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매화록(梅花鹿) 사로잡이(하) - (글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놈은 그곳에서 사슴을 기습하려고 잠복하고 있다가 사냥꾼들을 발견하곤 위협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협으로 불러갈 사냥꾼들이 아니었다.
홍포수가 손을 들어 박영감에게 '위험하니 더이상 따라오지 말라.' 고 신호하고 혼자서 천천히 덤불로 접근했다. 표범은 그걸 보고 발광하듯 울부짖더니 홍포수가 20m 가까이 접근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덤벼드느냐, 도망가느냐 숨막히는 순간이 흘렀으나 표범은 덤벼들지 못했다.
표범은 소리없이 덤불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사람과 표범이 싸움은 결국 사람의 승리로 끝났다.
홍포수는 표범을 쫓지 않았다. 표범을 잡느냐, 사슴을 사로잡느냐 하고 망설이다 사슴을 택한 것이다.
표범은 사슴을 잡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삼림에서 두 마리의 야수들이 같은 먹이를 노렸을 땐 서로 다투거나 약한 쪽이 물러나야만 되는 게 법이었는데 그 표범은 그걸 알고 물러난 것이다.
홍포수는 사슴이 도망가고 있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표범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사슴 추적에 합류했다. 그러나 사슴을 노리는 건 비단 표범만이 아니었다. 표범보다는 더 무서운 적, 사람들이 또 노리고 있었다.
사슴은 본디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좀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살고 있던 곳에서 쫓겨난 사슴은 불안에 떨어 실수를 했다.
추적을 당해 낯선 곳으로 달아나던 사슴은 그저 살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서성대다가 또 다른 적들에게 발견되고 만 것이다. 사슴은 험한 산악지대를 싫어하는 짐승이라 산기슭 삼림 속을 달아나는데 삼림의 흐름이 끊어지면 나무들이 별로 없는 들판 등을 마구 달리다가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수가 많았다.
홍포수 일행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경계인 추가령 인근에서 사슴 발자국을 쫓는 듯한 사람들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산중의 짐승은 무주과실(無主果實)이라 잡는 사람이 임자여서 그들에게 먼저 사슴을 쫓고 있었다는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홍포수는 그럴 경우엔 어떻게 대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슴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를 해야만 했다.
"뛰어. 빨리 가서 사슴을 살려야 해."
사슴을 쫓는 사람들은 약 30명이나 됐으며 두 마리의 개까지 설치고 있었다. 사슴은 포위망이 좁혀지면 어찌할 줄을 모른채 멍하니 서 있었고 그때 활과 창을 사용하면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홍포수는 포위망 뒤쪽 산정에서 그런 상황을 보고 두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곰보가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고 박영감도 고함을 지르면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홍포수는 사슴에게 덤벼드는 개들의 콧등 앞으로 총탄을 날려보냈다.
사슴 사냥대들은 난데없는 훼방에 기급을 했고 개들은 계속 날아오는 총탄에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 그 사이 사슴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네놈들은 뭘 하는 놈들이야."
강한 함경도 사투리의 욕설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으나 홍포수는 시치미를 뗐다.
"피차 사슴을 잡겠다고 한 짓인데 뭐가 잘못됐나. 그 사슴을 쫓아 벌써 천리길을 달려온 사람들더러 사슴을 잡지 말란 말이요 ?"
"네놈들은 사슴을 잡으려는게 아니라 훼방을 놓았어. 그리고 우리 개들을 죽이려고 했잖아."
"우리들의 사냥이 서툴러서 그랬소. 총으로 사슴을 쏘려던게 개들이 있는 곳으로 총탄이 날아간 것 뿐이오."
함경도 사냥꾼들도 총을 갖고 있는 그 난폭한 포수와 더 이상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던지 결국 물러났다.
추적 닷새만에 사슴은 지칠대로 지쳤다. 추적자들은 마른 고기나 칡뿌리를 씹으면서 쫓아왔지만 사슴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지쳤다.
사슴은 몸도 약해졌지만 마음이 더 쇠약해져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게 추적자들이 노리는 점이었다.
곰보는 가끔 나팔을 불었는데 그 소리에 쉬고 있던 사슴은 몸서리를 치면서 다시 도망가야만 했다.
이래서 이틀 후 매화록은 개마고원을 넘어 삼림지대로 들어갔다. 침엽수들이 끝없이 뻗친 원시림이었으며 그 북쪽 끝에는 백두산이 있었다.
만주 사람들은 그곳을 슈하이(樹海)라고 불렀는데 슈하이에는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에서 뭇 짐승들이 몰려들었다.
따라서 그곳은 한국에 사는 뭇짐승들의 본고장이었으며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사냥터였다.
곰보는 그곳에서부터 나팔뿐만 아니라 꽹과리까지 치면서 추격을 했다.
그 소리들은 사슴을 미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노리는 맹수들에겐 경고의 효과를 냈다. 대호의 포효도 불곰의 울부짖음도 요란한 나팔과 꽹과리 소리를 듣고 침묵했다.
"빨리 몰아야 해. 두만강 물이 얼어붙기 전에 빨리 몰아야 해….
곰보는 장장 천여리를 추적해 왔으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설치고 있었다.
지친 사슴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총을 쏘면 벌써 몇번이라도 잡을 수 있었던 사슴이었으나 죽여서는 안되기에 과부 보쌈해 오듯 곱게 사로잡아야만 했다.
사슴은 이틀 후에 백두산 동쪽 두만강에서 갈라진 서두수를 건너갔다. 서두수는 이미 살얼음이 끼어 있었으나 사슴은 있는 힘을 다해 그 물결을 따라 헤엄쳐갔다.
