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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선한 범과 악한 범(중)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선한 범과 악한 범(중) - (글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사실 그 범이 있는 한 멧돼지들이 밭을 망치는 짓을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들도 사람들을 해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큰마을과 동마을 사이에 있는 바위산과 그 뒤쪽 숲속에 표범 두 마리가 나타나 마을의 염소나 토끼들을 잡아간 일이 있었는데 산군은 자기 영토 내에 침입한 표범들을 습격, 멀리 쫓아버렸다.

범이 늑대들을 쫓아버렸기 때문에 범이 온 후에는 늑대들도 얼씬하지 못했다.
범은 물론 멧돼지, 사슴, 노루, 토기들을 잡아먹기는 했으나 그건 배가 고플 때에 한할 뿐 배가 부르면 다른 짐승들을 습격하지 않아서 다른 육식동물들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초식동물들의 희생이 적었다.

그러나 범이 그곳으로 온 지 6년째 되던 가을에 마을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커다란 불곰 한 마리가 인근 산에서 살면서 밭을 덮치기 시작한 것이다. 매우 사나운 놈이었으며 약초를 캐던 두 사람에게 덮쳐든 일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불곰은 그 후 서마을 바로 앞산에 나타나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마을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그래서 서마을 장로의 요청으로 세 개 마을 장로들이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서마을 장로는 창을 잘 쓰는 젊은이들을 모아 불곰사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동마을 장로가 반대했다.

날뛰는 불곰과 정면대결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니 우선 마을 주변에 불을 피워 경비를 철저히 하면서 좀더 기다려보자는 주장이었다.

"아니, 이판에 뭘 기다려보잔 말이오 ?"
서마을 장로가 못마땅해 했으나 결국 좀더 기다려보기로 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 밤에 일이 벌어졌다. 서마을의 뒷산에서 범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고 거기에 맞서듯 불곰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범은 처음에는 불곰에게 경고하듯 어헝어헝하며 포효했으나 불곰이 물러서지 않고 맞고함을 지르자 형세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범과 불곰의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마침내 두 짐승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짐승의 싸움 소리는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조용해졌다.
마을사람들은 다음날 아침에 두 짐승이 싸우던 곳으로 가봤다.

현장에는 어린 나무들이 짓밟혀 쓰러졌고 군데군데 흙들이 파여 있었으며 벌건 핏자국들이 있었다.
"이겼다 ! 산군이 이겼다 !"
피는 불곰이 흘린 것이 틀림없었다.

불곰은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듯 많은 피를 흘리면서 도망치고 있었으나 범의 발자국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불곰은 산을 넘고 계곡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계곡에서 다시 범의 추격을 받고 싸운 것 같았다. 불곰은 거기서 치명상을 입었고 계곡 하류쪽에 시체가 있었다.

백 관(약 380Kg)이나 될 것 같은 불곰이었지만 목줄이 끊겨 있었고 범이 먹어치운 듯 하반신의 일부가 없어져 있었다.
범의 영토에 함부로 들어온 침입자의 처참한 말로였다.

"그것 봐요. 그래서 내가 기다리자고 그랬잖소."
범마을에는 또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나 다음해 초여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세 사람의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서 산에서 내려오다가 숲속에서 산군을 발견했다.

세 사람은 전에도 범을 만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모른 척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범은 심기가 좋지 않은 듯 으르렁거렸다.

살기가 떠도는 위협 소리였기에 세 사람은 일단 오던 길로 되돌아간 다음 멀리 돌아서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불안해졌다.

그리고 혹시 사람들 쪽에서 범의 노여움을 살만한 실수를 했는가를 조사해 봤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수수께끼는 사나흘 후에 다른 나무꾼들에 의해 풀렸다.

