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록(追憶錄)
심증(心證)은 가나 물증(物證)이 없는 살인사건
by 박달령
2011. 1. 17.
최전방 사단에서 군복무를 하던 1968년 초여름이었다. 내가 소속된 사단의 OO포병대대 어느 중대에서,하사 한 사람이 야간 경계근무중이던 초병이 발포한 총탄에 사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 초병은 사살당한 하사 소속 중대원이었으며 경계근무를 충실하게 했다 해서 표창장을 받고 포상휴가까지 갔다고 했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당시 최전방 사단의, 예하의 각 부대 주둔지는 주둔막사 주변에, 담벽이나 철조망 등의 시설이나 장애물이 없었고 중요 지점에 경계초소를 만들어, 초병들이 주야간 경계근무를 하며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계근무 중인 초병에게, 밤중에 사살당한 하사는, 그 중대의 내무반장이었다.
내무반장은 병사들이 주간근무나 훈련 등의 일과가 끝나고 17:00 이후부터 다음날 일과가 시작되는 08:00까지 주로 야간 휴식과 취침 등의 내무생활을 하는 막사인 내무반에서 병사들의 기강을 관장하며 지휘 통솔을 하는 야간 지휘관이라 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소속 부대 병사들에게는 주간 근무나 훈련시에 자신을 지휘 통솔하는 중대장이나 소대장, 분대장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병사들이 군대생활에서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내무반장]의 인성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성이 착한 내무반장을 만나면 군대생활이 심신이 모두 편안하게 지나갔지만, 악질 내무반장을 만나면, 사소한 과오에도 무자비한 구타와 기합(얼차려)에 몇 시간씩 시달리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한참 꿀같은 단잠을 자던 수십 명의 내무반원 전원을 오밤중에 비상을 걸어 기상시켜 사소한 꼬투리라도 지적하여 트집을 잡아 연병장에 집합시켜 몽둥이질을 하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 지옥같은 군대생활이 되었었다. (나도 이러한 기합을 겪어보았는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엄동설한에 50Cm 이상의 눈이 쌓인 연병장에 팬티바람에 철모만 쓰고 집합하여 그 넓은 연병장을 포복으로 기어가는 기합을 한 시간이나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살당한 내무반장은 소문난 악질이었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내무반에서 병사들을 괴롭혔으며 이 괴롭힘을 모면하기 위하여 병사들이 상납하는 금품을 갈취하여 밤중이면 부대 밖으로 나가 음주 후 술에 만취해 귀대하는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해 초에 발생한 <1.21 사태> 혹은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우는 북한 무장공비 남파사건으로 인하여 최전방 사단에서 경계근무를 하는 초병은 일몰 후 일출 전까지 야간에는 총기에 실탄을 장탄하여 부대 바깥에서 부대쪽으로 접근하는 물체에 대하여는 수하(誰何)를 하지 말고 발견 즉시 실탄을 모두 사격하고 난 다음 휴대한 수류탄까지 던져 사살하라는 경계근무 지침에 따라 근무를 하던 때였다.
(주 ; [수하(誰何)] = 어두워서 상대편의 정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때 및 경계근무시, 상대편의 정체나 아군 끼리 약속한 암호(暗號)를 확인하는 일)
1.21사태 이전까지는 최전방 사단 예하부대에서도 야간 경계근무시에 부대쪽으로 접근하는 사람에
대하여 일단 정지명령 후 수하(誰何)를 하여 그날의 암구호(암호)를 교환한 다음 신분 확인 후 부대로 들여보내던가, 아니면 체포하던가 하는 식으로, 근무를 하다가 이 1.21사태 이후부터는 위와 같이 경계근무 지침이 바뀐 것이었다.
