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불범 공포(하) - (글 :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부산의 일본인 포수단이 장마로 추적을 포기했던 일주일 동안에 불범은 두번이나 산간마을을 넘보았으나 야경대들이 밤새 불을 피워놓고 꽹가리를 치면서 마을 경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불범은 홍포수가 현지에 도착한 바로 전날에도 다른 마을에 침입했으나 어느 집의 담을 넘으려던 표범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달아나버렸다.
그때 표범은 돼지우리 앞을 지나가면서도 돼지에게는 덮치지 않았는데 그건 표범이 사람을 노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람의 고기는 다른 짐승 고기보다는 훨씬 연하고 염분이 많았으며 그걸 먹은 짐승은 으례 마취상태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한다. 또 사람의 고기에는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 그걸 먹은 짐승은 계속 그것만을 먹으려 한다고도 했다.
홍포수는 다음날 새벽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표범이 이틀 전에 나타났던 마을에서부터 발자국 추적을 시작했다. 부산에서 온 일본인 아마추어 포수들은 간이천막을 비롯한 거추장스러운 장비들과 통조림 등 잡다한 식량을 갖고 추적했으나 경성에서 온 직업포수들은 총·전등·우비 그리고 약간의 미싯가루와 마른 고기 외에는 별로 가지고 가는 것이 없었으며, 다만 물기나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우비 속에 총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야수를 잡으려면 야수처럼 행동해야 하며 포수는 그러한 고통쯤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홍포수의 생각이었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중에도 박영감은 착실하게 발자국 추적을 시작했다. 부산포수들이 발자국을 일일이 보면서 추적하는데 비해 박영감은 표범이 가고 있는 방향을 잡고 추적하면서 간혹 발자국으로 그 방향을 확인하기도 했다.
경성에서 내려온 직업포수들은 마른 고기를 질근질근 씹어가면서 쉬지 않고 추적을 하고 있었으나 결코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동굴 바위밑 등 아무데서나 우비를 덮고 잠을 잤고 날이 밝으면 이내 추적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추적 사흘만에 사냥을 마무리지을 수 있는 중대한 계기를 잡았다. 표범이 사냥해 온 다섯번째의 희생자를 뜯어먹은 현장을 발견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밤중 사냥에 거듭 실패했던 표범은 그날 새벽 날이 밝은 후에야 안심하고 밭으로 나왔던 농부를 덮쳐 끌고 간 것이었다.
희생자는 비대한 장골이어서 표범은 시체의 내장과 하체 일부만을 뜯어먹은뒤 나머지는 나뭇가지와 잡풀로 덮어놓았다.
사냥꾼들은 계곡에 있던 시체를 산중턱에서 발견했으나 홍포수는 가까이 가려는 박영감의 어깨를 꽉 잡았다.
"가까이 가면 안돼 !"
어깨를 잡힌 박영감은 의아스러운 눈으로 홍포수를 쳐다봤다. 날카로운 빛을 내고 있는 눈, 꽉 다문 입, 그리고 창백한 낯빛, 오래도록 그와 같이 사냥을 해왔던 박영감은 홍포수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금방 간파하고 소스라쳤다.
"미쳤어. 그따위 짓을 하려고 ! 안돼, 절대로 안돼."
홍포수는 표범이 남겨놓은 먹이를 다시 뜯어먹으려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인근에 잠복해 있다가 표범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선 안되고, 할 수도 없는 이유가 두 가지나 있었다.
"아니, 그놈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싸우려는 건가. 귀도 코도 시원찮은데다 눈까지 까막눈이 된 사람이 밤중에 표범과 싸우겠다는 말이야. 미친소리 하지 마."
"전등이 있지 않나. 전등을 총신에 묶어두었다가 불을 켜면서 쏘는거야."
"그전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텐데."
"비가 내리고 있어. 그리고 우리는 시체 옆에 가지도 않았으니 불범은 우리의 발자국이나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저기 저쯤에 땅을 파고 숨어 있으면 표범을 속일 수 있어. 밤에만 나타나는 표범과 밤이 아니면 언제 싸울 수 있겠나. 한판 하는거야. 잡으면 포상금의 반을 자네에게 줄께."
맹수 사냥꾼이란 어차피 목숨 따위는 내던져놓은 사람이었으니 한판 벌이자는데 굳이 반대하겠는가. 더구나 150원의 포상금을 타게 되면 술빚 따위는 갚고도 남을 게 아닌가.
그러나 또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사람의 시체를 미끼로 써야 된다는 점이었다."
"너나 나나 양반은 아니지만 그건 안돼. 저 시신은 지금 당장 마을로 옮겨가야 돼."
"표범은 어떻게 하고 ? 다섯 명의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또 무수한 사람을 죽일 살인마를 그대로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놈은 잡아야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은 잡아야 돼.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 앞으로 죽을 사람들을 살려야 돼 !"
홍포수의 얼굴에 광기가 서리고 있었다. 살인표범을 기어이 잡겠다는 사냥꾼의 본능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렇게 되면 홍포수의 고집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는 걸 박영감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미친 놈 같으니…"
그러나 광기는 박영감에게도 전염되었다.
두 사람은 나뭇잎으로 빗자루를 만들어 자기들의 발자국을 지워가면서 후퇴를 한 다음 멀리 돌아서 잠복소를 만들 곳을 정했다.
"자, 일을 시작하지."
그건 박영감의 일이었으며 그가 그런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홍포수가 받기로 한 포상금의 반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연장은 늘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자그마한 손도끼였는데 박영감은 그걸로 무슨 일이든 다 해냈고 때로는 그걸 무기로 쓰기도 했다.
