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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록(追憶錄)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10회)

by 박달령 2011. 1. 22.

[10] 어느 용화교 신도의 생활


금산사에서 동쪽으로 금산사계곡을 따라 약 2Km쯤 올라가면 심원암(深源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금산사의 부속암자이다. 이 심원암에서 동남쪽으로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약 300~400m쯤 가면「마당재」라는 이름의 산골짜기에 외딴집 한 채가 있었다.


이 외딴집에는「정씨」성을 가진 1962년도 당시 나이로 40대 중반의 경상도에서 이사 온 남자가 처와 세명의 아들 딸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이 가족들은 [마당재] 일대의 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부부간에 용화교로 인하여 싸움이 잦았다.


정씨는 용화교 신도였는데, 부부싸움의 원인은 처가 남편 정씨의 용화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정씨의 처는 한글해독 정도의 학력밖에 안되었지만 순박한 농사꾼으로서의 생활신조를 가지고 이를 하나의 인생관 또는 생활관으로 삼던 여인이었다.


헌데, 이 정씨 가족들이 경상도 고향을 떠나 마당재로 이사를 온 후로 전 가족이 힘들게 노력하여 개간한 땅에서 1년 내내 땀흘려 경작하여 추수한 곡식을 정씨가 해마다 용화교 서교주에게 갖다 바쳐버려, 1년 중 절반 이상의 기간을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며 연명하였고, 정씨의 처는 남편의 이러한 처사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 만류하였다.


처가 만류를 할라치면 정씨는 버럭 화를 내며, 「니년, 정 그라믄 도(道) 안 믿는 사내놈 찾아가 살그레이」 하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이「도(道)」라는 말은 당시 신흥종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신흥종교를 믿는 신자들을 가리켜「도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정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던 군식구가 한 사람 있었다. 정씨의 손아래 처남인데 성은 모르고 이름이「학구」라는 것만 기억한다. 당시 나이 30전후였는데 무슨 병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반신불수의 장애인이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중풍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며 절름거렸고, 입도 한쪽으로 돌아간 구안와사의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발음이 분명치 않아 그의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도 처음은 그랬으나 그와 몇년동안 장기간 대면을 하다 보니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학구]는 2~3년 간 매형인 정씨의 집에 얹혀 살며 용화교 신도가 되었고, 어찌어찌 하여 점술을 배워 그 때부터 승려 복색을 갖추고 외지로 떠돌아다니며 이 점술을 밑천으로 돈벌이를 하였다. 그리고 서교주가 발행한 부적(符籍)도 가지고 다니며 팔기도 하였다.


서교주는 많은 종류의 다양한 부적을 발행하여 신도들에게 가끔씩 나누어주곤 하였으므로 용화교 신도들의 집에 가보면 대문이나 방문, 또는 부엌 문지방 등 여러군데에 붉은 색으로 그린 부적을 항상 볼 수 있었다. 어떤 신도는 병이 들었을 때에 이 부적을 불살라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기도 하였다.


그런데 [학구]의 점술 벌이는 의외로 좋았다 한다. 벌이가 고급 샐러리맨보다 낳았다는 소문이었다. 승복차림의 장애인이 수족을 전후좌우로 떨며 지껄이는 몇 마디씩의 예언이 요행 들어맞기도 하면서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같은 용화교 신도 집안의 장애인 처녀와 결혼해서 따로 집을 지어 더부살이 생활을 청산하고 딴 살림을 차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여전히 외지로 돌아다니며 점술로 벌이를 하면서 금슬 좋게 살았다. [학구]의 처가 된 여자는 어렸을 때에 얼음판에서 놀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어 두 다리를 절게 되었다 한다.


한 번은 내가 친구들과 [학구]를 만나 조용히 산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 그의 과거사를 물어보았더니 20세 전에는 절에서 승려생활을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도중에 환속(還俗)을 하여 머리를 기르고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훤칠한 미남의 장부였다. 그는 그 사진을 보면서 중도에 질병으로 이렇게 장애인이 되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내가 고향을 떠난 후 학구의 그 후 소식 역시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