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불범 공포(상) - (글 : 김왕석)
그 불범(표범)은 어둠 속에서만 돌아다녔다. 깜깜한 어둠 속을 소리없이 돌아다니면서 벌써 세 사람을 덮쳐 끌고 갔다.
1926년 6월 경남 거창군 어느 산기슭에 있던 벌채 현장과 인근 산간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첫번째 희생자는 나무꾼이었다. 벌목 현장에 지어놓은 판자집에서 동료들과 잠을 자다가 설사가 났다면서 바깥으로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동료들이 뒤따라 나가보니 시뻘건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나흘 후에는 그곳에서 대여섯 마장쯤 떨어진 산간마을에서 열여덟살 난 처녀가 끌려갔다. 마을 한가운데 있던 집마당에 멍석을 깔고 잠자던 처녀가 없어졌고 멍석과 싸리문쪽과 골목길에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이 처녀가 두번째 희생자였다.
세번째는 벌목장에서 서쪽으로 20리쯤 떨어진 산길에서 일어났다. 산림감시원 두 사람이 총을 가진 순사(일본 순경)와 함께 손전등을 켜들고 순시를 하던 중 맨 뒤에 오던 감시원이 저쪽 숲속에 나무가 한 그루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앞서 가던 사람들은 그걸 보고 그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별안간 윽 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그 친구가 들고 있던 전등불빛이 꺼졌다. 두 사람이 그쪽으로 달려가보니 이미 감시원은 목줄이 끊어진 채 피를 쏟으면서 마지막 경련을 하고 있었다.
불범은 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음날 아침 산림감시소에 옮겨진 시체를 감정하던 의사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상처는 세 군데야. 양쪽 어깨엔 발톱 자국이 있고 목에는 이빨 자국이 있구먼. 놈은 갈고리 같은 두 개의 앞발로 양 어깨를 찍어 잡아당기면서 아가리로 목줄을 물어뜯은 것 같애. 여기를 봐. 꼭 가위로 잘라낸 것 같지 않아 ? 백정이 돼지를 잡을 때보다 더 빨리 사람을 해치웠어."
그 이후 거창 서쪽 일대에 사는 산간마을 사람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공포에 떨었고 불범은 그 어둠을 지배했다.
불범은 어둠 속에서만 돌아다녔으므로 아무도 그놈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산림감시원이 살해된 다음날 밤에 암살자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트럭 한 대가 벌목장으로 가고 있었다. 트럭은 도중에 고장이 나 그걸 수리하느라고 늦어져 산길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주위가 깜깜했다. 트럭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왼쪽 언덕 위에서 흙과 잔돌멩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그대로 차를 몰았는데 또 한차례 흙과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트럭 지붕 위뿐 아니라 유리창에도 흙과 잔돌이 날아왔다. 분명 누군가가 일부러 하는 짓 같았다.
"이상한데."
군대에서 막 제대한 일본인 운전사가 차를 세우고 시동을 걸 때 쓰는 쇠붙이를 들고 조수와 같이 바깥으로 나갔다. 주위는 죽은 듯이 조용했고 두 줄기의 헤드라이트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참 해괴한데…"
운전사가 다시 차에 오를 때였다. 저쪽 언덕 위에서 푸른 불빛은 일순간에 사라졌지만 웬지 불길하고 요사스럽게 느껴졌다.
"도깨비다. 또깨비…"
젊은 조수가 소리쳤다.
"바보같은 소리 말라."
일본인 운전기사는 핀잔을 주고는 다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얼마 안 가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았을 때 이번엔 운전기사가 소리쳤다.
"저건 뭐야…"
전방 30m쯤 되는 길 옆에 어떤 물체가 보였다. 헤드라이트는 바로 그 물체를 비추지는 못했으나 가까이 갈수록 물체의 모습이 점점 더 크게 드러나고 있었다.
색깔이 누르스름했다. 개보다 훨씬 큰 짐승이었다. 트럭이 앵앵거리면서 15m 앞까지 접근해도 짐승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르스름한 색깔에는 알록달록한 반점이 있었다.
"불범이다."
불범은 헤드라이트의 빛을 받으면서도 길 옆 숲속에 도사려 앉은채 정말 도깨비처럼 요사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담한 운전기사도 공포감을 느꼈으나 그래도 그는 트럭을 무서운 힘으로 몰아붙였다.
'저놈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운전기사는 엑셀레이터를 밟았고 트럭은 표범에게 덮쳐들었다.
표범은 물러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길 한가운데로 나섰다.
8m, 6m, 4m - 표범의 몸이 점점 크게 부풀어올라 대호처럼 크게 보였다. 불똥을 튕기는 듯한 눈빛, 딱 벌린 아가리, 그리고 수천개의 시계 태엽이 한꺼번에 끊어지는 듯한 컥 ! 하는 노호 소리 - 운전기사는 머리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공포 속에서 핸들을 표범쪽으로 틀면서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죽어라 이놈아…"
그 순간 알록달록한 물체가 비조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트럭 왼쪽 유리창 옆으로 스쳐지나갔고 차체가 심한 충격으로 흔들리면서 끼익하고 강철판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운전기사는 그때 트럭이 뒤집어지든지 크게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으나 다행히 트럭은 계속 달리면서 언덕을 넘어섰다, 그리고 언덕 저쪽 밑에 불빛이 보이는 벌목 현장 사무소로 미친듯이 돌진했다. 운전기사는 트럭이 현장사무소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표범이 뛰어들어올 것같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사색이 되어 트럭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트럭을 조사해 보니 앞쪽 차창 위의 강판이 오그라든 채 기다랗고 깊은 두 줄의 금이 가 았었으며 금 끝부분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표범이 앞발로 강판을 후려치며 할퀸 자국이었다. 핏자국은 표범이 공격할 때 스스로 입은 상처에서 나온 듯했다.
