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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록(追憶錄)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8회)

by 박달령 2011. 1. 22.

 [8] 서 교주의 장남 [미륵봉]

서교주의 본처 소생 장남은 내 큰형님과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가 아니면 1~2년 선배로서 내 큰형님 연배의 청년들과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중키에 건장하면서도 귀공자 풍의 용모, 박식하면서 구수한 화술을 가진 그는 불우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다.

 

일찍이 서교주는 본처를 어린 장남과 함께 소박을 놓아 내쫓았다 한다. 그래서 서교주의 장남은 어린 나이에 출가 입산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法名)을 「미륵봉」이라 하였는데 본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팔도강산을 부운유수(浮雲流水)처럼 떠돌면서 수도를 하던 전형적인 착실한 승려였다. 내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그는 금산사에 와서 오랫동안 수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금산사 아래 약 100여m 떨어진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마을 친구와 쉬고 있으려니 웬 낯익다 싶은 젊은 승려 한 사람이 우리 곁에 와 앉아서 말을 붙이고 이에 화답하여 담소 중에 이런 저런 말끝에 나의 집 위치를 말하자 반색을 하면서「아! 그럼 네가 ××가?」하고 놀라 그 특유의 경상도 말씨로 묻는 것이었다.

 

자기가「미륵봉」이라고 하면서 나를 코흘리개 시절에 보고 난 후 훌쩍 커버린 열아홉 나이에 다시 보니 몰라보겠다고 놀라며 나의 형님을 비롯하여 동년배의 초등학교 친구들 소식과 안부를 고루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난 그와 그 해 여름에 장기도 두어 판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부친 서교주의 슬하를 어려서 떠난 후로 부자(父子)간의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았다. 그리고 부친의 사이비종교 창시와 혹세무민함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다. 어느 때인가 누가「아직도 부친과 불화 하느냐」고 그에게 묻자「그분은 단지 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린 일밖에 없는 분이십니다」라고 해학적이고 함축성 있는 이 한 마디로 질문을 일축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는 한때 돈이 필요하면 성화대를 비롯하여 부친의 사재(私財)가 있는 곳이면 당당하게 들어가 소를 끌고 나오거나 재물을 들고 의젓하게 나와서 팔아 쓰곤 하였는데 서교주의 측근들이 이를 제지하려 하면「옳게 모은 재물도 아닌 아버지 것 아들이 좀 갖다 쓰기로서니 무슨 대수냐? 참견 말아라」하는 식으로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살아있다면 그도 이제는 인생의 황혼인 8순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