그 악질 내무반장은 사살 당하던 그 날 밤에도 밤중에 부대 정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갔다가 술에 만취하여 돌아올 때는 정문이 아닌 부대 측면의 경계초소 곁으로 나 있는 지름길로 귀대를 하다가 경계중인 초병이 발포한 실탄 여러 발을 맞고 거기에다 수류탄까지 폭발하여 온 몸이 벌집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잠시 [1.21사태], 또는 [김신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21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의 무장공비들이 서울의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 으로 서울에서 발각된 날짜를 따서 그렇게 불렀으며, 또한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초급장교인 공비 김신조(북한군 소위)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불렀다.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의 장교로 조직된 무장 공비들은 1968년 01월 13일 집결하여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며칠간의 추가 훈련 후에
한국군의 복장으로 변장하고서,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허하여
미군 제2사단이 주둔하던 지역의 휴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3일만에 서울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 하였었다.
그런데 휴전선에서 상당히 먼 거리인 서울까지 수십 명 공비들이 사람들 눈에 전혀 띄지 않고 잠입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지나간 동선(動線)에서 해당지역 원주민들에 의하여 여러 건의 거수자(거동수상자) 신고가 있었다. 그러나 군경부대에서 주민의 제보를 받고 비상을 걸어 현장에 출동하여 수색을 시작하는데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게 보통이었는데, 수색 시작시에는 공비들은 이미 그 곳으로부터 생각도 하지 못할 먼 거리로, 이동한 후에사 뒷북치기를 하게 되어 신고한 주민들만 실없는 사람으로 만들곤 하였다.
이 무장공비들은 양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완전군장을 짊어지고서 한 시간에 8Km를 달릴 정도로 특수훈련을 받은 자들이니, 그들을 목격한 주민의 신고를 받은 군경부대가 신고 내용을 분석하고 비상을 걸어 한시간쯤 후에 현장에 도착하여 수색을 할 때쯤이면 공비들은 이미 7~8Km 남쪽으로 이동하고 난 다음이었기 때문에 뒷북만 치고 말아 서울까지 잠입하도록 그들의 정체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비들은 1월 21일 저녁에 청운동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탄로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하고 긴급출동, 김신조를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하여 1월 31일까지 총합계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탈출 북상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주민들이 살상을 당하였으며 현장에서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기도 하였다
나는 사건 당시 육군 일등병으로 최전방 사단에서 복무하고 있었는데, 쫓기던 공비 한 명이 내가 소속된 군단지역으로 도주하여 군단 전체에 비상이 걸리고, 비상출동한 부대 대부분은 경계지역에서 중요 지점에 매복경계를 하고 그 외에 각 중대에서 무장공비 수색조 1개분대씩을 차출하여 지정된 구역을 수색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이 수색조에 차출된 나는 10여일간 하루 몇 차례씩 주야간 수색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야간 수색시에는 일렬횡대로 산개한 수색조가 즉시 발사가 가능하도록 총에 장탄을 하여 산과
들을 누비고 전진하면서 이러다가 무장공비와 조우하는 순간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거
라는 생각이 들며 죽음을 맞이하는 심경이 되기도 하였었다. 이렇게 힘든 야간 수색을 하던 기간중
영하 25도의 전방지역 혹독한 겨울 추위도 또한 나를 무척이나 괴롭혔었다.
각설하고, 포병부대의 내무반장이 사살당한 이 사건은 사단 헌병대에서 진상조사를 하면서, 평소에 악질 내무반장의 행적과 사살당한 위치와 거리 등으로 미루어 경계근무중인 초병이 자신이 소속된 중대 내무반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고의로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에 의문을 가지고 초병을 심문하였으나, 초병은 아무 소리도 없이 어두운 밤이라 부대쪽으로 접근하는 알 수 없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기에, 새로 바뀐 야간 경계근무 지침에 따라 수하 없이 발포하고 수류탄도 던졌다고 강경하게 시종 일관된 진술만을 하였다.
그래서 헌병대의 수사관도 더 이상의 진상을 밝혀낼 수 없어 그대로 사건을 종결하는 보고를 할 수밖 에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말대로 죽은 악질 내무반장이 살아날 수 없으니 어찌 해볼 도리
가 없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초병의 진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도 이 사건의 초병(哨兵)이,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중 벌인 살인극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가
지만 물증이 없는데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자(초병)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데
에 수긍이 간다.
ㅡ 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