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역마(驛馬)를 덮친 줄범(하)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역마(驛馬)를 덮친 줄범(하) - (글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김포수는 사촌형 되는 김용팔이라는 발자국꾼과 같이 백호 사냥에 나섰다.
김서방은 전에 총을 잘못 다루다가 왼손가락이 세 개나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총을 다루는 일은 그만두고 주로 포수를 도와 짐승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일을 했다. 김서방은 총 대신 자그마한 손도끼를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그것도 총에 못지않는 무기였다.

그는 그 도끼로 20자(약 6 ∼ 7m) 거리에 있는 수박을 어김없이 맞힐 정도의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무늬범(표범)을 그 도끼로 잡은 일도 있었다.
김포수와 김서방이 사냥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인근마을에서 돼지 한 마리가 물려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됐어, 이젠 한판 벌이는 거야."
김포수와 김서방은 인근 마을로 달려갔다. 역시 그놈이었다. 마을 골목길 눈 위에 뚜렷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은 그놈의 것이었다.

놈은 30관(약 110Kg)이나 되는 돼지를 아가리로 물고 8척(약 2 m)이나 되는 돌담을 가볍게 타넘고 도망가 버렸다.
사냥꾼들은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추적했다.

범은 어느 산중턱에서 물고 갔던 돼지를 몽땅 먹어치운 다음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발자국꾼 김서방은 햇솜과 같은 하얀 눈 위에 또박또박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고 신이 났다.

사실 그렇게 되면 범은 땅 속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날아가지 않는 한 추적자의 눈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언제 어디서 범과 사냥꾼들이 대결하는가가 문제였다.

사냥꾼들은 그걸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범이 눈치를 채기 전에 기습을 하여 잡자는 식이었는데 범은 그리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사냥꾼들이 산 위로 올라갔을 때 그 산너머 보다 높은 산 위에 뭣인가 누르스레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범이었다. 놈은 벌써 눈치를 채고 포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은 포수들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산마루를 타고 걸어가고 있었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그 놈은 포수들과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거 고생깨나 하겠는데…"
기습작전은 실패했고 그때부터 사냥꾼들과 범은 끈기 싸움을 해야만 했다. 쫓고 쫓기면서 어느쪽이 먼저 지치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범은 예상대로 백두대간으로 가고 있었다. 멀리 백두산까지 뻗어 만주땅 장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대산맥이었다. 범이 이 산줄기를 타게 되면 추적은 한결 어려워진다.
"오냐 네놈이 어디 가든 따라갈 테다. 백두산 아니라 만주땅까지도 말이야."

그게 그들의 작전이었고 털보영감이 지시이기도 했다.
"범은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사이에 몇백리를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매일 그렇게 달리지는 못해. 놈이 포수에게 쫓기면 화를 내고 미치게 되지. 그러니 꾸준하게 추적을 하면 범은 언젠가는 되돌아선다. 그때 한판 벌여라."

범과 포수들 사이의 대추격전이 벌어졌다. 털보영감의 말대로 범은 이틀 사이에 벌써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 경계지대인 추가령을 넘어갔다.
범과 포수들과의 거리는 크게 벌어졌으나 포수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끈질기게 추적을 계속했다.

추적 5일째 범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접경지대에 있는 두류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포수들은 그래도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밤 그들은 곰이 겨울잠을 잤던 어느 동굴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범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코를 골던 김서방이 벌떡 일어날 정도의 큰 소리였으며 한 마장 또는 두 마장 이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봐, 놈이 여기를 덮칠지도 몰라 ! 화승에 불을 붙여 !"
"공연한 소리 ! 난 포수가 자고 있는 집을 범이 덮쳤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
그렇게 김포수도 그 범의 포효소리를 듣고는 잠을 잘 수가 없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범의 포효소리는 사경(四更 :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이 지날 무렵에 멈췄고 날이 밝아도 산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포수들은 날이 완전히 밝은 다음에야 동굴에서 나왔다.

범은 보이지 않았으나 주위에서 가득 찬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보잘것 없는 인간들에게 닷새 동안이나 추적을 당해 화가 나 있는 범의 광기가 느껴졌다.

"놈은 저 산너머에 있어."
발자국을 조사하던 김서방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산을 넘어서니까 아래쪽 계곡에 범이 있었다.

범은 계곡을 타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힐끗 사냥꾼들을 쳐다보더니 가볍게 으르렁거렸다. 범의 마지막 경고였다.

"이 새끼야, 우리가 네놈을 그냥 둘 줄 아느냐 ! 이제 곧 네놈의 껍데기를 벗겨 줄 테다."
사냥꾼들은 곧바로 계곡쪽으로 내려갔다.
범은 되돌아서서 사냥꾼들을 노려봤다.

거리는 약 5백보, 화승총으로는 사격을 할 수 없는 거리였다.
"자, 이제 나 혼자 판을 벌이겠어. 형은 따라오지 말아 ! 한 놈이 죽으면 됐지, 모두 죽을 건 없어…"
그러나 김서방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무슨 말이냐 ! 네놈만 포수고 난 포수가 아니란 말이냐."
김서방은 손도끼를 빼들고 김포수와 나란히 걸어갔다.
"어허, 말 안 듣네."

김포수는 짜증스럽게 말했으나 그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김포수와 김서방이 나란히 접근해오는 것을 본 범이 꼬리를 뻣뻣하게 세웠다. 범이 공격을 할 때 나타내는 버릇이었으며 위험신호였다.

범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젠 꼬리뿐만 아니라 목덜미의 갈기까지도 뻣뻣하게 서 있었다. 눈에서 파란 불이 일고 있었다.
"덤비려면 덤벼 !"

범은 맞대결을 피하려는 듯 천천히 어느 바위 뒤로 숨었다.
포수들은 그 바위 뒤를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했다. 이미 불을 붙여놓은 화승이 다 타버리기 전에 결판을 내야만 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결판을….

바위까지의 거리는 이젠 50보, 충분히 포를 발사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범은 바위 뒤에 없었다.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김포수가 아차하고 주위를 살폈다. 범은 바로 앞에 있는 바위 뒤에 있었다.

거리는 단 10보. 범은 거기서 도약을 하려는 것이었다. 놈이 발로 바위를 차고 덮쳐들면 싸움은 그것으로 끝난다. 발포를 할 여유도 없었다. 화승이 화약에 점화되기도 전에 범의 앞발이 포수의 머리를 으깨버릴 게 분명했다. 김포수는 고함을 질렀다. 고래고래 큰 소리로 그는 범을 질타했다.

"네 이놈, 불 받아라 !"

그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사냥법이었다. 고함을 질러 맹수의 기를 꺾어 그 공격을 멈추게 한 다음 화승포를 발포하려는 것이었다. 바위 뒤에서 막 도약을 하려던 범이 멈칫했다.

그 사이에 화승포가 발사되었다. 화염과 함께 뿌려진 검은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김포수는 화승포의 총탄이 범의 두개골을 부수고 들어가는 소리가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뭣인가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도 들었다.

연기가 사라지자 범이 보였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위 밑에 떨어져 있었다.
김서방이 도끼를 빼들고 범에게 덤벼들려고 했으나 김포수가 그 팔을 꽉 잡았다.

"왜 이래. 범가죽을 못쓰게 만들려고…"
범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