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응방(鷹坊)의 후예(상) - (글 : 김왕석)
조선조 말엽에는 전국에 많은 매사냥꾼들이 있었다. 매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고 취미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 인제에 사는 신영감은 매사냥을 업으로 하지도 않았고 취미로 하지도 않았다.
신영감은 대대로 궁중에서 응방(鷹坊)을 하던 집안의 자손이었으며 그가 매사냥을 하는 건 그 영광된 전통을 잇기 위해서였다. 응방(鷹坊)이란 왕실의 매사냥을 도와주는 관리였으며 상당한 벼슬이었다.
응방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제도로 조선조 중엽에는 좌우 응방 밑에 수십명의 부하들이 있었다.
조선조 말엽에는 그 제도가 없어졌으나 신영감은 궁중에서 물러난 후에도 언젠가는 다시 임금님을 모시게 될거라고 확신하고 시골에서 응방으로서의 일을 하고 있었다.
인제 남쪽에 있는 어느 산기슭에 있는 신영감의 집은 비록 초가집이었으나 어느 양반집 못지않게 넓고 당당했다. 신영감은 그 집에서 맏아들 부부와 살고 있었고 행랑방에는 매사냥을 도와 줄 사람이 세 사람, 이웃집에도 서너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포수는 열 두 살때 처음 신영감을 만났는데 영감은 근엄하기는 했으나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신영감은 그 소년이 어린 나이인데도 창을 던져 토끼나 꿩을 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견스럽게 생각하고는 다음날 매사냥에 소년을 데려가기로 했다.
신영감은 매사냥을 앞둔 전날밤에 사냥 준비를 했다. 영감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늙은 매를 사냥에 데려가기로 했으나 그 매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았다. 배가 부르면 매가 사냥을 하기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신영감은 또한 헝겊 뭉치에 끈을 매어 매에게 먹인 다음 끈을 잡아당겨 그걸 토해내도록 했다.
배속에 있는 기름기를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조치 때문인지 매는 몹시 날카로운 눈빛이 되었고 끽끽하는 살기 띤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매는 몇 년 전에 황해도에서 잡은 해동청(海東靑)이었는데 매중에서도 으뜸으로 치고 멀리 중국·몽고·일본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종류였었다.
신영감은 다음날 응방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정장을 하고 있었다. 두건을 단정하게 쓰고 있었으며 옷이 펄렁거리지 않도록 몇 군데를 줄로 매고 짐승 껍질로 만든 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왼손에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그 위에 매를 앉혔다.
매의 양다리에도 부드러운 가죽이 감겨 있었고 가죽에는 명주실로 꼰 줄이 달려 있는데 신영감이 그 끈을 쥐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것을 잘 봐 두어야 해. 다른 매사냥꾼들은 많은 털이꾼(몰이꾼)들을 두어 그들이 꿩을 훌쳐내 날려올린 다음 매를 날려 잡지만 이 매는 털이꾼이 필요없어. 이 매는 매우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꿩이 날아올라가면 재빨리 발견을 하여 덮친단다."
신영감은 네 명의 조수를 데리고 갔는데 그들은 주위의 산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매가 날아가는 방향을 감시하고 있었다.
매가 꿩을 잡아 땅에 내려앉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빨리 달려가서 꿩을 뺏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매가 훈련이 덜 되었거나 사람이 달려가는 시간이 너무 오래 되면 굶주렸던 터라 사냥감을 다 먹어치우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매는 달라 ! 이 매는 꿩을 낚아채면 조용하게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매사냥터는 잡초들이 우거진 넓은 벌판이었다. 동쪽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머지 세 방면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한 야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신영감은 천천히 걸었고 매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저쪽 숲속이 술렁이면서 까투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꿩이닷 !"
소년이 소리쳤으나 신영감의 손등에 앉아 있던 매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었어. 이 매는 꼭 잡을 자신이 있을 때만 날아가겠다는 신호를 나한테 보낸단다. 몸을 움츠리면서 발에 힘을 주는 거지 !"