박영감은 우선 나무를 잘라 괭이와 삽을 만들었다. 그리고 홍포수가 그걸로 땅을 파는 사이에 움바닥에 깔 바닥판을 짜고 지붕을 만들었다.
움집은 날이 어둡기 전에 완성되었는데 바깥에서 보기에는 여기저기에 있는 덤불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움은 두 사람이 들어가 앉아있을 정도의 깊이와 넓이였으며 머리를 들면 지붕에 뚫어놓은 총구멍을 통해 사람의 시신이 있는 곳이 보였다.
"됐어. 이젠 기다리는 일 뿐이야."
두 사람은 오래도록 기다렸다. 홍포수는 총신에다 전등을 묶어놓고 신주 모시듯 꼭 끼어안고 있었고 박영감은 앉은 자세로 졸고 있었다.
자정이 훨씬 넘은 것 같았고 가랑비가 멎은 듯 모기떼들이 몰려들었다.
홍포수는 모기에 물리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았으나 저쪽 시신에서 풍겨나오는 비린내가 역겨워 견디기 어려웠다. 또 사람의 시신을 미끼로 쓴다는 자책감도 괴로웠다.
그러나 만물이 영장인 사람의 피와 고기만을 먹고 사는 그놈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죽여야 할 게 아니겠는가.
그때 박영감이 코를 골기 시작하자 홍포수가 그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쉿…"
바깥에서 소리가 났다. 들릴까 말까 하는 소리, 고무처럼 부드러운 발바닥이 풀을 밟는 소리였다.
놈이 온다. 드디어 놈이 먹다 남겨둔 사람의 고기를 마저 먹으려고 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건 놈이 바로 움쪽으로 오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홍포수는 습기를 막으려고 가슴에 품고 있던 총을 슬며시 들어올리며 바짝 긴장했다. 만약 놈이 움을 발견하거나 사람 냄새를 맡게 되면 총을 쏘기 전에 놈의 이빨과 발톱이 먼저 자신과 박영감을 찢어놓을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발자국 소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놈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놈은 움 바로 옆을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발자국 소리가 멎었다. 놈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주위를 살피는 게 분명했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박영감의 기가 막힌 솜씨 덕분에 그렇게 날카로운 눈과 코를 가진 불범이 바로 옆으로 지나가면서도 움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냐. 이젠 네놈이 당할 차례다."
뭣인가 질질 끌고가는 소리가 나고 시신의 냄새가 더욱 역겹게 풍겼다. 놈이 시신을 뒤집고 있는게 분명했다.
홍포수는 총구를 지붕에 뚫린 구멍 사이로 내밀었다. 그리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순간 달칵하는 그 금속성의 소리를 놈이 들었는지 시신 근처에서 나던 소리들이 딱 끊어졌다.
놈이 눈치를 챈 것일까. 아니었다. 소리가 또 들렸다. 이번에는 찌지직하며 살을 찢는 둣한 소리와 이빨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도 났다. 살인표범이 한밤중에 밤참을 드는 소리였다.
"이 새끼…"
전등이 켜졌다. 깜깜한 어둠을 찢는 한줄기 빛 속에 두 개의 물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표범의 대가리와 사람의 머리 -. 표범은 입을 딱 벌린 채 사람의 머리를 물고 있었다. 표범은 갑작스러운 불빛에 당황하다가 곧 노기를 띄었다.
감히 어느 놈이 내가 지배하는 어둠의 왕국에 침입을 했느냐. 놈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수 백개의 시계 태엽이 한꺼번에 끊어지는 듯한 엄청난 소리였다.
홍포수는 놈이 그 불빛에서 벗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산탄총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삼림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열 서너 개의 납덩이들이 날아갔다. 놈은 상처를 입고 고통과 분노에 길길이 뛰어올랐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놈은 자기를 해친 적을 찾느라 미친 둣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 홍포수가 움의 지붕을 걷어치우고 뛰어나왔다. 그리고 전등빛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다 방금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도약하는 놈의 모습을 잡았다.
불과 서너 발 거리였다. 놈은 그대로 홍포수의 머리를 덮칠 참이었다. 놈을 겨냥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때 홍포수가 한 것은 스냅샷(이동속사), 총신을 이동시키면서 날으는 새를 쏘는 사격법이었다.
마침 홍포수가 산탄총을 갖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총탄이 한발 밖에 나가지 않는 라이플이었다면 스냅샷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홍포수가 쏜 총탄들은 표범의 머리를 벌집으로 만들어놓았다. 표범은 마치 보릿자루처럼 홍포수의 발 밑에 떨어졌다. 치명상이었다.
"학봉이, 학봉이 살아 있나 ?"
그때 움 속에서 박영감이 기어나왔다. 홍포수는 살아 있었다. 총을 왼손으로 거머쥔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불범은 어떻게 됐어 ?"
전등빛이 불범을 비췄다. 살인표범이 마지막 경련을 하고 있었다. 그 화사한 얼룩무늬의 털가죽엔 붉은 피가 흥건했다.
"이 새끼…"
박영감이 죽어가는 표범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 (끝) -
◎ 참고 : 등장인물 홍학봉(洪學奉) 포수 약력
1901 ∼ 1976
경기도 출생
조선총독부 촉탁엽사, 영국 왕실박물관 전속엽사.
해방 후 올림픽 사격선수 지도원
강원도의 매화록(梅花鹿)을 만주의 광야까지 추격 포승줄로 사로잡은 포수
포수들 간에 불려진 별명 : '무쇠다리' '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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