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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선한 범과 악한 범(상)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선한 범과 악한 범(상) - (글 : 김왕석)

함경북도에 범마을이란 곳이 있었다.
범마을에는 큰마을, 동마을, 서마을 등 세개의 동네가 있었는데 동네들은 큰마을을 중심으로 각기 서너 마장쯤 떨어져 있었다.

큰마을에는 30호, 다른 두개의 마을은 각 20호쯤 모두 3백여명이 살았는데 그 광대한 지역에는 그들 외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고 들어오지도 않았다.

서쪽과 남쪽은 톱니같은 산들이 솟아 있었고 동쪽과 북쪽은 광막한 원시림이 뻗어있는 지역이었으며 산과 삼림 속에는 언제나 맹수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맹수들의 나라에서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었으며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매월 달이 차는 날에 큰마을에서 열리는 세 개 마을회의의 내용이나 마을행사, 재판 등에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관심사가 있었다.
그 광대한 지역에서 그들과 같이 살고 있는 뭇짐승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는데 그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정보들이었다.

작년까지 산중복에 살고 있던 멧돼지들은 어디로 갔으며, 삼림 속에 있던 사슴은 어떻게 되었는가. 올봄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한 불곰은 아직도 돌아다니는가, 그리고 산군은 왜 불곰을 그대로 버려두는가 등등이 그들의 주요 화제였다.

특히 그들의 관심을 갖는 것은 산군(山君)의 동향이었다. 산군이란 범이었는데 그곳의 산군은 수펌이 아니고 암펌이었다.

연한 황갈색 바탕에 굵고 검은 줄이 뚜렷한 한국범이었는데 아주 침착하고 무게있는 범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범을 성덕님이라고 불렀는데 벌써 6 - 7년째 그곳 일대를 영토로 삼아 지배해 왔다.

마을사람들은 성덕님을 존경하고 좋아했는데 성덕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삼국지만큼이나 길었다.
본래 그 일대는 큼직한 만주범의 영토였는데 그만 그 범은 너무 늙어 동작이 느렸다. 그래서 그는 어느날 거대한 늙은 멧돼지를 사냥하다가 옆구리에 일격을 받고 쓰러졌다. 물론 범은 다시 일어나 그 멧돼지의 목줄을 물어 죽였으나 잡은 멧돼지 시체를 그대로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아랫배가 찢어져 피를 뚝뚝 흘리면서 가고 있었는데 틀림없이 죽었을 것으로 보였다.
만주범이 사라지자 그곳은 군주 없는 지역이 되어 멧돼지들이 몰려들어 그 횡포가 여간 아니었다. 그 일대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산기슭에 개간해 놓은 옥수수밭을 하룻밤 사이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마을 앞의 감자밭 또한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마을사람들은 창과 칼로 그런 멧돼지들과 싸웠으나 멧돼지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 결국은 다른 마을로 옮겨야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에 마을사람들은 인근 산에서 범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전의 만주범의 울음 소리보다는 훨씬 큰 울음 소리가 울려퍼지자 인근 산과 삼림들이 조용해졌다.
"옳지 ! 새로운 산군(山君)이 들어섰구만 !"

마을사람들의 추측은 어긋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옥수수밭 인근 산에서 멧돼지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옆에 큼직한 범의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도 또 범이 멧돼지를 잡아먹은 자국이 발견되었고 그 후부터는 멧돼지들의 횡포가 없어졌다.

멧돼지들이 산군에게 쫓겨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새로운 산군은 전의 산군과는 달라 ! 생각이 아주 깊고 행동은 민첩해 !"
마을 사람들의 말대로였다.

전의 산군은 자기 힘만 믿고 높은 산정에서 멧돼지를 발견하면 덮어놓고 덮쳐들어 놓지거나 자기가 부상을 당하는 일이 많았으나 이번 산군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범은 옥수수밭에 미리 숨어 있다가 멧돼지들이 아주 가까이까지 오는 것을 기다려 신속하게 덮쳐들어 목줄을 물어 죽이고 있었다.
"틀림없이 젊은 범일 거야 !"