사냥꾼들은 다음날 사슴을 두만강가로 몰았다. 강원도에서 시작된 추적이 장장 2천리, 이제 막바지가 된 것이었다.
두만강에는 얼음이 얼어붙었으나 그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강 너머는 이국 땅이라 사슴이 그 강을 건너가면 더 이상 추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자, 이젠 마지막 판을 벌여야 해."
거기서부터는 발자국꾼 박영감이 물러나고 몰이꾼 곰보가 총지휘를 하게 되었다. 곰보는 인근 지형을 살핀 다음 사슴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의 앞길을 막고 나팔을 불어댔다. 놀란 사슴은 방향을 바꿔 언덕쪽으로 도망쳤다. 두만강 물이 바로 밑을 흐르고 있는 절벽이었으며 높이가 10여m나 되었다.
사슴이 그곳으로 올라가자 곰보는 더 이상 나팔을 불지 않았다.
사냥의 마지막판에서는 사슴을 놀라게 해서는 안되며 조용하게 달래면서 잡아야만 했던 것이다.
사슴은 자기가 몰리고 있는 길이 막다른 언덕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길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그 길은 사람들이 막고 있었다. 언덕이 있는 북쪽 길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세 방면엔 사람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사슴에게는 그 사람들 사이를 돌파할 용기도 기운도 없었다.
이제 사냥꾼들은 사슴과 대면하게 되었다. 미록과 매화록의 피를 함께 받은 그 사슴은 미록만큼이나 컸고 매화록처럼 아름다웠다. 잘 손질한 빌로드처럼 윤이 나는 황갈색 바탕 털에 백설 무늬가 선명했고 푸르고 큰 눈동자가 순하디순해 보였다.
이젠 그 사슴을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사냥꾼들은 사슴을 못 본체하면서 조용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사슴도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운 것을 보지 않으려는 심리였다. 독수리에게 쫓긴 꿩이나 토끼가 풀숲 속에 대가리만 처박고 떨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사냥꾼들은 한참 후에 슬금슬금 포위망을 압축했다. 사슴이 불안해 하면 멈췄다가 사슴이 마음을 놓으면 또 슬그머니 다가섰다. 사슴은 점점 막다른 언덕으로 몰려갔다. 그에게 남은 길은 둘 중의 하나였다. 포위망을 돌파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사람들은 서로간의 간격을 바싹 좁히고 있어 그들을 뿔로 받거나 발로 차 쓰러뜨리지 않는 한 도망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덕에서 뛰어내릴 용기도 없어 사슴은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사냥꾼들은 이젠 아예 앉아버렸다. 사슴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이 외면하면서 능청맞게 눈을 감고 졸기까지 했다.
어리석은 사슴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가만히만 있으면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를 보고 한 발짝 한 발짝 접근했다. 사슴이 그걸 알고 겁을 먹으면 또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사슴을 안심시켰다.
곰보는 곁눈질로 사슴을 관찰하고 있었다. 뛰는 심장이나 경련하듯 움직이는 뒷다리 근육들을 보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사슴의 뒷다리가 땅을 박찰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슴은 언덕으로 떨어져버려 10년 공들인 탑이 일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이놈아 제발 조용하게 있어다오. 내가 줄을 던져 네놈의 목을 걸어당길 때까지 제발 좀 조용하게 있어다오.'
곰보와 사슴이 그런 숨막히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해가 서산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홍포수의 마음도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디어 곰보에게 기회가 왔다. 거리가 6 ∼ 7m로 단축된 것이다. 그건 줄을 던질 수 있는 거리였다.
곰보는 사슴에게 등을 돌리며 허리에 감고 있던 줄을 풀었다. 그 줄은 사슴의 목에 걸려야만 했다.
곰보는 언제나 그렇듯이 실수없이 이 일을 해냈다. 몸을 비틀어 일어서면서 줄을 던졌는데 줄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면서 어김없이 사슴의 목에 걸렸다.
그순간 사슴은 뒷발로 땅을 박찼고 그 무서운 힘에 곰보의 몸이 들떠 들려갔다. 그때 홍포수가 덤벼들어 곰보와 같이 줄을 잡아당겼고 사슴은 언덕 끝에서 멈췄다.
그러자 이번엔 박영감이 줄을 던졌다. 그가 던지는 줄 끝에는 호두만한 납덩이가 달려 있었는데 그 납덩이가 사슴의 뒷다리를 감아붙였다.
"됐다 !"
박영감이 힘껏 줄을 잡아당기면서 사슴에게 덮쳐들어 두손으로 양뿔을 움켜잡고 우악스럽게 비틀었고 곰보와 홍포수도 거기에 맞추어 사슴의 목에 걸린 줄을 잡아당겼다. 사슴이 비틀거리면서 옆으로 털썩 쓰러지자 곰보가 기급을 하면서 박영감에게 소리쳤다.
"야, 이 바보 자식아 ! 사슴을 죽이려고 그래."
그는 재빨리 덤벼들어 사슴의 네 다리를 묶어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검은 헝겁을 끄집어내 사슴의 두 눈을 가렸다. 그것은 무서운 것을 보지 못하게 하여 진정을 시키려는 조치였다.
곰보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사슴은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었다. 녀석은 눈이 가려지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조용해졌다.
- (끝) -
◎ 참고 : 등장인물 홍학봉(洪學奉) 포수 약력
1901 ∼ 1976
경기도 출생
조선총독부 촉탁엽사, 영국 왕실박물관 전속엽사.
해방 후 올림픽 사격선수 지도원
강원도의 매화록(梅花鹿)을 만주의 광야까지 추격 포승줄로 사로잡은 포수
포수들 간에 불려진 별명 : '무쇠다리' '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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