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교주 암살사건 발생
서교주는 구속당하였다 석방된 후 표면적인 활동은 없었다. 종전처럼 교세확장을 위한 포교는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타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흐트러진 교세를 내부적으로 재정비
하는데 조용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약 1~2년 간은 이탈되고 남은 신도들만으로
용화교는 그럭저럭 현상은 유지해 나갔다.
그런데 마침내 서교주에게 인간세계와의 인연이 소멸되어버리는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서교주는 그 당시 전주 원각사에 기거하고 있던 중 계절이 초봄이었던 1966년 3월 22일 새벽
02 : 20경에 휴가를 나온 23세의『소윤하(본명 소재열)』라는 이름의 육군 병사가 휘두르는
군 전투용 대검(帶劍)에 찔려 숨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 병사는 피묻은 대검을 손에 든 채 경찰관 파출소에 달려가 자수를 하였다. 이 사건은
종전의 강간사건만큼 주목을 끌지는 못했어도 언론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세상을 놀라
게 하였다. 이로써 한 때 사이비종교의 교주로서 일세를 풍미하던 80세 가까운 고령에 노익장
을 과시하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은 암살에 의하여 비참한 생애를 끝마쳤던 것이다.
그러면 왜 육군 사병으로 복무 중이던 이 청년은 서교주를 암살하게 되었는가?
나는 이 당시 신문이나 방송을 접할 여건이 아니어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내용은 자세히 알지 못
하였다.
다만 내 주변의 마을 주민들과 용화교를 믿었던 신도들의 입을 통하여 얻어들은 소문에 의하면
범행을 한 그 청년 역시 용화교 신도 가정의 자제(子弟)였다 한다. 그는 나이 어려서부터 사귀던
애인이 있었다. 그 애인의 부모도 용화교 신도였다.
사랑을 불태우던 그 연인들 중 청년은 징병 연령이 되어 육군에 입대하고 그 직후에 여자의 부모는
딸을 강제로 성화대에 출가시켜 여승을 만들었으니 바로 서교주가 간음으로 구속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직후에 서교주 구속사태가 일어났고, 청년은 휴가를 나와 성화대에 입산한 애인을 찾아가 환속
(還俗)하여 결혼을 하자고 종용하자, 그녀는 소문과 같이 서교주에게 이미 정조를 더럽혀진 몸으로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쏟으며 고백하는 말을 듣는 순간 청년은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좌절감을 삼키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귀대(歸隊)한 후 고민을 거듭하다가 서교주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고, 다음 휴가를 나올 때
군용(軍用) 대검(帶劍) 한 자루를 몰래 가지고 나와 밤중에 전주 원각사에 잠입하여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 청년은 서교주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증오감에 치를 떨었다. 자신이 모은 재산은 아니
지만 응당 자신이 상속을 받았어야 할 부모의 막대한 재산을 서교주에게 상납해버려 경제적으로 앞길
은 암담 하기만 한데다가, 애인까지 서교주에게 빼앗겼으며 거기에다가 피해자는 자신 뿐만이 아니고
부지기수였으니 이러한 자를 이 세상에서 제거하여 더 이상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어야겠다는 정의감
도 한 구석에서 작용하여 과감하게 행동을 하게 되었다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내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사람들 중 소수의 용화교 골수적인 신도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 공히 서교주를 암살한 청년에게 100% 동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교주의 암
살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는 식으로 극언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후일 풍문에 들으니 서교주를 암살한 이 청년은 법에서도 정상참작을 받아 1심인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광주고등법원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하니 진즉에 출소하여 지금쯤은
어딘가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서교주가 암살 당한 후 신도들 거의가 노골적으로 이탈의 의사표시를 하였고 용화교의 조직은 와해되어
갔다. 그리고 용화교의 수뇌들은 조용한 가운데 하나의 움직임이 있었다. 많이 와해되었다 하나 그래도
한때는 거대한 조직이었던 용화교 수뇌부는 간부회합을 열어 잔여세력을 수습하여 2세 교주를 선출 추
대하여 용화교를 다시 건전한 신흥종교로 재건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한다.
그리고 나서 용화교는 세인들에게 드러나 다시 화제에 오르내림을 꺼려했음인지 너무도 조용하게 표면에
전혀 나타나지 않게 활동하였으며, 사건 이후 나는 육군 입대를 위하여 고향을 떠난 이후 제대를 하고서도
계속하여 타향을 떠돌았기 때문에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 교세는 아마 거의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화교 신도가 아닌 제3자들은 한결같이 서교주를 일세의 영웅 호걸쯤으로 평가하였다. 그것은 독일의 히
틀러 같은 인물이 비록 인류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긴 했지만 어찌했던 간에 영웅이었다는 식의 사고
방식과 비슷한 논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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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서교주를 암살한 청년에 대한 상세정보 위키백과 링크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9C%A4%ED%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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