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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설악산의 산양(山羊)들(상)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설악산의 산양(山羊)들(상) - (글 : 김왕석)

1928년 늦가을이었다. 강원도 설악산 기슭 삼림 속을 걸어다니던 설악스님은 낙엽들이 짓밟히고 핏자국이 나 있는 곳을 발견했다.

스님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핏자국을 따라갔다. 핏자국은 계곡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며 계곡 바위에 동그란 꽃무늬의 짐승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살쾡이의 발자국보다는 훨씬 컸고 줄범(대호)의 것보다는 작았다. 스님은 그게 불범(표범)의 것이라는 걸 알고 걱정했다.

불범은 무슨 짐승을 잡아서 입에 물고간것 같았다. 그 짐승이 뭣인가는 곧 판명되었다. 큰 바위들 사이에 짐승들의 뼈가 남아 있었다.

스님이 염려했던대로 그건 산양 새끼의 것이었다. 난 지 몇달밖에 안되는 귀여운 새끼들임에 틀림없었다.

스님은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스님은 그 산양새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설악산의 산날등을 타고 뛰어다니던 네 마리의 산양가족 중 막내였으며 뿔도 안 난 머리를 흔들면서 팔짝 팔짝 뛰어다니던 놈이었다.

스님은 산양새끼의 뼈를 묻어주고 전날 머물렀던 주막으로 되돌아갔다.
"스님, 산중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못된 불범 두 마리가 돌아다니니까요."
주막집 주인은 그 불범들이 한 달쯤 전에 나타나 늑대들이 살고 있던 동굴을 빼았았다고 말했다.

늑대들을 쫓아버린 불범들은 설악산을 제집 마당처럼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짐승들을 잡아먹었고 나무꾼들까지 위협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잘 알고 지내는 포수 한 분을 모시기로 했지요. 그러니 스님께선 그분이 올 때까지는 너무 깊은 곳까진 들어가지 마시지요."

그러나 스님은 다음날도 산속으로 들어갔다. 설악산을 좋아하고 산양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산양들이 보였다. 생각했던대로 네 마리가 아니고 세 마리였다. 산양들은 늘 하던대로 산기슭 삼림에 내려와 나뭇잎들과 풀들을 뜯어먹고 산중복에 있는 넙적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맨앞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녀석이 가장이었다. 당당한 체구의 날카로운 뿔을 가진 그를 사람들은 '설악산의 왕'이라 불렀다.

그는 톱니같은 산날등을 마음대로 뛰어다녔고 열서너 자나 되는 산과 산 사이를 날뛰었으며 병풍같은 절벽을 미끄러져 타고 내려가곤 했다.

스님은 작년 가을에 그놈이 늑대들과 싸우는 걸 봤다. 두 마리의 큼직한 늑대들이 산양가족들을 쫓고 있었는데 늙은 산양은 가족들을 산정으로 대피시키면서 감연히 두 마리의 늑대들과 대결했다.

산양은 바위 길에 버티고 서 있었다. 짐승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었으며 길 아래쪽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산양은 털을 뻣뻣이 세우고 두눈에 불을 켠 채 쿡쿡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머리를 숙인 날카로운 불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길이 좁기 때문에 늑대들은 한꺼번에 덤벼들 수가 없었다. 앞에 선 늑대는 검은 털을 가진 두목 늑대였는데 그놈은 만만하게 생각했던 산양이 바로 코 앞에서 버티고 선 것을 보고 당황해 하는 듯했다.

늑대는 산양의 기를 죽이기 위해 으르렁거렸으나 산양은 뒷발로 바위를 차면서 맞섰다. 늑대는 그걸 보고 화를 냈다. 늑대는 산양의 목덜미를 향해 덮쳐들었다. 목덜미는 짐승들의 급소였으며 늑대는 언제나 사냥을 할 때 목덜미를 물고 짓눌러 적을 죽였다.

늑대는 그때도 산양의 목덜미를 물고 짓누르려고 했으나 그건 산양이 바라던 바였다. 산양은 늑대의 앞발과 아가리가 목덜미에 닿자 번개같이 대가리를 쳐들면서 양 뿔에 늑대의 상체를 걸면서 네다리로 땅을 차고 공중으로 던졌다.

늑대의 몸은 공중으로 날아 그대로 천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서 다른 늑대 한 마리는 어리둥절한 듯 뒷걸음질을 쳤다.

