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왼 손등, 정확한 위치는 태권도에서「정권」이라 일컫는 부분, 즉 주먹을 쥐고 보면 둘째와 셋째 손가락 사이의 골이 진 부분에 폭 1mm, 길이 5mm 가량의 약간 움푹 패인 거뭇한 흉터가 조그맣게 언뜻 보면 표가 나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이 흉터는 김명곤(金明坤)이라고 하는 나와 동갑내기(다만, 생일은 내가 5개월이 빨랐다) 고향의 소꿉친구에게 입으로 물어뜯긴 자리이다.
그 때가 아홉 살 때였다. 당시 고향에서 나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명곤이는 생일이 늦어 2학년이었다.
코흘리개 시절의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또래가 한 자리에 많이 모이면 그 중 두 사람을 지목하여 서로 충동질을 하여 싸움을 붙이고서 곁에서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패를 갈라 한쪽씩을 응원도 하면서 재미를 붙여 구경하기가 예사였다.
싸움이 끝나고 며칠 지나면 어떠한 원인으로 싸웠는지 그 까닭도 분명치 않고 또 분명하다손 치더라도 그 원인과 까닭이라는 게 그야말로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아마 명곤이와 나도 그러한 종류의 싸움을 하였을 것이다.
학교와 집이 있는 동네까지의 중간지점쯤의 한길 가에 두어 아름은 됨직한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감의 종류는 속칭「납작감」이라는 이름대로 네모지고 납작하면서 맛도 별로 없는 감나무였다.
우리 코흘리개들은 집에서 학교까지 2Km나 되는 상당히 먼 거리의 중간쯤에 있는 이 납작감나무 아래의 돌에 앉아 쉬곤 했는데 어느 여름날 이날도 하교 길에 이 감나무 아래 그늘에서 7∼8명의 또래들이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쉬던 도중에 지금은 원인이 기억나지 않는 싸움을 나와 명곤이가 벌이게 되었고, 나머지 또래들은 곁에서 구경하며 재미있다고 소리를 지르며 패를 갈라 응원을 하였다.
처음에는 치고 박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기도 하며 서로 붙들고 얼크러져 실랑이를 벌이다가 내가 힘이 조금 세었던지 명곤이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서 깔고 앉아 주먹질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명곤이는 못 견디겠던지 내 왼손 팔목을 두 손으로 잡더니 왼손 등을 잽싸게 물어 뜯어 버리는게 아닌가 ? 순간 나는「아얏 !」소리를 지르며 주춤하다가 다시 달려들어 주먹질을 하려고 하자 명곤이는 계속하여 나를 할퀴고 물고 하며 반항하였다.
명곤이에게 물어뜯긴 손등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으나 개의치 않고 결사적으로 난투극을 벌이니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또래들이 사태가 최악에 이른 것을 알아 차리고 우루루 달려들어 뜯어 말려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명곤이에게 물렸던 자리를 적당히 약이나 발라 두었더라면 이렇게 거무스레한 흉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빈곤한 생활을 하던 시골 벽촌에서 가정 상비약이 있었을 리 만무하였다.
우물의 물을 길어 세수를 하니 상처 난 손등이 쓰리고 아프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벼루에 먹을 갈아 진한 먹물을 이 상처에 발랐던 것이다. 진하게 갈아낸 먹물은 그 무렵 시골에서는 상처나 부스럼, 또는 먼 길을 걸어 발에 물집이 생겼을 때 민간요법 치료제로 사용되는 것을 보아온 터이라 이를 보고 배워 해 본 것이었다.
이러한 먹물 바르기 치료법은 문신 효과를 내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이렇게 이빨자국이 조그맣게 흉터로 남아서 이 흉터를 쳐다볼 때마다 옛날 고향의 소꿉친구 명곤이를 생각나게 할 줄이야 ….
