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단기(檀紀) 4355년(서기 2022년) 1월 21일입니다.
해마다 1월 21일이 되면, 이 글을 쓰는 때로부터 반 세기가 딱 4년 더 한 단기4301년(서기1968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의 청와대에서 멀지 않은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 경찰초소에서, 북한에서 남파한 우리나라의 "참 군인" 이신「한신장군의 사병 제1주의」및 「1. 21사건」, 또는「김신조 사건」 (해마다 1월 21일을 맞으면 떠오르는 옛 추억 이야기)과 관련된 교전(交戰)이 시작된 「1. 21사건」 이 추억으로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1. 21사건」이란, 북한군 특수8군단 124군부대에서 차출되어 청와대 습격 폭파 및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암살의 비밀지령을 받은 북한 특수부대원 전원이 하급 장교로 조직된 1개 소대 규모의 31명의 무장공비가 남한 국군의 복장으로 위장한 후, 1968년 1월 18일 자정(自正(오밤중 00:00시)에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직후부터 야간(夜間)을 이용 하여 1월 20일 22시경 청와대를 향하여 신속한 행군을 하던 중 세검정 고개 자하문 앞에 짧은 시간에 도달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경찰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경찰관들의 검문을 받아 행군이 저지를 당하게 되어 , 무장공비들의 정체가 탄로나게 되자, 공비들은 출동 경찰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살상을 하면서 시간은 00:00이 지나면서 1월 21일을 맞게 되었고, 현장을 지휘하시던 경찰서장 최규식 (崔圭植) 총경께서 전사(戰死)를 하시고 부하 경찰관 2인이 중상을 입었으며, 현장을 지나가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시내버스 승객들인 민간인 5인이 살해되었는데 바로 이 날짜를 붙여서 「1. 21(일-이일)사태」라고 하거나, 또는 이 사건에서 생포된 북한군 무장공비" 「김신조"소위」의 이름을 붙여서 「김신조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교전이 시작된 직후 곧바로 출동한 군경합동 수색진은 1월31일까지 공비 28명을 사살하고 북한 육군의 하급 위관 장교인 김신조(金新朝) 소위 1명을 생포했으나 생포되지 아니한 남파공비 30명 중 2명은 휴전선을 넘어 월북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나머지 숫자는 총포전투를 통하여 사살되었었습니다. 다만 생포되되어 한국군에 귀순을 선언하였었던 무장공비 김신조 소위는 남한의 일반시민의 자격으로 석방되고 나서, 기독교 신도가 되고 난 직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서울 영등포구에 소재하는 성락교회의 목사가 되어 재직 중이시라 합니다.)
당시 나는 졸병(육군 상등병)으로 강원도 철원 중부전선 전방에서 육군 제6사단의 사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서부전선으로 침투하는 공비들은 야간 행군으로 신속하게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아군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대낮에 공비 은신지역 인근의 산에 땔나무를 하러 다니던 원주민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원주민들은, 북한군 공비들이 남한의 국군 복장으로 위장을 하기는 하였지만 거동이 수상하다는 신고를, 실제 목격한 원주민들이 군경부대에 여러 차례 신고를 하는 바람에 서부전선은 물론이고, 서부전선과 접경지역인 중부전선에까지 거동수상자 [약칭 : 거수자(居首者)] 목격사실이 신고 되었으므로 내가 복무중인 부대도 비상이 걸렸었습니다.