트럭을 습격한 표범, 총을 가진 사람들을 덮친 표범 - 경남도청은 황급히 대책을 세웠다. 우선 표범이 출몰하는 인근 산에 있던 벌목장들을 폐쇄시켰고 산간마을 주민들에게는 밤중에 바깥 나들이를 못하도록 하고 마을단위로 야경대를 조직, 밤새 마을을 지키기로 했다.
경남도청은 또 현지에 표범을 잡을 포수들을 파견했다. 포수단은 부산에 살던 일본인 포수 두 사람과 현지 포수 두 사람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장인 미우라는 전에 줄범(대호)을 잡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미우라 포수 일행은 즉시 표범의 발자국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 여름이어서 발자국 추적은 어려웠다. 그들은 새벽부터 전날밤에 찍힌 표범 발자국을 추적했으나 고무처럼 부드러운 표범 발에 밟힌 풀들은 아침 이슬을 맞은 뒤 이내 일어났기 때문에 뚜렷한 자국이 남지 않았다.
포수들은 그래도 돋보기까지 써가면서 발자국을 추적했으나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버렸다.
그때 표범은 또 다른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밤엔 쉬고 낮에만 추적하는 포수들과는 정반대로 표범은 낮엔 쉬고 밤에 날뛰었다. 이렇게 나흘이 지났을 때 포수 일행이 발견한 것은 피비린내 나는 또 하나의 살육현장이었다.
네 번째의 희생자는 이웃 마을의 잔치집에 갔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던 노인이었다. 현장에는 갈비뼈들과 머리부분만 남아 뒹굴고 있었다. 발자국을 조사한 결과 표범은 200m나 떨어진 산능선을 타고 가다가 곧바로 노인을 덮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어둠 속에서 어떻게 노인을 발견했을까 ?
밤의 살육자는 어둠을 뚫어보는 눈,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도 놓지지 않는 귀, 사람 냄새에 익숙해진 코를 갖고 있었다.
"이런 못된 놈이…"
사냥꾼들은 이를 갈면서 추적을 계속했으나 일주일 동안 헛수고만 한 끝에 표범사냥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비가 많이 내려 발자국을 추적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남도 당국은 그 살육자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도당국은 곧 총독부에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며 총독부는 즉시 총독부 촉탁엽사인 홍학봉(洪學奉)에게 거창 살인표범을 사냥토록 명령했다.
홍학봉은 '천리안(千里眼) 학봉이', '무쇠다리 학봉이'하는 별명을 가진 직업포수로 이미 표범 10마리를 잡은 맹수전문 포수였다.
그같이 용맹스럽고 뛰어난 그도 총독부의 명령을 전한 기무라 사무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보고서를 통해 그 사냥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름철의 표범, 그것도 사람고기 맛을 안 표범, 낮엔 숨어있다가 밤에만 설치는 암흑속의 폭군이 아닌가.
홍포수는 일당 외에도 살인표범을 잡았을 경우엔 3백원의 포상금을 받고 박문수 영감을 조수로 데리고 간다는 조건으로 살인표범 사냥을 승낙했다. 박영감은 노련한 발자국꾼으로 홍포수의 오랜 사냥짝이었으며 모든 사냥 준비를 맡아했다.
그러나 문제는 불범과 싸울 총이었다.
홍포수는 그날밤 곰곰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맹수사냥에 늘 사용하던 라이플 대신에 쇼트건(산탄총)을 갖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라이플은 가늘고 긴 총신 내부에 나선형(螺旋形) 홈통이 나 있어 탄환은 나선 홈통을 따라 회전을 하면서 날아간다.
그래서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총이었다. 홍포수가 그 라이플 대신에 산탄총을 갖고 가기로 한 것은 상대가 가까운 거리에서 갑자기 기습을 해오는 맹수였기 때문이었다.
산탄총은 사정거리가 짧고 관통력이 약하다는 단점은 있으나 그 대신 라이플과는 달리 여러 발의 작은 총탄이 한꺼번에 퍼져나간다는 장점이 있어 날으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총이었다. 홍포수는 날으는 새처럼 민첩한 불범에 대비, 산탄총을 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때 홍포수가 택한 산탄총은 벨기에제 브라우닝 5연발이었다. 발사 때 생기는 가스의 압력으로 다음 장탄이 자동적으로 되는 우수한 총이었으나 다만 복잡한 구조 때문에 고장이 가끔 일어난다는 흠이 있었다. 홍포수는 그점을 감안, 자기의 손때가 묻은 총을 다시 한번 정비했다.
홍포수와 박영감이 현지에 도착하자 그곳 군수와 미우라 포수 등 일본인 포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우라 포수는 홍포수가 라이플이 아닌 산탄총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갸우뚱했다.
미우라 포수는 인사가 끝나자 표범이 출몰하는 지역의 지도를 펴놓고 표범을 잡을 작전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으나 홍포수는 쌀쌀하게 잘라 말했다.
"난 작전계획 따위를 세워놓고 사냥을 하진 않아요. 그리고 사냥을 하면서 누구의 지시도 받지도 않고…"
순간 미우라 포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미리 총독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군수는 이번 사냥은 홍포수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 (하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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