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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

선인들의 해학 - 고금소총(古今笑叢) - 제75화

by 박달령 2007. 10. 20.

♥ 늙은 도적의 속임수 (老賊之術)

기축년(己丑年)에 국상(國喪)을 맞아 이원(梨園 ; 기생집)을 혁파하자 진주 기생 6 - 7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안포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때 김해(金海) 땅에 허생(許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또한 고향으로 가다가 같은 역에서 묵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허생이 기생들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산이 깊고 나무가 무성하고 마을이 드무니 옛날부터 도적이 잘 드나드는 곳이다. 이전에 내가 우후(虞侯) 벼슬로 합포(合浦)에 부임하다가 우연히 여기서 묵게 되었는데, 강도 수십명이 몰려와서 창으로 위협하여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 도둑의 괴수를 죽이자 적의 무리들이 드디어 흩어져 갔다. 여기는 도둑이 아니면 호랑이 먹이가 될 염려가 많은 곳이며, 요즈음에 와서는 그 살아남은 도적들이 번창하여 행인은 몸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오늘 어디서 죽게 될지 모르겠다."

하니 기생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밤 이경(二更 : 21시경)에 허생이 하인으로 하여금 어지럽게 대문을 두드려 치게 하여 도적이 약탈하러 온 것처럼 하자 여러 기생들이 급히 달려들어 허생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혹은 만류하기도 하는데, 허생이 말하기를,

"옛부터 대장부가 쉽사리 아녀자 때문에 몸을 망치는 일이 많다. 너희들이 나를 망치려고 하느냐 ! 그러나 이른바 장부 된 이유는 능히 사람의 급한 일을 선뜻 도와주고 사람의 재난을 막아주는 것이다. 늙은 내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너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고 여러 기생들을 방마다 따로 숨게 하고 뜰 가운데 나가 큰 소리로,
"나는 옛날에 너희들의 괴수놈을 한 칼에 죽인 허장군이시다. 지난해에는 동으로 이시애(李施愛)를 쳐서 공이 제일이요, 겨울에 또한 서쪽으로 쳐 나가 이만주(李萬柱)를 베었으니 또한 공이 일급이라. 벼슬도 올라 첨지중추(僉知中樞)를 받았다. 너희들 쥐와 같은 무리를 어찌 이빨틈에 끼워 두겠는가. 적대하려면 감히 와서 싸울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라 !" 하고 일갈하니 얼마 후에,

"도적들이 황급히 물러갔습니다." 하는 하인의 보고가 있었다.

이에 허생이 말하기를,
"도적의 꾀는 예측하기 어려우니 물러서지 말고 밤새워 경계를 철저히 하고 막을 방책을 세우라." 하니, 기생들이 몸을 숨긴채 감히 나와서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그제야 허생이 방마다 돌아다니면서 두루두루 하나도 빠짐없이 기생들을 품어 안다보니 그 사이에 날이 밝았다.

이 때에 여러 기생들이 허생이 떠나는 모양을 보니 야윈 말 위에 말고삐잡이 하인놈 하나 뿐이고 허생의 머리는 백발인데다 밤새 여러 기생들을 품은지라 몰골은 수척하였다.
기생들이 서로 돌아보고 놀래면서,
"우리들이 바로 저 늙은 도적의 속임수에 빠졌지 뭐냐 !" 하고 투덜거리며 탄식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