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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매화록(梅花鹿) 사로잡이(상)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매화록(梅花鹿) 사로잡이(상) - (글 : 김왕석)

1929년 늦은 가을 홍학봉 포수는 발자국꾼 박문수와 같이 첫눈이 쌓인 강원도 가리왕산 북쪽 기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냥꾼들에게는 첫눈이란 자연이 준 가장 고마운 선물이었다. 눈위에 짐승들의 발자국들이 남게 되어 첫눈이 깔린 산을 돌아다녀보면 그곳에 어떤 짐승들이 살고 있다는 걸 뚜렷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여년 동안 짐승들의 발자국만 쫓아다닌 박영감은 이미 그곳에 노루·여우·오소리 등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날 정오께는 대여섯 마리 가량 되는 큼직한 멧돼지들의 발자국도 발견했다.

"이놈들은 이 근처 어디엔가 살고 있어."
박영감은 그 발자국들을 추적하다가 얼마 안가서 멈췄다. 새로운 짐승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홍포수, 빨리 와 봐."
홍포수도 그 발자국을 보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건 발굽을 가진 짐승의 발자국었다. 노루나 산양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사슴의 발자국, 그것도 말만큼이나 큰것이었다.

사슴은 예부터 한국의 사냥꾼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냥감이었으며 녹용은 호피보다도 더 비싼 귀중품이었다.
그러나 산간지대의 사람들은 옛날부터 사슴만 발견하면 덮어놓고 추적, 남획을 한 탓에 사슴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 1920년 후에는 강원도는 물론 함경도에서도 사슴의 모습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사슴이 틀림없지."
홍포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난 이 발자국을 따라갈테니, 자넨 대관령에 가서 곰보를 데리고 와."

곰보란 대관령에 사는 몰이꾼 박원유를 지칭한 건데 그는 박영감과 같이 사슴잡이의 명수였다. 그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까닭은 사슴을 사로잡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만주에 사냥꾼이 많다고는 하지만 사슴을 사로잡는 건 그들 뿐이었다.
그래서 홍포수는 곰보를 불러 그 사슴을 사로잡기로 결심했다. 사실 녹용의 원료가 되는 새뿔이 솟아나는 초여름이면 몰라도 겨울이면 뿔이 다 자라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슴을 죽여서 잡는다는 건 무의미한 살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슴을 사로잡으면 양축장에서 사육하여 매년 녹용을 얻을 수가 있어 큰 돈벌이가 되었다.
그런데 총으로도 잡기 어려운 사슴을 어떻게 사로잡는다는 것일까 ? 그들은 그 비법을 옛 사냥꾼들로부터 전수받아 이미 한국과 만주 등에서 열 여섯 마리의 사슴을 사로잡았었다.

홍포수가 박영감을 보내 곰보 원유를 데려오라고 한 건 곰보가 없으면 사슴을 사로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슴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일은 박영감이 잘했지만, 막판에 사슴을 몰아 줄을 던져 산채로 사로잡는 일은 곰보만이 할 수 있었다.

홍포수는 박영감을 보낸 다음 천천히 사슴의 발자국을 추적하면서 박영감과 곰보가 뒤따라오기 쉽도록 나뭇가지에 헝겊을 묶어 놓았다.

사슴이 발견된 그 일대는 옛날부터 사슴들이 서식했던 곳이었다. 산림이 울창했고 주위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어 삼림 속은 언제나 어두웠고 조용했다.

사슴들은 그 속에서 은자(隱者)처럼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짐승이라 밤에만 먹이를 찾아 돌아다녔을 뿐 낮에는 깊은 숲속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슴은 그곳에 있는 한 위험은 없었다. 최대의 천적인 표범도 그곳에 들어오려면 먼저 사슴의 눈에 띄게 돼 있어 기습을 하지 못했다.

기습을 한다면 몰라도 바람을 가르며 비약하는 사슴의 발을 표범은 따를 수가 없다. 순발력이 좋은 표범은 얼마간은 사슴을 추격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 뒤따라가다간 곧 숨이 차고 힘이 빠져 주저앉아 버리곤 했다.

그러나 사슴들의 위험은 내부에 있었다. 온 산이 단풍으로 붉게 물들고 낙엽들이 쌓이는 늦가을이 되면 사슴들은 짝을 찾아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적들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었다.
짝을 찾아 낮에도 돌아다닌다거나 때로는 살던 곳을 떠날 때가 그들에게는 큰 위기였다.

범이나 표범·늑대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사슴들이 잡힐 때는 바로 그런 때였고 그래서 강원도 사슴들의 사냥은 목숨을 건 모험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사슴이 살고 있었으며 홍포수는 그 사슴을 과부 보쌈하듯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게 사로잡으려고 조용히 발자국을 추적하고 있었다.

홍포수는 그날 하오 늦게 사슴이 숨어 있던 곳을 발견했으나 사슴은 이미 추적을 눈치채고 도망가고 있었다. 사슴은 백두대간과 연결되는 동쪽으로 뛰고 있었으나 실망할 건 없었다. 그건 예상했던 일이고 어차피 사슴사로잡이는 장기간에 걸친 인내의 싸움이었으니까….

