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교주와 정치인들간의 거래
지금부터 말하려 하는 서교주와 정치인들 간에 모종의 거래관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세상에 공식적으로 공표 된 적은 없다. 다만 성화대 주위와 고향 마을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유언비어 비슷하게 떠도는 풍문을 얻어들은 것들이므로 사실과 부합하는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
서교주 측에서 먼저 그랬는지, 정치인들 측에서 먼저 흥정을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한국의 정치풍토 하에서는 능히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였다.
지금 기억나는 당시의 선거로는 대통령 선거, 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도의원 선거, 면장 선거 등이 빈번하게 있었다. 이 선거 때마다 각 정당과 입후보자 측에서는 서교주를 상대로 득표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용화교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80만 신도」라면 이 중에서 아무리 최소한으로 추정하더라도 유권자는 어림잡아 40만 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40만 표라 하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세력이다.
정․부통령과 같이 전국적인 성격을 띈 선거에서 서교주 한 사람만 구워삶으면 40만 표가 보장되니 정객들에게 그 어찌 구미가 당기지 않았겠는가?
「용화교 왕국」의 제왕인 서교주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는 전국에 산재하는 신도들에게 명령 한번만 은밀히 하달하면 서교주가 지목하는 입후보에게 표를 찍는다는 것은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도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신도들에게는 오직 미륵세계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 위하여 서교주에 대한 맹종과 맹신만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국회의원 선거, 도의원 선거, 면장 선거 등 국지적인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 고향 김제군 지역 내에 거주하는 용화교 신도인 유권자는 김제군 선거구 갑구, 을구 합쳐서 수만명쯤 된다는 추산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표라면 각 입후보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득표를 한 숫자에 서교주 휘하의 이정도 표를 가산한다면 당락을 좌우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리 되니 선거 때만 되면 유명, 무명의 정객들은「용화교 왕국」의 제왕인 서교주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득표청탁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 서교주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정치세력과 야합하여 득표 지원을 해 주고, 대신 교세확장에 걸림돌이 될만한 사안을 해결하는 등 실리를 챙겼다는 것이었다.
서교주는 이처럼 극락왕생의 기치를 내걸고서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재물을 사취하여 축재하고, 신도들의 나이 어린 딸들을 여승으로 만들어 주변에 궁녀처럼 두고 밤마다 환락의 세계를 헤엄치며 극치에 달하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정․관계 인사들을 적당히 무마시켜 교세확장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서 보장되는 민주국가에서 신도들은 표면상으로는 자발적으로 재물을 헌납하였고, 강간죄는 친고죄에 해당하는지라 관련자들의 고소․고발이 없는 한 위법행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론의 악화를 예방하기 위하여 서교주로서는 정․관계 인사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추억록(追憶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3회) (0) | 2011.01.22 |
---|---|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4회) (0) | 2011.01.22 |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6회) (0) | 2011.01.22 |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7회) (0) | 2011.01.22 |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8회) (0) | 2011.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