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내 친구의 여심(女心) 편력과 용화교
고향의 한 마을 친구이며 고등학교 동창인「최○○」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위이다. 그는 고교 2년 때 한 반 여학생과 열애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시골 농촌지역이라 학생 수가 전교생이 100명도 안되게 아주 적었던 미니형 학교여서 남녀공학을 하였으며 남녀 학생들이 학년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었다.
○○이와 열애에 빠졌던 여학생은 이름이「최☆☆」이라 하였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용화교 신도였고 또한「성화대 원장(聖華臺院長)」이라는 그러니까 용화교 총본부인 용화사(성화대)의 관리 운영 책임과 권한을 가진 용화교 수뇌급 인물의 노인이었다.
이 노인은 부부 단 둘이서 내 고향 마을에서 커다란 기와집을 신축하여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노부부의 집에 식구가 하나 늘게 되었으니 그게 ○○이의 애인이 된 여학생 마을로 이사오기 직전에 군산에 있는 영명고등학교에 다녔고, 그 이전에 어려서 아버지를 사별한 뒤 그녀의 어머니는 개가를 하여 경북 왜관에 살고 있었다.
이렇게 고아가 된 그녀는 생활비는 개가한 어머니와 미국에서 살고 있던 이모 등의 경제적 도움으로 해결하며 거주지는 내 고향 마을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정하게 되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나와 한 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외모는 체격이 그래머 스타일이라 할 만큼 풍만한 편이었고, 웨스트, 바스트, 히프 등을 흘러내리는 곡선미가 보기 좋게 잘 조화를 이룬 몸매였다. 목소리도 여성스러워 듣기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얼굴 한군데만은 남자와 같은 강인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첫인상이 호감을 주지 못하였다.
얼굴의 인상이 몸 전체에서 한군데 옥의 티와 같았던 것이다.
내가 그녀와의 대화에서 느낀 그녀의 성품은 약간의 수줍음이 깃들어 보이기는 했어도 활달한 편이었고, 두뇌는 우수한 정도였으며 당시의 연령 수준으로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화제를 가지고 담론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고향은 부산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전라북도 지방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영남의 거센 사투리는 90% 가량 없어졌으되 간간히 어쩌다 한 번씩 튀어나올 만큼 언어는 표준어화 되어 있었다.
○○이가 그녀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이보다 다섯살 아래인 △△이라는 ○○이의 여동생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고교 2학년 되던 해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같은 계열이며 한 울타리 안에 있던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래서 등하교 길에서 자주 만나는 ☆☆이를「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고 둘 사이에 서로 양쪽 집을 자주 왕래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이의 집에 ☆☆이가 놀러갔을 때를 이용하여 ○○이와의 사이가 자연스레 급속도로 가까워져 그 해 늦은 봄부터 열아홉 살의 ○○이와 열여덟 살의 ☆☆ 커플은 밤이면 으슥한 곳에서 밀회를 즐기며 젊음을 불태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은 그 홍안(紅顔)의 젖비린내 나는 연인들은 그들의 밀회현장을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 일이 없었는데도 같은 반 친구들은 이들 둘 사이가 보통 이상이라는 점을 행동과 표정을 보고 눈치를 채게 되어 쉬는 시간이면 ○○이를 짖궂게 놀려대곤 하였다.
그러면 ○○이는 얼굴이 벌개져서「임마! 그건 헛소문이여! 절대 그런 일 없어!」하며 화를 내고 부인하였다. 화를 내며 부인하는 ○○의의 표정을 재미있어 하는 반 친구들 중 곰살궂은 친구가 나서서 멋들어지고 유머러스한 신파극의 대사를 흉내내며 놀려대면 구경하던 친구들은 박장대소를 하였다.
이렇게 놀림을 받은 ○○이는 책상 위의 책이고 필기도구고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씨근덕거리며 집어던졌고, 우리들은 우루루 떼몰려 피하였으며, ○○이는 피하는 우리들을 쫓아다니느라 교실 안이 아수라장이 되는 일이 거의 매일이다시피 반복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터지는 광경이었다.
