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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역마(驛馬)를 덮친 줄범(상)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역마(驛馬)를 덮친 줄범(상) - (글 : 김왕석)

1895년 늦가을 강원도 평창역과 회성역 사이의 역도(驛道)를 역마 한마리가 달리고 있었다. 흑갈색의 건장한 준족으로 알려진 역마였다.

타고 있는 기수도 역부(驛夫)가문의 대를 이은 젊은이였다. 그는 말이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려는 순간에 말이 갑자기 멈칫거리더니 뭔가 불안해 하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때 고갯길 옆에 있던 어느 야산에서 범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마른 하늘에서 벼락 터지는 듯한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말은 극도의 공포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젊은 기수는 말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려 주면서 안심을 시켰다.

기수는 그 범이 설사 추격을 해 오더라도 그걸 뿌리칠 자신이 있었다. 범이 포효를 하고 있는 곳은 10리 정도나 떨어져 있었는데 앞으로 15리쯤 가면 마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범이 빠르다고 해도 말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그 말은 준족으로 이름난 명마가 아닌가.

말이 세 마장쯤 달렸을 때 또 범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범은 산을 타면서 지름길로 추격을 해 오고 있었다.
기수는 놀랐으나 그래도 큰 소리를 지르면서 박차를 가했다.

범은 계속 추격을 했고 10리쯤 달렸을 때는 저쪽 산중턱에 그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줄범(대호)이었으며 날 듯 이쪽을 향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젠 말을 재촉할 필요가 없었다. 범의 모습을 본 말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산을 내려오는 범은 말보다 더 빨랐으며 어느새 도로에 내려와 바싹 추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반 마장 정도 눈에 띄게 사이가 좁혀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저쪽 언덕 아래쪽에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은 마지막 힘을 다해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잡힐것 같았다.

그때 마을 어귀에서 한 사람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짐승털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포수는 야수처럼 민첩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6척 거구의 사나이였다. 얼굴은 온통 검은 구레나룻으로 덮여 있었으나 젊은 사람인 것 같았다.

"빨리 와 빨리"
그 포수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말은 그 사람과 스쳐가면서 마을로 뛰어들었으나 너무나 힘을 뺀 탓인지 마을 어귀에서 그만 뒹굴었다.

쓰러진 말은 눈이 뒤집어지고 입에서 거품을 품고 있었고 기수도 말이 쓰러질 때 다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했다. 만약 그 포수가 아니었더라면 범이 그대로 덮쳐들어 참변을 당할 뻔 했다.
그 포수는 도로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더니 범이 가까이 오자 소포(小砲)를 발사했다.

소포란 소총을 이르는 말인데 당시의 소총이란 불이 붙은 화승을 총에 장치된 화약접시에 닿게 해 폭발시키는 화승포였다. 화승이란 대나무 가지를 가늘게 잘라 밧줄처럼 꼬아 만든 심지였는데 포수들은 거기에 불을 붙여 화약이 담긴 접시에 연결되도록 했다.

따라서 화승포를 발사할 때는 포수는 화승이 화약에 점화 발포될 때까지 총구를 계속 목표물에 맞히고 있어야만 했고 목표물이 움직이고 있을 경우엔 총구도 거기에 따라 이동시켜야만 했다.

화승포는 과녁이 움직이지 않을 때엔 명중률이 높았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낮았다. 만약에 과녁이 심하게 움직이면 사수는 그런 동작이 멈추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 젊은 포수가 범과 대결했을 때는 사수에게 그런 여유가 없었다. 범은 벌써 열 서너 발 앞까지 덮쳐들고 있었다.

젊은 포수는 발포했으나 총탄은 범의 한쪽 귀를 날렸을 뿐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덮쳐들던 범도 귀가 날아간 아픔과 엄청난 총소리, 총구에서 뻗쳐나오는 불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범은 몸을 날려 도망가버렸다.

