말았습니다.)
8) 이처럼 탈영을 하고 나서 고향의 집에 돌아가서 며칠간 여기 저기 놀러 다니다가, 내가
복무하던 6사단의 인근의 부대인 1968. 10. 07.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서 제5군단 소속
의 제 22헌병중대에서,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김세호 병장]에게 체포되어, 6사단 헌병중 대에 인계 되었으며, 6사단 헌병 중대장이신 길형대위님께 인계되었습니다.
9) 1969. 02. 01. 병장 진급
10) 1969. 6월초순 제6사단 의무중대 환자 내무반에 입실(무좀 악화)
11) 1969. 7월중순 의무중대 환자 내무반에서 퇴실, 귀대 후 육군 병장에 진급한지 5개월 이상인 사병들에게 [일반하사] 진급시험 응시 자격의 소속 사단사령부의 사단장 공문이 도착되어, 일반 하사 진급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였습니다.
12) 그리하여, 1969. 12. 01.에 헌병 하사로 진급 (**107207)
13) 1970. 02. 03. 부대원인 김기수 일병과 야간 외출을 나가서 강원도 철원읍 화지리 소재
모 주점에서 폭력 난동으로 싸우면서 KO시키고, 싸움 장소를 회피 하여 경기도 포천군 운천읍 여관에서 그날 밤을 숙박 하였습니다.
14) 1970. 02. 18. 제대특명에 의거하여 보병 제6사단 출발
15) 1970. 02. 19. 전라북도 전주의 향토예비사단(35사단) 도착
16) 1970. 02. 21. 전주의 향토예비사단(35사단)에서 [전역(제대)식]을 마침.
17) 1970. 02. 22. 완전한 귀향을 하였습니다.(나의 [대한민국 육군] 총 복무기간=34개월 17일) ㅡ 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