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군
내 나이 다섯 살이 되던 여름 어느 날,
또래의 이웃집 꼬마 친구들과 놀기 위하여 집 밖 골목길을 나서서 큰길로 나가니 푸른 군복에 철모를 쓰고 배낭과 총을 멘 군인들 수백 명이 대열을 이루어 행군을 해서 마을 위쪽에 위치한 금산사(金山寺) 절 마당
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 참 계속되던 행군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대열의 후미가 나타나고 그 후미에서 약 10여 미터 떨어져
서 나의 이웃 친구들인 순성이와 만바우 등 두 코흘리개 조무래기들 둘이서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군인들
의 행군대열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행군대열을 그냥 따라가는 게 아니라, 부엌에서 쓰는 바가지를 머리에 철모 대신 쓰고, 군
인들이 총을 메듯 어깨에 장작개비 한 개씩을 메고서 군인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면서 뒤따라가다가 길가
에서 구경하던 나를 발견하고는,
『야 ! 우리도 군인이다 !』
하고 나를 향하여 으쓱대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으쓱대는 말을 들은 나는 후다닥 집으로 뛰어가서 부엌에 들어가 부뚜막에 놓여있는 바가지를 머
리에 철모처럼 쓰고 맞춤한 장작개비 한 개를 총으로 삼아 어깨에 메고 큰길로 다시 뛰어나가 조무래기 친
구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행군을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 때 친구들이 나에게 김새는 소리로 면박을 주는 것
이었다.
『임마 ! 앞치마를 입은 군인이 어디 있냐 ?』
『앞치마는 지지배(계집애)들이나 입는 것이여 임마 ! 하하하하하 !』
라고 놀려대는 말에 어린 나이에도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다른 집 아이들과 다르게 나에게 여자들이 부엌일 할 때 두르는 앞치마를 자그마하게 만들어 아
들인 나에게 입혀 주셨었다. 음식을 먹을 때, 또는 흙장난을 하며 놀 때 옷을 버릴까 봐서 그랬던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이러한 창피를 당하던 날부터 나는 고집스럽게『앞치마 거부 투쟁』을 전개하여 결국은 앞
치마를 입지 않게 된 기억이 난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군인들의 행군 모습이 내가 가장 처음으로 본 6. 25사변(한국전쟁)의 광경이며, 후에
철이 들어 생각해보니 북한군에게 패주 후퇴하는 국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국군들의 차림새에 코흘리개 조무래기였던 나는 그 모습이 부러워서 철모 대신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총 대신 장작개비를 어깨에 메고 졸졸 따라가면서 국군의 흉내를 내보았던 것이다.
[2] 북한군
위와 같이 국군의 행군 모습을 보고 난지 얼마간의 시일이 지난 다음에 국군
과는 다른 모습의 군인들이 우리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
면 소위『인민군』이라 칭하던 북한군이었다.
후에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우리 마을 위쪽의 금산사(金山寺)는 절 마당이
평평하고 넓어 북한 인민군 측에서 전라북도 지구 의용군 훈련소를 설치하여 각지에서 의용군이라는 명칭으로 징집
하여 온 남한 청년들을 며칠씩 군사훈련을 시켜 일선의 인민군 부대에 병력 보충을 하던 군사기지였다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주둔한 인민군들이 두어 명씩 짝을 지어 자주 순찰을 돌았는데 그들은 우리 코흘리개 조무래기들이
길거리에서 놀고 있으면 나무그늘 밑에서 쉬면서 우리를 불러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어 나눠주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곤 했다.
세월이 흘러 당시 따라 불렀던 노래 가사는 거의 다 잊어버리고 첫 구절만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 중 하나는『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노래였고, 또 하나는『아침은 빛나라 이강산…』으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이것도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는데 전자는 북한의『김일성 장군 노래』이고 후자는 북한의『애국가』였던 것이다.
처음 이 노 래를 배워서 집 안팎에서 큰 소리로 불러도 부모님들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인민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서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인민군들이 가르쳐준 노래를 절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셨다. 그런데 철부지 어린 나이인지라 어머니의 엄명을 깜빡 잊고서 무의식중에 큰 소리로
부르다가 기겁을 하신 어머니한테서 회초리로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초죽음이 될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야 안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북한 인민군들이 가르쳐준 노래는 후에 커서 육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철원 최전방 비무장지대에 갔을 때 북한에서 설치한
대남 선전용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다시 듣게 되기도 하였었다. 어른들은 그 당시에 악몽과 같은 세월을 살았겠지만,
5세(만4세)의 코흘리개가 보고들은 6. 25사변(한국전쟁)의 기억은 이처럼 어른들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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