덕분에 포수와 기수는 구사일생을 했으나 말은 결국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기수는 그 마을에서 다른 말로 갈아타고 다음날 경기도 감사에게 가서 강원도 감사의 서신을 전달하면서 강원도의 범이야기를 보고했고 감사는 다시 조정에 보고를 했다.

그건 예사 일이 아니었다. 강원도에 범이 많고 해마다 인축의 피해가 있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궤도를 달리는 역마까지 습격할 줄이야. 그대로 두면 강원도와의 교통과 통신이 모두 끊어지게 된다.

관련 대감들이 모두 모여 의논을 했다. 처음엔 궁중에 있던 어용엽사들을 보내기로 합의했으나 번복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강원도에 보낸 포수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판인데 또 보내야 되겠느냐는 반론이 우세했다.

그러자 대안이 나왔다. 덮쳐드는 대호와 용감하게 맞대결을 하여 기수를 구출했다는 그 강원도 포수에게 일을 맡기기로 했다. 기수를 구출한 공을 포상하고 화약을 하사하기로 했다.

조정의 명령은 며칠 후에 그 포수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포수는 기꺼이 명령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김흥만(金興萬·1852 ∼ ?), 키가 6척이고 씨름판에서 그를 당할 씨름꾼이 없을 정도의 장사였다. 또한 화승포를 다루는데도 따라갈 상대가 없을 정도의 명사수였다.

그는 그의 부친으로부터 화승포 다루는 기술과 화약 만드는 기술을 이어받았다.
김포수가 갖고 있는 화승포는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내버리고 간 조총(鳥銃)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조선에는 그전에도 화승포가 있기는 있었으나 그건 불이 붙은 심지를 직접 들고 있다가 화약에 점화하는 종류였다.

이에 비해 조총은 화승이 옆부분에 달려있어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이 움직여 자동적으로 화약에 점화되도록 되어 종전의 포에 비하면 한층 발전된 것이었으나 이 조총 역시 비가 오면 쓰지 못했고 눈이나 바람이 심할때도 사용이 불편했다.

그리고 잘못 다루면 총탄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총신이 파열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화승포를 다루는 얼굴이나 몸에 화상을 곧잘 입었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김포수는 열여섯 살 때부터 20년 동안이나 화승포를 다뤘으나 큰 사고를 낸 일은 없었으며 그 총으로 줄범 한 마리, 무늬범(표범) 세 마리, 곰 여섯 마리를 잡았고 멧돼지나 사슴, 노루 따위는 부지기수였다.

그건 김포수의 사격 솜씨가 뛰어난 탓이기도 했지만 명포수로 알려진 아버지 털보 영감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털보 영감은 아들에게 적절한 충고를 했다.

"포수란 맹수와 싸울 때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돼. 지금은 범과 싸울 시기가 아니야. 보름쯤 기다려 첫눈이 내리면 한번 겨뤄봐라."

풀들과 나무들이 울긋불긋하게 단풍진 늦가을에 범이 바로 눈 앞에 숨어 있어도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반대로 눈이 내리면 눈 위에 찍힌 범의 발자국을 쉽게 추적할 수 있다는 말이었고….
역마를 습격했던 범은 총소리에 놀랐는지 그후부터는 함부로 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놈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어느 화전민은 산마루를 돌아다니는 그놈을 직접 봤다고 알려왔다. 화전민의 말에 의하면 범은 꼬리를 늘여뜨리고 천천히 산마루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정말 황소만 하더라고 했다.

또 어느 나무꾼은 산중에서 멧돼지 시체를 발견했는데 40관(150Kg)이나 되는 멧돼지는 죽은지 하루도 못된 것 같았는데 뼈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었다.
멧돼지를 잡아 한꺼번에 다 먹어치우는 짐승이 범 아니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

범의 소식은 여기저기서 들려왔으나 김포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범과 싸울 시기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보름 후에 그 기회가 왔다. 기다리던 첫눈이 내린 것이다.

- (하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