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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록(追憶錄)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2회)

by 박달령 2011. 1. 22.

[2] 서교주의 호색(好色)

서교주는 성화대라고 칭하는 용화교의 본부 용화사 말고도, 전주시 완산동에 원각사(圓覺寺)와 남일사(南一寺)라는 절을 마련하여 포교의 전진기지 겸 자신이 현대문명과 함께 유입된 현대적 향락을 맛보는 별장처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전주의 원각사와 남일사 등에는 수백의 남자 용화승들이 거주하였고, 본부 용화사(성화대)에는 150여 명의 여승(女僧)들이 거주하였다.  이 여승들은 그녀들을 지휘통솔하는 간부급 20여인은 30~50대의 고령층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이르는 그야말로 묘령의 꽃다운 처녀들이었다. 물론 이 방년의 여승들은 용화교 신도의 딸들이었다.

 

용화교 신도들의 서교주에 대한 신앙심은 절대적이었다. 옛날 봉건시대 전제군주가 무색하리만큼 그랬다.  자신들을 전 인류가 멸망하는 천지개벽 때에 구출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할 활불(活佛)인데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서교주의 신도들은 진심으로 교주에게 복종하여 교주가 자신들을 버릴 수는 있어도 자신들은 서교주를 떠나서는 모든 것을 생각할 수도 없으며 만약 그러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떠한 보이지 않는 무서운 힘에 의하여 탁 죽어지는 것이려니 여기는 실정이었다.

 

서교주의 행동 하나 하나는 모두가 거룩한 것이었으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진리였다.  그래서 많은 재산도 아낌 없이 서교주에게 헌납하였으며 교주의 은근한 권유에 따라 묘령의 딸도 진상(進上)하여 여승을 만들었던 것이다.

 

신도들은 그러한 행위로써 서교주에 대한 신심(信心)을 표시하였으며, 서교주가 신도회합을 소집할 때면 그 서열대로 지위와 대우가 결정된다는 말도 있었다.  아무튼 신도들은 과년한 딸들을 호색(好色)한 서교주가 그냥 두지 않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측하면서도 교주에게 바쳤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신심에 대한 거룩한 은총쯤으로 여기고 은근히 그러기를 바랬다고 한다.

 

호색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영웅호주색(英雄好酒色)」한다는 옛말이 어느 정도 실감이 나는 게 서교주의 엽색 행각이었다.  서교주에게는 정식 부인(夫人)만 하여도 8명이었고 이들을 호칭하여「8선녀(八仙女)」라 하여 공식적인 살림을 하였으며, 그 이외에도 신도들 중에 마음에 드는 과부를 첩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 8선녀들에게서 소생(所生)도 꽤 많았다는데 자세한 수효는 잘 모른다.  서교주의 여승 간음사건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의 연령이 70대 초반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얼마나 절륜한 정력의 소유자였는지 짐작케 한다.  게다가 신도들로부터 상납 받은 재물로 몸에 좋다는 보약을 구입하여 달이는 약탕관에서 약 냄새가 끊어지는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다.

 

그리하여 어느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서교주가 성화대 처소 침실에서 잘 때에는 미리 처소 안에 마련된 밀실에서 간부급 여승으로 구성된 분장사에 의해 그 날에 간택된 묘령의 여승 한 사람을 까까머리에 가발을 씌우고 승복을 벗겨내고서 눈부시게 호화찬란한 비단옷을 입힌 후 요염한 화장까지 시켜 황홀한 모습으로 꾸며 수청을 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교주는 대한민국 내에「용화교 왕국」을 건설하여 80만 신도를 백성으로 거느리고 통치하며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니 이러한 경지에 이르고 보면 가히 일세를 풍미한 호걸이라 할 것이다.

 

낮이면 제왕이 정사를 보듯이 거드럭거리며 여러 가지 교단 내외의 일을 보고, 신도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재화로 산삼, 녹용 등을 비롯하여 갖가지 천하 명약을 구입해 들여다가 복용하여 정력을 잔뜩 돋궈서 밤이면 정실부인 8선녀를 비롯하여 도처에 산재한 첩이며, 때로는 궁녀와 같은 존재인 꽃다운 나이의 여승들 중 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수청들 여인을 골라 환락의 잠자리에서 욕정을 풀었다.

 

그를 마음 속으로부터 추종하는 신도 백성들은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자신의 재산과 묘령의 딸을 제왕인 서교주에게 진상하여 머지 않은 장래에 교주로부터 보장받은 유토피아 미륵세계가 올 것을 기다리며 생활수단이 될 정도로 최소한의 재산만 남겨 연명하면서 문외한이 듣기에는 해괴하게 느껴지는 주문을 조석으로 시간 맞추어 광적으로 소리 높여 암송하면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당시 나이 어렸던 나는 또래 친구들 중 용화교를 믿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면 집안의 좋은 장소에 으레 서교주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부터 성자의 초상화에는 머리 뒤쪽에 후광(後光)이 사방으로 힘있게 빛나고 이렇게 후광을 그림으로써 그 인물을 신성시하는 마음이 일도록 하였는데 서교주의 사진에도 예외 없이 후광이 뻗쳐있어 가히 생불, 또는 활불로 생각되게 만들었다.

 

현대 과학문명의 이기(利器)인 사진의 기술은 역설적으로 서교주를 생불, 또는 활불로 만드는데 인색치 않았고 이로서 서교주는 우상화되었다.

 

그리고 용화교 신도의 집 부엌의 밥솥 바로 위의 벽에는 쌀 서너 되가 들어갈 만한 헝겊 주머니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소위「좀도리」라고 부르는 절약한 곡식을 담는 용기였는데, 끼니때마다 밥을 지을 때 쌀 한 숟갈씩을 떠서 저축하였다가 매달 서교주에게 바치는 데에 쓰는 주머니였다.

 

신도들이 서교주를 얼마나 떠받들고 존경하는지의 여부는 서교주의 행차 시에 알 수 있었다. 서교주는 신도들의 집에 애․경사 때나 기타 필요에 따라 거동하여 최상의 빈객이 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서교주를 맞이하는 당사자의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이웃 신도들도 서교주가 거동하는 길목에 지켜 섰다가 보이는 즉시 달려가서 서교주의 발아래 맨땅바닥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려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극진한 예를 표시하였다. 비가 와서 길바닥이 진흙탕이 되어 있어도 신도들은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 때 서교주는 발 밑에 부복한 신도들에게 사극(史劇)에서 제왕이 엎드린 백성을 대하는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위엄 있게 그리고 인자하게 그러면서 거드럭거리기도 하며 대하는 광경은 나도 길 가다가 마을에서 흔히 목격하였다..

 

잘 생긴 용모와 훤칠한 키에 흰 수염을 휘날리는 위풍당당한 풍채를 가진 서교주에 대한 신도들의 이러한 극진한 예우는 명실상부한 제왕에 대한 예절이었다. 그들은 만약에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행차하더라도 이러한 예우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