홍포수는 그날밤 인근에 있던 동굴에서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부터 추적을 시작했다. 홍포수가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사슴은 깡충깡충 뛰어 멀찌감치 도망가 버렸으나 그것도 염려할 게 못됐다.

사슴에게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어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홍포수가 예상했던 대로 사슴은 10리쯤 떨어진 곳에서 쉬고 있었다. 위험이 사라지면 다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홍포수가 계속 따라오는 걸 알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홍포수는 쉬지 않고 사슴은 10리쯤 뛰다가 쉬고 그리고는 다시 뛰었다. 그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같은 것이었는데 홍포수는 일부러 천천히 추적을 하고 있었다.

홍포수가 둘째날 아침, 바위틈에 마련한 잠자리에서 나왔을 땐 박영감과 곰보가 나타났다. 홍포수는 그 꼴들을 보고 웃었다.

곰보는 둘둘 만 줄을 어깨에 메고 양 허리엔 꽹과리와 나팔을 차고 있었으며, 박영감은 어깨엔 이불짐을, 등엔 쌀자루를 메고 허리엔 도끼와 냄비 등을 차고 있었다. 잘 봐주면 광대나 유랑민이었고 잘못보면 거지였다.

그들은 밤새 달려왔다면서도 조금도 지친 기미가 없었고 곧 홍포수와 함께 추적을 시작했다.
사슴은 계속 동북쪽으로 달아나 오대산 서북쪽을 돌아 백두대간을 타고 도망가고 있었으나 그래도 뛰다가 멈춰 쉬는 버릇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하오부터는 얼마 뛰지 못하고 오래 쉬는 등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사슴과의 거리는 곧 단축되어 추적자들이 어느 구릉을 넘어섰을 때는 사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맨처음 사슴을 발견한 홍포수는 감짝 놀랐다.

홍포수는 그때까지 그 사슴이 함경도와 강원도 북쪽에 사는 미록( 麓)인줄만 알았다. 미록은 보통 적록(赤麓)이라고도 불리는 사슴이었는데 전신이 갈색이었으며 어떤 놈은 말만큼이나 컸다.

홍포수는 쫓고 있던 사슴이 그 거대한 발자국으로 봐서 미록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쪽 산기슭에 우뚝 선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사슴은 황갈색 바탕에 눈처럼 흰 무늬를 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매화록(梅花鹿)이었다.

매화록은 아무리 큰 수컷이라도 어깨까지의 높이가 넉자를 넘지 않는 중형 사슴이었으나 사슴 종류 중에서는 가장 귀중한 종류였다. 영약 녹용(鹿茸)아란 바로 매화록의 뿔을 말했으며 미록이나 다른 종류의 녹용은 이보다 값이 훨씬 헐했다.

그런데 그 매화록은 거의 미록과 같은 정도로 체구가 당당했고 세갈래의 거대한 뿔을 갖고 있었다.
그걸 본 곰보가 휘파람을 불면서 말했다.

"저놈은 트기야. 매화록과 미록 사이에서 태어난 트기야. 그렇지만 저놈의 몸에 나 있는 무늬가 저토록 선명한 걸로 보아 매화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덩치가 저렇게 크니까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다. 그 사슴은 더 없이 귀중한 매화록임에 틀림없었다.
추적하고 있는 사슴이 미록이 아니라 강원도 특산 매화록이라는 걸 알게 된 사냥꾼들의 사기는 갑자기 높아졌다. 그러나 기나긴 추적의 과정에서는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추적을 시작한 박영감이 창백한 얼굴로 홍포수를 돌아봤다. 사슴의 발자국 뒤에 다른 발자국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둥그런 꽃무늬의 발자국, 즉 표범의 발자국이었다.

표범이 사슴을 미행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곧 사슴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나쁜 놈 같으니…"
사슴을 가로채이게 된 곰보가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표범과 싸울 용기는 없었다. 그는 사슴은 잘 잡았으나 범이나 표범사냥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홍포수는 그에게는 계속 사슴 발자국을 따라가라고 지시하고 박영감에게는 사슴 발자국은 내버려두고 표범 발자국을 따라가라고 말했다. 박영감은 사슴뿐만 아니라 맹수사냥의 명수이기도 했다.

박영감은 표범 발자국은 불과 한 두 시간 전에 찍힌 것이며 빨리 뛰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곰보와 헤어진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표범을 뒤쫓았는데 표범은 능선을 타고 아래쪽 기슭을 걸어가는 사슴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빨리 가야 되겠어. 사슴을 덮치기 전에 놈을 잡아야 해."
연 사흘 동안이나 사슴을 추적했던 그들이었지만 그곳에서부터는 거의 뛰다시피했다.

그들이 산을 하나 넘어섰을 때 저쪽 산기슭 삼림 속을 힘없이 걸어가는 사슴의 모습만 보였을 뿐 표범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표범이란 놈은 은신술의 명수가 아닌가. 놈은 어딘가에 숨어서 사슴을 노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사냥꾼들은 거기서부터는 조심스럽게 추적을 했다. 그들이 어느 큰 바위를 돌아갔을 때 킥 하는 표범의 경고 소리가 들렸다. 저쪽 산중복에 있는 마른 풀 덤불 속에서였다.

- (하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