그들은 계곡의 흐르는 물가 모래 위에서 범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물론 그 발자국 뒤에는 다른 범의 발자국이 있었다. 점점이 찍힌 고양이 발자국만한 예쁜 발자국들은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인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을 놓았다.
범이 나무꾼들을 위협한 것은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에 의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범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며 범도 전처럼 돌아다니지 않아 범마을에는 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그 일대에서는 영원한 평화란 있을 수 없었다.
그해 겨울이었다. 북쪽에서 강풍이 휘파람같은 소리를 내면서 불어오는 밤이었다.
범마을의 집들도 반쯤 눈 속에 파묻혔고 세 개 마을 사이에 간신히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길만 닦아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큰마을 사람들은 범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범마을 사람들이 범의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나 어쩐지 울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건 범이 자기 영토내에 들어온 침입자에게 위협하는 소리였으며 물러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경고 같았다.

또 어떤 침입자가 들어왔을까 ?
얼마후에 그 정체가 밝혀졌다. 동북쪽에 있는 삼림 속에서 범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암펌의 소리가 아닌 다른 범의 소리였는데 암펌의 울음 소리보다 더 중량감이 있었고 한층 더 거칠었다.

그 울음 소리는 계속되는 암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는 거의 같은 장소에서 두 마리의 범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사람들은 걱정을 했다.

산군의 상대가 곰이나 표범이라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나 같은 범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범에게는 대략 백리 안팎의 영토가 있었고 그 영토를 지배하는 범은 자기 영토의 경계에 똥오줌을 누어 강한 냄새를 풍겨놓고 있었다. 그 냄새는 코가 둔한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기에 침입자인 짐승들은 쉽게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침입자가 그걸 무시하고 다른 범의 영토내에 들어왔다는 건 일전을 각오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전에도 범과 범이 영토싸움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 싸움은 한쪽의 죽음으로 끝났다.

곰이나 늑대는 같은 동족끼리 싸우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으나 범은 달랐다.
양쪽 모두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광석화같이 움직여 일순간에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장소에서 들려오던 범들의 울부짖음은 오래 가지 않았고 삼림은 조용해졌다.
"싸우지 않는 것 같던데…"
"들어온 범이 수컷인 것 같아 ! 놈은 영토를 뺏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

겨울은 범들의 교미기였으므로 그 말에 일리가 있어 모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날 범들이 마주친 현장으로 가본 마을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장에는 암펌 발자국 외에 보다 큰 범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두 마리의 범들이 서로 만난 흔적은 없었다.

암펌은 침입자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피해 순순히 물러섰던 것 같았다.
그건 암펌이 자기 영토 일부를 침입자에게 내주었다는 걸 의미했다.

범마을 사람들은 사태를 우려했다. 범들의 영토가 변경됨에 따라 마을의 일부가 새로운 범의 영토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의 그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주위에 새로 온 범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고 심지어는 바로 마을 어귀에도 발자국이 찍혀 있덨다. 새로 온 범은 마치 마을 사람들에게 퇴거하라고 경고하듯 거의 매일밤 울부짖고 있었다.

마을 장로들이 다시 모여 상의를 했으나 신통한 대책이 없었으며 그저 산으로 들어갈 때에는 다섯명 이상이 함께 가야 하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야 된다는 지시를 마을사람들에게 내렸다.

범들의 영토가 변경된 지 일 주일쯤 지났을 무렵에 다섯 명의 나무꾼들이 산에 올라갔다가 눈 속에 범의 시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어린티가 상당히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생후 8개월 내지 10개월 정도의 암컷이었는데 아마도 산군의 새끼인 것 같았다.

죽은 범은 목줄이 끊겨 있었고 전신에 이빨 자국이 있었으며 하반신 일부가 없었다. 시체 주위에 다른 범의 커다란 발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새로 온 범이 암펌의 새끼를 죽인 게 틀림없었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범은 다른 범을 죽여 그 고기를 먹는 경우가 있었는데 새로 온 범에게도 그런 악습이 있는 것 같았다.

나무꾼들이 그 무서운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저쪽 산중복에서 범이 오는 것이 보였다. 나무꾼들은 얼핏 그 자리를 떠났고 그때 그곳에 온 범은 암펌이었다.

암펌은 새끼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오래도록 비통한 울음음 터뜨리고 있었다.
"나쁜 놈 ! 어떻게 동족을 잡아 먹어."

"이젠 암펌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그 암펌은 새끼를 죽인 범에게 복수를 하려고 들거야."
그 말대로 그날 밤 범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 (하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