나도 당시에 농(弄)을 즐기는 편이어서 ○○이와 단 둘이 만나면 조용하게 동서고금의 명언들을 총동원하여 ○○이와 ☆☆이의 사이를 이기죽대면서 놀려댈라치면 듣다듣다 못한 ○○이는 화를 벌컥 내며 피하는 나를 붙잡으려 들었고, 때로는 ○○이에게 붙들려 가끔 얻어 터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망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다 자란 청춘남녀 학생들이 당시 시골의 보수적인 풍토 속에서 한 교실 안에서 같이 수업을 받았었는데 놀림을 받는 당사자인 ○○이의 애인인 ☆☆이 교실 안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킬킬거리며 ○○이를 놀려댔던 까닭에 혹시나 그녀가 눈치채지나 않을까 ○○이는 좌불안석이 되어 안달이 나기도 했었다. 그녀는 우리의 장난질 놀림을 눈치채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른체 하였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김××이라는 한 반 친구가 수업시간 중에 ○○이 옆자리에 앉아서 귓속말로 소근소근 놀려대며 ○○이의 화를 돋구자 참다 못한 ○○이가 교과서를 들어 ××이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그때 칠판에 학습내용을 써 내려가던 수학 선생님은 등 뒤에서 갑자기「퍽!」하는 둔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영문도 모르고 ○○이와 ××이를 불러내어 벌을 주던 일도 생각난다.
그러던 중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을 때 우리는 ☆☆이가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잠적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성화대에 들어가 용화교의 여승이 되었다는 풍문을 들을 수 있었고, 언젠가 길을 가다 지나가던 일행 3~4명의 여승들 중에서 삭발한 머리에 승복을 걸쳐 입고 섞여서 걸어가던 그녀가 내가 인사말을 걸어볼 사이도 없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한쪽으로 꼬고서 휙 지나 가버린는 것을 본 일도 있었다.
☆☆이가 용화교의 여승이 되었던 때는 서교주의 여승 간음사건이 일어난 다음다음 해였다. 우리들은 이 사태를 두고도 또 ○○이를 놀려대었다. ○○이가 그녀를 차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삭발하고 여승이 되었다는 식의 순전히 추측으로 넘겨짚은 놀림이었다.
그 몇 달 뒤 그녀의 자취는 성화대는 물론 내 고향 마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멀리 떠나버렸던 탓이고, 그리고 나서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기억에서 그녀의 영상은 점점 사라져 없어져갔다.
그러고 나서 그 이듬해 고3이 되어 ○○이를 조용한 곳에서 만났을 때 집요하게 유도심문을 하자 이에 걸려들은 ○○이는 ☆☆이와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이의 말에 의하면 오히려 그녀 편에서 더 적극적이었다 한다.
나이에 비해 숙성한 편이었던 그녀는 육체적으로 무르익어 있었고, 성욕도 강하고 정사의 기교도 세련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한 번은 어느 날 밤 밀회시에 ○○이가 그녀의 스커트를 벗기려는데 허리에 꼭 끼워져 채워진 지퍼가 내려지지 않아 낑낑대고 있으려니 그녀가「이렇게 하면 되잖아요?」하면서 스커트 밑자락을 위로 올려주더라는 정도였더라는 것이다.
두 세 달동안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잦은 밀회를 갖고 만나다가 ○○이가 먼저 헤어지자고 선언하고 그 뒤부터 만나주지 않았다 한다. ○○이는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했다. 그녀가 ○○이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언질을 주자,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상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었는데 ☆☆이의 이러한 결혼의 의사표시에 놀라서 단호하게 관계를 끊게 되었다 한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게 구구절절 애절한 비련의 종말을 애닲어하는 만리장성의 편지를 써서 전한 다음 용화교의 여승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고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게 된 그해에 나의 집 앞으로 양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지나가는 그녀를 먼 빛으로 얼핏 보게되었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이한테 가서 그녀를 보았노라고 말했더니, ○○이도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했었는데 성화대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가 몇 달 후에 환속(還俗)하여 친척집에서 머리를 길렀다는 것이다. 그 때는 이미 그녀도 냉정을 되찾아 ○○이와의 대화는 무척 담담했었다 하였다.
○○이는 그 후 내가 알기로도 여러 명의 여심(女心) 편력을 하다가 결국 한 마을에서 살던 이◇◇라는 여자와 열애 끝에 결혼하여 3남1녀를 낳고 살고 있다. ○○이와 결혼한 이◇◇는 나와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동창이었고, 고교에서는 휴학으로 나보다 한 학년 아래가 되었던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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