그러나 마을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만약 새로 들어온 산군이 사람을 해치면 어떻게 될 것이냐는 문제였다.

전에 있던 범은 몇 년 전에 나무꾼 한 사람을 죽인 일 외에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고 나무꾼을 죽인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나무꾼이 숲속에서 잠자고 있던 범을 사슴인 줄 알고 창을 들고 뛰어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새 범이 온 지 한 달쯤 되던 어느날 낮에 동마을의 정장로가 젊은 사람 하나를 데리고 큰 마을에 가느라고 산을 하나 넘어섰을 때 바로 산길 옆 바위 위에 범이 앉아 있었다.

전의 범보다 체구는 작았으나 털에 윤기가 있었고 몸이 날씬해 보였다. 범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으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범이다 !"

젊은이가 고함을 질렀으나 대담하면서도 침착한 정장로가 나직이 말했다.
"떠들지 마 ! 그대로 가 !"
정장로는 오래도록 사냥을 해 온 사냥꾼이었으며 범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노인이었다.
"임마, 겁을 내지 말고 그대로 나가라니까 !"

정장로와 젊은이는 그대로 범 앞을 지나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범이 언제 등 뒤에서 덮쳐들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큰마을까지 걸어서 들어갔는데 큰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젊은이는 물론 대담한 정장로도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정장로의 그날 행동은 보통사람은 해내지 못할 용기있는 행동이었으며 그것이 새로 들어온 범과 인간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새로 들어온 범에게 인간들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그 범을 만난 사람들은 세 사람의 나무꾼들이었다.
그들은 하오 늦게 산에서 나무를 해 가지고 돌아오다가 산중복의 따뜻한 양지 바른 마를 풀밭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속삭였다.
"범이다 ! 범이 우리들을 보고 있어 !"
범은 저쪽 산정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짓들을 빤히 보고 있었으나 눈길은 부드러웠다.

범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지 머리를 돌려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나무꾼들도 모른 척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사람들이 세 번째로 범을 보았을 때는 상황이 좀 달랐다.

그때 서마을 사람 하나가 급한 환자에게 먹일 약초를 구해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날씨가 이미 어두웠다.

그 사람은 거의 뛰다시피 했는데 저쪽 앞길에 푸른 불빛 두 개가 보였다. 그렇게 큰 불빛이라면 범 외에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는 되돌아갈까 하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되면 도리어 범을 자극시킬 것 같아서 그대로 걸어갔다.
그런데 앞길을 막고 있던 불빛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면서 길을 틔워 주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범과 사람들 사이에는 이상한 묵계가 생겼다.

산중에서 서로 만났을 땐 서로 모른 척 한다는 묵계였으며, 이 묵계가 줄곧 지켜지자 나중에는 서로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

사람과 범의 이러한 평화협정은 5년동안이나 잘 지켜졌으나 단 한번 위기가 있었다.
네 명의 사냥꾼들이 마을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인근 숲속에서 으르렁거리는 범의 소리를 들었다.
살기에 찬 소리였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등골이 오싹했다.

사냥꾼들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 창을 받쳐들면서 슬슬 뒷걸음질을 쳤는데 범은 계속 으르렁거리다가 조용해졌다.
마을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범이 거칠어진 것을 크게 우려했으나 그후 그때 범이 있었던 장소에 가보고 범이 으르렁거린 이유를 알고 마음을 놓았다.

그곳에는 노루뼈들이 있었다. 그때 범은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고를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사람과 범은 평화를 다시 찾았고 사람들은 그 범을 산군으로 존경했다.

범마을에는 예부터 1년에 한 번씩 범을 위해 고사를 지내는 관습이 있었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범이 자주 드나드는 산정에 제단을 마련하여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산군에게 감사의 고사를 지냈던 것이다.

범도 또한 그때가 되면 고사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날밤 아니면 다음날 밤에는 반드시 그곳에 와서 돼지를 먹었다.

마을사람들은 그걸 만족하게 여겼고 범이 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 (중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