각설하고 이 이빨자국 흉터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명곤이는 현재 나와는 유명을 달리하여 고인이 되었다. 해병대에 입대하여 월남전선에서 단기 4301년도에 전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병과가 보병이었다니까 전투 최 일선에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적군의 총탄이나 수류탄 등의 파편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명곤이가 해병대에 입대한 건 단기 4299년 10월 하순인가 11월 초순인가 였고 나보다 5∼6개월 먼저 입대하였다. 물론 나와 동갑내기였으니 육군 징병검사는 나와 같이 치뤘지만 그의 여러 가지 주변 환경은 그를 육군 입영 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 없게 만들어 결국 해병대에 지원입대를 한 것이었다.
명곤이의 부친은 내 고향 마을 위의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의 대처승 승려였고, 시골 벽촌치고는 의식(衣食) 걱정 없이 지내는 가정의 장남이었다. 헌데, 당시 자유당 정권하의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불교정화 유시」담화문에 의하여 사찰에서 대처승을 비구승들이 축출하는 분쟁의 시작은 명곤이에게 불운을 가져오게 하였다.
법적 근거도 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에 의하여 사찰에서 쫓겨난 대처승들은 전국적으로 비구승단을 상대로 사찰명도소송을 제기하게 되었고, 명곤이의 부친은 이 재판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소유하던 전답을 야금야금 매각하여 십 수년 동안에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 명곤이의 가정에 찾아온 극빈과, 그로 인한 좌절감, 그리고 사춘기에 찾아든 반항심리 등은 국민학교 졸업의 학력밖에 취득하지 못한 명곤이에게 불운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명곤이는 15 ∼ 6세부터 수시로 무단가출하여 먼 곳의 절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머슴살이, 혹은 지인(知人)과 친인척(親姻戚)들을 찾아다니며 몇 개월 또는 수년씩 방랑생활을 하다가 귀가하기를 몇 번인가 되풀이하였고, 이러한 행각은 부모와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켜 해병대에 입대하기 두어 달 전부터는 불화와 갈등이 극에 달하여 부모와 대면조차 하지 않고 한 마을 친지 L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부모에게는 끝내 작별인사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입대하였다.
명곤이가 입대하던 전날 밤 나와 한 마을의 L, K 등 세 사람은 명곤이에게 마을의 주점에서 송별회식을 하여 주었다. 밤늦도록 막걸리 몇 되인가를 취하도록 마신 우리 일행은 떠들고 노래를 부르다가 헤어져 골아 떨어져 잠을 잤고, 이튿날 늦은 아침 명곤이는 우리의 전송을 받으며 그의 특유한 어기적거리는 8자 걸음으로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나도 명곤이보다 5∼6개월 늦은 그 이듬해 3월 29일 고향을 떠나 육군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휴가 차 귀향해 보니 그 간 명곤이는 휴가를 한 번 다녀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으며, 그 얼마 후 월남전선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인생 무상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육군에서 제대를 하여 고향에 돌아가 보니 명곤이의 집안은 어디로 인지 이사를 가고 없었다. 그렇게도 명곤이와 불화와 갈등을 겪던 그의 부모들은 명곤이의 젊음과 바꾼, 빈한한 시골 살림으로는 상당한 액수의 전사자 유족연금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문에 의하면 군수가 직접 찾아와 위로를 했다 한다.
그리하여 명곤이는 이역만리 타국 전선에서 피지도 못한 청춘을 불살라 버렸지만, 그가 나에게 남겨준 왼손 등의 보일락 말락 한 흉터는 내 몸의 일부분으로 지금도 건재하고 있고, 이 흉터를 볼 때마다 동그랗고 큰 눈, 커다란 코, 광대뼈가 불거지고 뾰족한 턱, 그리고 갓난아기 때 너무 업어줘서 그랬는지 어기적거리며 걷는 8자 걸음 등등의 스타일이었던 명곤이의 모습은 눈앞에 지워지지 않는 환영으로 어른거린다. 명곤이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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