신영감이 벌판 한가운데쯤 갔을 때 바로 옆에 있던 풀밭 속에서 퍼드득 하면서 커다란 장끼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오색이 영롱한 아름다운 꿩이었다. 꿩은 자기의 무거운 몸을 날려올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나래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년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매가 먼저 날아올랐다. 힘차게 신영감의 손등을 차면서 총알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잡아라 ! 잡아 !"
매는 바로 꿩에게 덮쳐들지 않고 우선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 아래쪽에서 도망가는 꿩을 보고 있었다. 적이 어떤 놈이며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느냐를 살피는 것 같았다.
매는 그런 다음에 꿩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앞질러 날았다. 그리고 매는 꿩의 위쪽에서 몸을 돌려 거의 수직으로 아래쪽에서 푸드덕거리는 꿩에게 덮쳐들었다.
꿩은 그제야 방향을 바꿔 도망을 가려고 했으나 몸이 너무 무거웠다. 얼떨결에 아래쪽으로 몸을 피했으나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이용한 매의 빠르기를 당할 수 없었다. 산중턱 잔솔밭 바로 위에서 꿩은 잡혔다. 매의 갈고리같은 발톱이 꿩의 목덜미를 찍어 누르면서 매와 꿩은 같이 잡풀 속으로 떨어졌다.
"잡았다."
소년이 그쪽으로 뛰어갔고 신영감은 그런 소년의 민첩한 동작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노루처럼 뛰는 소년은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신영감의 말대로 매는 두발로 꿩을 꽉 짓누르고 있었는데 소년을 보자 경계하듯 대가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꿩은 이미 치명상을 입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매는 달려온 사람들에게 꿩을 넘겨주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 매가 도망간다."
그게 아니었다. 매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신영감에게 날아가 그 손등에 사뿐히 앉았다.
신영감은 만족해 한다는 표시로 매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털이꾼이 뽑아낸 꿩의 내장을 매에게 주었다.
신영감은 사흘 후에 다시 소년을 데리고 매사냥을 했다. 이번엔 토끼를 잡기로 했다. 토끼사냥은 꿩사냥과는 달랐다. 꿩은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토끼는 숲속으로 뛰기 때문에 사람과 매는 언제나 밑을 봐야만 했다.
토끼란 놈은 밤에 배부르게 먹고 낮에는 풀 속에서 죽은 듯이 숨어있기 때문에 사냥터가 나쁠 경우에는 매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 매의 습격을 받은 토끼는 일부러 가시덤불 같은 곳으로 도망치는데 매가 그런 토끼를 추격하면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신영감은 가시덤불 등이 있는 곳을 피하면서 숲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손등에 앉아 있던 매가 갑자기 몸을 움츠렸다.
신영감은 매가 토끼를 발견한 줄 알고 얼핏 줄을 놓아 주었는데 그게 신영감의 목숨을 구할 줄이야.
신영감이 매를 풀어 준 순간 매는 강한 나래질을 하면서 바로 신영감의 발 밑으로 떨어졌다. 신영감은 매에게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놀랐으나 그게 아니었다.
매가 떨어진 숲속에는 살모사(독사) 한 마리가 신영감에게 덮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매는 발로 그 독사의 목부분을 꽉 누르면서 부리로 뱀의 대가리를 찍었다. 그 뱀은 길이가 석자나 될 정도의 큰 놈이었다.
"아, 이놈이 !"
신영감은 놀랐으나 매와 독사가 한덩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싸움을 바라볼 뿐 달리 매를 도와 줄 방법이 없었다.
싸움은 매에게 불리한 것 같았다. 독사는 이미 매의 발을 물어 맹독을 뽑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매의 몸을 감아붙이고 있었으니까.
- (하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
'수렵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민담 수렵사 - 선한 범과 악한 범(중) (0) | 2008.11.06 |
---|---|
-- 한국민담 수렵사 - 선한 범과 악한 범(하) (0) | 2008.11.06 |
-- 한국민담 수렵사 - 응방(鷹坊)의 후예(하) (0) | 2008.11.06 |
★ 한국민담 수렵사 - 사냥개 훈련(상) (0) | 2008.11.06 |
-- 한국민담 수렵사 - 사냥개 훈련(하) (0) | 2008.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