주민들로부터 거동수상자(擧動受賞者)[약칭 : 거수자] 목격 신고를 받고 군경부대가 출동하여 30분~1시간쯤 후 현장에 도착한 후에 반경 2Km정도를 포위 수색을 하였어도, 공비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하여 완전군장을 메고서도 한 시간에 8 Km를 달린다는 특수게릴라전 부대였으므로 이미 4Km~8Km정도를 내달려 포위망을 벗어나버린 후였으니, 꼬리를 잡히지 않고 휴전선을 넘은지 불과 3일이 채 못되어서 서울의 자하문 앞에까지 신속하게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1월 21일부터 각 중대별로 30~50여 명씩 교대로 차출되어 주간은 물론 야간에까지도 공비 수색 및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작전은 한 달쯤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나도 이 작전에 차출되어 5일간 5번을 수색작전에 참가하였었습니다. 그 중 야간수색작전은 딱 하루를(1일을) 참가하였었는데, 어두운 밤에 총구를 앞으로 내밀고 산기슭 아래의 논과 밭을 헤매고 다니면서 "후미진 곳에서 먼저 나를 발견한 무장공비가 나를 향하여 사격을 하면 나는 꼼짝없이 즉사하고 말겠구나~!!!"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어 우울한 시간을 보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아군 전사자]들 중 최고 계급은 모 부대의 연대장인 육군 [대령]이었 었는데 권총을 뽑아들고 부대원을 진두지휘하며 공비들이 포위되어 갇혀있는 산 정상인 고지를 향하여 돌격하다가 무장공비들이 발사한기관단총에 명중되어 전사하셨다고들은기억이 납니다.
북한 특수 8군단인 124군 부대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착용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며, 전투 배낭을 메고서 한 시간에 8 Km를 달린다는 특수 게릴라전 부대로 양성된다는 사실을 무장공비 김신조 소위를 생포하여 124군 특수전 게릴라부대 하급장교의 진술을 듣고서 알게 된 군 당국에서는 전국의 군부대에 이러한 강도 높은 훈련 지시를 하여 그 바람에 내가 소속한 부대도 틈만나면 전투훈련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느라고 무지무지하게 힘이 들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낡아서 버리는 군복을 잘라서 한쪽에 1 Kg씩의 모래가 들어가는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아침 기상시부터 저녁 취침시간까지 하루 종일 양 다리에 착용하고 군복무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전시(戰時)가 되어 모래주머니를 벗고서 전투에 임하면 몸이 날렵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모래주머니를 차고 1969년 가을까지 1년 이상을 지냈을 무렵 당시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이셨었던 한신 (韓信)중장님이 내가 소속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심과 동시에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1군사령관)으로 부임해오셔서 1군사령부 예하 사단을 시찰하시던 도중에 모래 주머니를 다리에 차고 다니는 장병들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신 직후 즉석에서 장병들을 고생 그만 시키고 이 시각 부터 즉각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산하의 장병들의 모래주머니를 모두 떼어내라고 엄명을 내리시는 바람에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모래주머니로부터 해방이 되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북한 특수 8군단인 124군 부대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여 완전군장을 메고서, 한 시간에 8 Km를 달린다는 특수 게릴라전 부대로 양성된다는 사실을, 북한이 파견한 무장공비 김신조 소위를 생포하여 진술을 듣고서 알게 된 군 당국에서는 전군에 강도 높은 훈련 지시를 하여 그 바람에 내가 소속한 부대도 틈만나면 전투훈련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느라고 무지무지하게 힘이 들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낡아서 버리는 군복을 잘라서 한쪽에 1 Kg씩의 모래가 들어가는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아침 기상시에 내무반장의 점검 대상이 되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한신대장님은 군 지휘관으로서의 소신(所信)은 이른바, "사병(士兵) 제일주의자(第壹主意者)" 이셨습니다.
그리고 한신 장군님께서 이 처럼 제창하신 [사병 제일주의]의 [5대 실천구호]는,
"① 잘 먹여라~!!!.",
"② 잘 입혀라~!!!.",
"③ 잘 재워라~!!!."
"④ 근심, 걱정을 철저히 해결하여 주라~!!!."
"⑤ 교육, 훈련을 철저히 하라~!!!". 였습니다.
그야말로 이러한 "사병(士兵) 제일주의"의, 이 5대 실천구호의 이야기를 듣게 된 나의 느낌은 한신 장군님에 대하여 내 마음을 모두 바치게 되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신 장군님은 예고 없이 예하부대를 불시에 암행순시를 하시던 도중에 군 부대의 식당을 급습하여, 국방부에서 조달되는 육군 정량의 식사배급이 안 되고 있으면, 부대장은 직위해제를 시켜 버리시고, 군 보급관과 취사병은 즉석에서 영창(감옥)으로 보내는 식으로 사병을 위한 "① 잘 먹여라."라는 구호를 실천하시는 군대행정을 펼치셨습니다.