산양은 그 늑대도 그냥 두지 않았다. 산양은 이번에는 적극 공세로 나가 늑대를 밀어붙였다. 뒷걸음질로 도망가던 늑대는 당황한 나머지 앞선 늑대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산양은 그 늑대를 뿔에 걸어 절벽 밑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스님은 산양들의 그런 재주를 알고 있었으나 이번 상대는 늑대가 아니라 표범이라 그렇게 쉽게 해낼 것 같지 않았다.

산양들은 양지바른 넓적바위 위에서 햇볕을 쪼이면서 삼림 속에서 얻은 먹이들을 되씹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숲속에 알록달록한 색깔이 보인 것이다.

표범이었다. 표범은 거기에 숨어 기회를 보고 있었다. 산양들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일까 ?
두목 산양이 표범이 숨어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는 걸 보면 알아찰린 것도 같은데 왜 빨리 도망가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표범이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뛰어나오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산양들에게 덮쳐들었다.
산양들은 그제야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향이 달랐다. 산정으로 통하는 위쪽으로 가지 않고 넓적바위 끝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양들이 몰려가고 있는 넓적바위의 끝은 병풍같은 절벽이었으며 높이가 30m나 되었다.

그런데 산양들이 절벽 끝에 몰린 것을 보고 그대로 덮쳐들었다.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스님은 다음 순간, 참혹한 살생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표범의 노호도 산양들의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표범 혼자서 멍하니 절벽 위에 서 있었고 산양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양들이 흩어져 없어져 버린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산양들은 거의 수직인 절벽에서 미끄럼을 타듯 내려오고 있었다.

뒷발을 앞쪽으로 뻗고 엉덩이를 암벽에 밀착시키면서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앞발을 절벽에 붙이고 몸의 중심을 뒤로 잡으며 강하하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산양들의 절벽 미끄럼 타기였다.

산양들은 절벽 여기저기에 있는 틈이나 절벽 틈 사이에 있던 풀이나 덩굴 등에서는 앞발을 이용하여 속도를 늦추고 몸의 중심을 바로 잡아가면서 강하하고 있었다.

산양들의 미끄럼 타기는 모두 성공했고 두목 산양은 절벽 위에 멍하니 서 있는 표범을 비웃듯 쳐다보면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그날밤 스님은 주막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 사발이나 들이키면서 흥분했다. 그러나 주막집 주인의 의견은 달랐다.

"아닙니다, 스님. 표범들이란 한번 노린 먹이는 절대로 단념하지 않습니다. 산양들은 언제나 그곳에서만 사는 짐승이므로 표범은 몇번이라도 산양을 덮칠 수가 있으며 다음번에는 산양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온다던 포수는 언제 오나 ?"
"며칠 걸릴 것입니다."

스님은 살생을 일삼는 포수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그때만은 그들이 빨리 와 주었으면 하고 기다렸다.
'뭘 하는 걸까. 오려면 빨리 와서 표범을 잡을 일이지.'

스님은 다음날 산양들이 절벽을 탔던 곳으로 가 봤다.
설악산의 하얀 암벽은 여인의 속살처럼 아름다웠고 또 매끄러웠다.
'이런 절벽을 어떻게 타고 내려왔을까'

비밀은 산양의 앞발에 있었다. 산양의 발굽은 두 개로 갈라져 있고 단단한 각질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각질에 둘러싸인 내부에는 고무와 같은 부드러운 피부가 있었다.


산양의 발굽 내부의 피부는 두 갈래로 갈라진 굽 사이에서 들어오는 공기에 의해 부풀어오르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고 마찰을 하면 찐득거리는 점액을 내기도 한다.

그래서 산양은 그 발굽을 바위에 밀착시켜 몸이 암벽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미끄러져 내려온다. 발굽 바닥에 밀생되어 있는 굵은 털도 제어기능(制御技能)을 발휘하며 갈라진 발굽을 암벽에 나 있는 틈에 끼기도 하고 뒷발톱으로 걸기도 한다.

또 산양의 털 안에는 진공부가 있고 그 안에 기포(氣泡)가 있어 암벽을 타고 급강하를 해도 엉덩이나 발바닥에 화상을 입지 않는다.

주막 주인의 말대로 표범은 그후에도 집요하게 산양들을 따라다녔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그러나 산양들도 표범들 때문에 삼림으로 들어가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됐고 계곡에서 물을 마실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늙은 두목 산양은 마침내 표범에게 도전을 하고 나섰다.

- (하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