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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록(追憶錄)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6회)

by 박달령 2011. 1. 22.

[6] 금산사를 수중에 넣으려 했던 서교주의 좌절

 

서교주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 불교의 1종파로 인정받아 떳떳하게 행세해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불교의 교리를 표절하였고, 용화교 내의 조직 구성이나 생활양식, 제반 의식 절차 등을 불교와 유사하게 행하던 집단의 교주인 그의 속마음은 잘 알 수 없으나 궁극의 목적은 불교의 한 종파로 행세하면서 불교계의 사찰 및 신도들을 흡수하여 한국 불교계를 석권함으로써 교세확장의 극치를 이루어 보고자 의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그의 신도들 중에는 애당초 불교신도가 십중팔구였다. 서교주는 그리하여 그 첫째 목표로 삼은 대상이 금산사(金山寺)였다. 금산사는 전라북도 북부지역을 관장하는 조계종 제17교구본산 사찰이며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대 사찰이다.

 

그리고 성화대와의 거리는 1Km 남짓하였다. 금산사에는 1점의 국보와 수십 점의 보물과 문화재가 있는데, 그 1점의 국보가 바로「미륵전(彌勒殿)」이라는 전각으로 외부는 3층이나, 내부는 1층으로 트인 목조건물로서 중앙에 39척(尺)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실내불(室內佛)인 미륵불상을 조성해 놓았다.

 

서교주는 이 미륵불상을 용화교 미륵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해마다 초여름쯤으로 기억되는 때가 되면 서교주는 위의를 갖춘 불승(佛僧)의 정장을 하고서, 휘하의 수백 남․녀 승려와 수백 신도들에게 호위되어 금산사에 와서 미륵전에 참배하는 것을, 내 또래의 꼬마 친구들과 어울려 신기한 듯이 따라다니며 구경하곤 했었다. 후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서교주의 행사는 자신이 일으킨 종교가 불교의 한 종파라는 제스츄어로 취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서교주는 흡수대상 목표물로 삼은 금산사에 대한 제1단계 전략으로 8.15 해방 후부터 금산사 주지와 협상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용화교의 승려들을 금산사에 입주시켜 순수 불교 승려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수도생활을 영위토록 하자는, 말하자면 용화교와 순수 불교간의 합작협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교주의 합작협상은 번번이 거절을 당하곤 하였다. 정통 순수 불교가 아닌, 외도(外道) 내지는 사교(邪敎) 집단으로 치부하는 용화교와의 합작을 불교계에서 용납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교주는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순수불교와의 합작을 추진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합작에 성공만 하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총력을 동원하여 서교주 자신이 금산사의 주지가 되고, 이렇게만 되면 금산사가 전라북도 북부지역을 관할하는 제17교구본산 사찰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교구 내의 제1인자가 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욱 힘을 길러, 한국 불교계를 한 손에 거머쥘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교주가 이 합작을 쉬 단념하지 못했으며, 이를 위하여 금산사측의 간부급 승려들에게 뇌물의 성격을 띈 금품 제공 및 재정지원의 공약 등 소위 금력(金力)을 수단으로 한 선심공세도 은근히 획책했다는 뒷얘기다.

 

그러나 서교주의 계획은 번번이 미륵전 참배만 승낙 받는 정도 이외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렇지만 서교주는 열 번 찍어서 안되면 스무 번, 또 안되면 설흔 번, 마흔 번 쉬지 않고 찍어보겠다는 집념으로 공작을 벌인 결과 1958년경에 합작협상에 성공하여 수십 명의 용화승들이 금산사에 입주하여 수행을 하게 되었다.

 

과연 서교주의 계획은 성공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금산사에 입주한 서교주 휘하의 용화승들은 처음에는 활기찬 활동을 하였다. 순수 불교승들의 환심을 사려했음인지 모르나 사찰 내의 청소, 환경정리, 사소한 보수작업, 기타 힘든 작업(땔나무, 야채 재배 등)을 모두 이들이 도맡아 해치웠다.

 

뿐만 아니었다. 금산사 인근에 거주하는 신도들의 각 가정에서 한 명씩 부역을 나오게 하여 그때까지 사방이 허술하여 울타리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금산사에 돌담 쌓기 공사를 벌여 한 달도 안되어 길고 긴 돌담을 완성하였다.

 

그것은 돌담이라기보다는 폭 2m, 높이 평균 2m 이상의 소규모 성곽 수준이었다.

허허벌판 같았던 금산사는 그제야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량이 된 것이었다.

담장 공사에 사용된 돌은 근처 냇가에 산재한 것을 지게로 져 날라 온 것들이었다.

 

나는 이 공사현장을 몇 번 지나치면서 공사 광경을 목격 할 기회가 있었다. 하루는 6순에 접어든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수백 명 신도들 틈에 끼어 지게에 15관은 됨직한, 힘에 겨운 돌덩이를 얹어 짊어지고서도 피로한 기색 없이 웃음을 띄우며 신명이 나서 기성(奇聲)을 질러대며 거의 달리다시피 재빨리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노인은 나와 한 마을에 살던 사람으로, 부산에서 이사해 왔다 하여「부산집」이라 불리던 집의 주인이었다. 나는 이 노인의 행동에서「생불 서교주」를 위하여 허약한 노구나마 분골쇄신 봉사하여 그 공덕으로 극락왕생 하겠다는 자발적 의지를 엿볼 수 있었고,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웃음 띈 얼굴에서 우매한 맹종을 읽을 수 있었다.

 

이토록 활발하던 용화승들의 활동이 용두사미처럼 된 것은 불과 2~3개월 뒤였다. 용화승들의 수효가 금산사에서 하나 둘 날마다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서교주측과 금산사측이 어떠한 연유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는지 그 내막은 세상에 공표된 것은 없다. 다만 주변 마을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에 나의 추측을 보태어 판단하건대, 그 무렵은 비구승단과 대처승단 간의 저 유명한 불교분쟁이 고조되었던 시기였으며 이 분쟁은 법정투쟁으로까지 비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양측이 모두 수삼년째 사찰재산 관리권을 두고 재판을 계속 중이어서 재판비용을 조달하느라고 막대한 재정을 소모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양측 모두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던 터이라 금산사를 점유하고 있던 비구승단 측에서 무진장하다고 볼 수 있는 서교주의 재력을 이용하자는 속셈에서,

 

그리고 서교주측은 이러한 불교계의 어려움을 틈타 재력을 미끼로 순수불교에 침투해보겠다는 속셈에서 협상이 성립되어 서교주는 금산사측에 상당한 재정을 제공하고 금산사에 용화승들을 입주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용화승들이 몇 달 후에 금산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아 이 합작협상은 완전히 서교주의 KO패로 일장춘몽이 되어버리고 만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실컷 단물만 빨리고 호락호락 물러설 서교주가 아니라는 점은 그 이듬해 봄에 금산사측에서 부속 암자인「심원암(沈源庵)」을 서교주에게 양도하여 용화승들이 입주한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서교주의 순수 불교계 침투기도는 좌절된 채 일단락 짓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