낡아서 구멍이 뚫린 옷을 입은 사병이 발견이 되시면 즉석에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사병을 위한, "② 잘 입혀라."라는 구호를실천하시는 군대행정을 펼치셨고, 야간 순시때 사병들이 취침하는 내무반이 춥거나 하면 위와 마찬가지로 불호령이 떨어지니 위와 같은 방법으로 사병을 위한 "③ 잘 재워라."라는 구호를 실천하시는 군대행정도 펼치셨었습니다.
그래서 한신장군님의 휘하부대 지휘관들은 군수품을 횡령하는 부정부패를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군대의 내부에서 유일하게 한신장군님이 참된 군인이라는 칭송을 장병들로부터 듣게 되셨었습니다. 한신 장군님은 고집불통의 장군님이시기도 하셨습니다.
5. 16 쿠데타로 군정(軍政)이 실시될 당시 육군 소장이셨던 한신장군님은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내셨는데, 민정이양때 혁명 주체세력들은 모두 군복을 벗고 예편하여 정치계에 입문을 하였으나, 유독 한신장군님 혼자서만 5.16 당시의 혁명공약대로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군복을 착용하신 상태로 군 부대로 원대 복귀를 하실만큼 고집스러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사혁명주체세력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랬는지 한신장군님은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을 지내신 직후, 육군 최고의 영예로운 보직인 참모총장을 지내시지 못하시고, 바로 육군 대장으로 승진을 하시고서도 합참의장(육군, 해군, 공군 등 3군합동참모총장) 보직을 임명받으셔서 복무 하시다가 예편을 하시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라는 속담이 맞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사례였었습니다.
한신대장님의 약력은 1922년 출생으로, 1946년 육사 2기생으로로 임관을 받아 1950년 수도사단 제1연대장으로 6. 25 한국전쟁에 참가하셔서 한강/기계전투시 혁혁한 전승을 올린 명장이시기도 한데, 휴전후 수도사단장, 6군단장,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합참의장(육군, 해군, 공군 등 3군합동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시고 1975년(53세)에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셨습니다.
위와 같이 한신 장군님은 병사 복지구현과 교육훈련 체계를 정립하는 등 전형적인 위국헌신의 군인상으로서, 수 많은 후배 장교들로 부터 "참 군인"으로 존경을 받으셨으며, 그 당시 한신장군님 휘하의 부대에서는 절대로 부정부패가 없었고, 한신장군님이 지휘 하시는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항상 긴장상태에서 벌벌 떨었다고 하는, 전설적인 참 군인 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년 이상을 다리에 착용하고 다닌 모래주머니가 나에게 준 선물은 지금도 내 몸에 남아있습니다. 바지를 벗고 양다리 앞정강이를 살펴보면 촛대뼈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 부위는 모래주머니에 뭉개져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털이 자라지 않고, 그 좌우 장단지에만 털이 나고 있는 현상은 그 때의 모래주머니가 준 선물인 것입니다.
나라와 군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한신장군님은 1996년 5월 6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으며, [서울국립현충원]의 "[제3 장군 묘역]"에 안장 되셨습니다. 정부는 한신 장군님의 전공과 헌신을 기려 1953년 8월 27일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바 있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두뇌 속에서 잊혀지지 아니하고 있는 한신 장군님께서 제창하여 시행하신 "사병(士兵) 제일주의(第壹主意)"의 5대 실천구호였던, 사병들을 "①잘 먹여라.", "②잘 입혀라.", "③잘 재워라.", "④ 근심, 걱정을 철저히 해결하여 주라~!!!.", "⑤ 교육, 훈련을 철저히 하라~!!!". 라고 하신 내용의 실천 구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정부는 한신장군님의 전공과 헌신을 기려 1953년 8월 27일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바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직 현재 이 세상을 떠나신 한신 장군님의 명복을 빌기만 하고 있는 중입니다.)
ㅡ 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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