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간죄로 체포 구금된 서교주
번영을 구가하던「용화왕국」에도 흥망성쇠라는 우주의 섭리에 의함인지 이 왕국을 와해시키는 계기가 되는 모반이 일어났으니 그 주인공들이 바로 서교주의 엽색행각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성화대의 여승들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이 꽃다운 나이의 여승들은 그들의 부모에 의하여 강제로 입산한 것이며 빠른 경우에는 10대 초반에도 입산을 시켰다 한다. 그리고 늦은 경우에는 고등교육을 받던 20대 초중반의 여인들도 입산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자발적으로 신앙심이 우러나서가 아니고 실연(失戀) 등의 이유에서였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여승들이었으니 어린 여승들도 점차 나이 들어 사춘기를 지나면서 춘정(春情)을 느끼기도 하고 이성적인 판단력도 가지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야말로 춘삼월 호시절(春三月好時節)을 이처럼 유폐상태로 보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한탄과 함께 회의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실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한창 성화대에 여승의 수가 많았을 때에는 150명이 넘었다 한다. 그런데 서교주의 여승 강간사건으로 인하여 반기를 든 여승들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질 당시에는 110여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러한 여승 감소현상은 풍문에 의하면 지각 있는 용감한 여승들은 야반도주를 결행하였고, 또 일부는 성화대를 왕래하는 젊은 남승(男僧)들과 눈이 맞아 욕정을 불사르다가 기회를 보아 손에 손잡고 역시 야반도주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용화교 내부에서는 성화대 여승들의 이러한 야반도주 사실을 쉬쉬하고 극비에 붙이기에 급급하였다 한다. 성화대에서 탈출하지 못한 110여 명의 여승들은 용기가 부족하였거나, 혹은 도주사건이 빈발함에 따른 엄중한 감시 때문이었다 한다.
이처럼 서교주에 대한 불신과 모반의 싹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엉뚱한데서 태동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 4.19혁명 이후 유행하던 데모의 풍조를 타고 한 용감한 여승에 의하여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때는 1962년 봄으로 기억된다. 나는 마을에 떠도는 서교주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이 소문이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교주의 여승 강간사건이었다.
어느 날 밤, 그 날도 서교주는 성화대에서 묘령의 여승 한 사람을 가발에 비단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켜 침실로 끌어들여 수청을 들게 하였는데 그 여승은 결사적으로 반항하며 가발과 비단옷을 걸친 채 성화대를 탈출하여 약 2Km 떨어진 그녀의 본가(本家)로 피신하였다가, 친가에 휴가차 나와 있던 여승들 중에서 평소 그녀와 뜻이 맞는 동료 여승 수십 명에게 은밀히 연락하여 세를 규합한 다음 플래카드를 제작하여 들고서 서교주의 엽색행각을 규탄하는 데모를 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바로 서교주 여승 강간사건인 것이다.
여승들은 서교주의 음란행위를 비난, 규탄하며 시가행진을 하다가 그녀들의 부모들에 의해 제지당하여 해산하였다 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여승들의 부모가 데모를 제지한 까닭은 자신의 딸들을 용화사에 출가시킨 이유가 서교주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이며, 서교주가 이 여승들을 차례로 간음하는 것은 신도들의 충성심에 대한 답례 정도로 여기면서 은근히 이러한 은총을 바라고 있었다는 포복졸도할 기가 막히는 사연이었다.
그러나 성화대를 탈출한 여승들 수십 명은 부모의 적극적인 제지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정식 형사고소를 하여 서교주는 구속되기에 이르렀고, 신문과 방송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매스컴과 여론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교(邪敎)를 차제에 일격에 풍비박산을 내 버릴 것을 내심 원하였으나 경찰 당국은 서교주를 강간죄로밖에 수사를 하지 못하였다.
강간죄 이외에는 법적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종교 신앙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헌법에서부터 보장되어 있는 현실 앞에 엄연히 합법적인 단체로 등록된 용화교를 아무리 내사하여 보아도 혹세무민으로 재물을 사기, 부정축재 한 것은 뻔한데도 총검을 휘두르며 강도질 한 것도 아니고, 사기 피해신고도 없었으니 도의적인 규탄 대상은 될지언정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미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서교주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에 비로소 많은 신도들에게서 동요가 일었다. 다소라도 세태를 직관한 신도들은 재산은 이미 털렸지만 뒤늦게 각성하여 남은 재산을 처분, 수습하여 경상도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용화교와 결별하더라도 전라도 타향도 정들면 고향 아니냐는 생각에서 그냥 눌러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용화고 신도들은 그들이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던 활불(活佛) 서교주도 짐승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쇠고랑을 차는구나 하고 기가 막힌 심정들이었다.
그러나 신도들 중에 또 다른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서교주의 측근에서 오늘날의 서교주가 되도록 보좌해주며 자신들도 슬금슬금 재미를 보아온 참모급 지도간부들의 활동이었다.
그들은 평신도들을 찾아다니며 서교주가 당하는 이 수난은 모종의 모략이며 곧 석방될 것이니 이런 때일수록 일사불란 굳게 뭉치라는 식으로 설득하여 흩어지려는 교세를 만회하기에 급급했다. 이 활동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약 70% 정도의 신도들은 순순히 설득을 당하였으니 서교주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그 직후 서교주는 이 여승 강간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에 상고를 준비중에 고혈압과 뇌 질환 등을 이유로 구속된 지 7~8개월만에 병 보석으로 석방되어 전주 원각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성화대의 여승들은 데모에 가담했던 여승들뿐만 아니라 거의 대다수가 동요하였다. 서교주 구속사태로 교단 지도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외출하여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녀들은 장기간의 속박 끝에 갑자기 닥친 자유 앞에서 흥분으로 인한 무분별한 군중이 되어갔다.
동네 사랑방에서 친구들을 만나 잡담을 할 때면 친구녀석들의 주된 화제는 성화대의 여승들이었다. 어제 밤에는 어느 수풀 나무 밑에서, 어느 동산 잔디밭에서, 또는 어느 냇가 바위에서 누구누구가 밤길을 방황하는 몇 명의 여승들을 유인하여 통정했다는 식의 음담패설들이었다.
이 여승들과 통정을 하는데 재미를 보던 축들은 내 또래 친구들이나 약간 연상의 20세 전후의 세대였다. 이들은 여승들을 만나 서로가 맹목적인 욕정만을 불태웠었다. 이에 대하여 바람났던 여승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러한 음행이 빈발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나와 절친하였던 친구 한 녀석도 이러한 재미를 두어 차례 보았노라고 의기양양해서 자랑을 하곤 하였다. 기분이 어떻더냐 물었더니 정사를 시작할 때에는 조급한 마음에 끌어안았지만 정사가 끝난 뒤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져 적당한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이러한 승복 걸친 삭발여승들의 바람기에 의한 섹스 퍼레이드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차츰 냉정을 되찾아 여승들은 하나 둘씩 하산(下山) 환속(還俗)하기 시작하여 사건이 일어난지 1년 가까운 사이에 성화대에는 여승의 수가 20~30명에 불과할 정도로 크게 줄어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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