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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 종주기[제6회](나)<개머리재-화령재>

by 박달령 2007. 10. 15.

◎ 백두대간 종주기 [제6회] (나)


○ 단기 4334년(2001) 10월 21일 (일) 오전 흐림, 오후 12 : 30경부터 비 (제14일)
-  금일 산행구간 : 개머리재 약 1. 5 Km 못미쳐 농로 고개 → 화령재

 

01 : 30  밤중에 잠이 깨다. 
물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 다시 취침

 

05 : 30  기상.
어제 밤 열차에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늦게 일어났다.
면도, 세수.  054 - 131을 호출하여 일기예보를 청취하니 오늘 오후에 한때 비가 오겠다고 한다.

일기예보가 적중하지 않기를 빌면서 출발하기로 하다.  아침 식사는 산행하다 해결하기로 하다.

 

어제의 하산지점인 그 농로로 갈까 하다가 택시가 들어갈 수 없을것 같아 개머리재로 바로 가서 지난

번 소사고개에서 삼봉산 갈림길까지 역주행하여 보충수업 하던 그 방법으로 산행을 하기로 결정하다.

 

06 : 30  어제 저녁의 화동면 개인택시 박용운씨 호출 화동면 출발.
택시를 기다리며 하늘을 보니 구름이 약간 끼어있고 선선한 날씨다.
여관 마당가의 수돗물로 식수를 준비하다.
가는 도중 시내에서 참치 통조림 2개, 양갱 6개, 소주 1병 구입

 

07 : 00  개머리재 도착. (택시비 10,000원)
개머리재는 포장이 안된 구간이 상당히 길다.
어제 하산하였던 지도상에 없는 농로 고개로 보충수업을 위해 약 1. 5 Km 남진하니 어제의 그 농로 고

갯길이 나온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야산이나 과수원 근처에서 표지기가 애매하게 걸려 있어 길 찾기가 힘든 구간이어

서 잘못 걸린 표지기를 떼어 다시 걸면서 나아갔다.

 

07 : 30  어제 저녁 개머리재로 오인한 농로 고개 도착
비닐로 된 표지기 2개를 돌려 매달고 뒷면에 경고문을 매직펜으로 써 서 잘 보이는 나뭇가지에 매달다.


[경고문 내용] 주의. 이곳은 개머리재가 아님. 약 1. 5 Km 진행 요망.

경고문을 매달은 후 길가에서 라면에 누룽지를 같이 넣고 끓여 참치 통조림 1개로 소주 반주하여 아침

식사를 하다.

 

08 : 30  농로 고개 출발
왔던 길로 되짚어 다시 개머리재로 가다.

 

09 : 00  개머리재 도착. 
길에서 약 200여 미터 걸어 권상수씨 댁으로 가니 집의 규모는 큰데 아무도 인기척이 없고, 뒤편의 개

사육장 철망 안에서 수백 마리는 됨직한 개들이 짖어댄다. 개 사육장 앞의 수도를 틀어 식수를 보충하

고 다시 개머리재로 나오다.

 

내가 방금 지나온 길로 대간 종주객 30대 후반의 남자 둘이 걸어온다.
인사 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니 6명 일행 중 자신들이 먼저 왔는데 내가 아까 그 농로 고개에 써

붙인 표지기의 경고문은 못 봤다 한다.  그들은 어제 밤중에 신의터재에 주차를 하고 택시로 큰재까지

가서 새벽 01 : 00경에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 중이라 한다.
그렇다면 큰재에서 개머리재까지 8시간이 걸린 것이다.

 

09 : 20  개머리재 출발

 

10 : 20  지기재 도착.
휴식 중 6인의 종주객 일행과 대화하니 뒤에 온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개머리재로 착각한 농로에 써서

매달은 경고문을 보았다 한다.

 

10 : 30  지기재 출발
출발하자 마자 조금 가서 나타나는 농로를 따라 가다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후진하면

서 살펴 표지기를 찾아내어 대간길에 접어든다.

 

한참 가다 넓은 바위비탈을 올라 봉우리 하나를 넘어 능선길을 따르다가 대간길은 갑자기 논 가운데로

나 있는 보통의 논둑보다 넓으면서 약간 높은 논둑길을 약 200여미터 가량 지나게 된다.  이 논둑을 경

계로 하여 좌측 논에 내린 빗물은 금강으로, 우측 논에 내린 빗물은 낙동강으로 흐를 것이다.

 

논둑 길을 지나서 여러 기의 묘지가 있는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니, 지난 추석에 묘지 벌초를 하면서, 묘

에 그늘이 져서 잔디 생육에 지장이 있으니까 베어서 쓰러트린 것으로 보이는 2 - 30년생 소나무와 잡

목 수십 그루가 대간길로 쓰러져 길을 막고 있어 우측 급경사 비탈로 우회하려니 힘이 든다.  베어진 나

무를 보니 안타깝다.

 

뒤에 오던 대간 종주객 일행이 나와 거의 같은 속도로 앞서 가던 일행에게 길을 못 찾겠다고 휴대전화

로 연락하는 모양이다.  전화를 받으면서 내 뒤로 쳐져 버린다.

 

11 : 50  신의터재(280) 도착
외제로 보이는  커다란 지프차 한대가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행하는 6명의 종주객들이

세워놓은 차인 것이 분명하다.

 

돌로 세운 해발 280미터 신의터재 표석 주변은 상당히 넓게 잔디로 공원처럼 조성하여 놓았다.

잔디밭에 아까 대간 종주객 6인 일행중 맨 먼저 속보로 내달린 남자 한사람이 이미 도착하여 신발과

양말을 벗어 젖히고 양 손가락으로 발가락 사이의 때를 열심히 문지르고 밀어 털어 내가며 휴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공연히 칙살맞은 생각이 들어 구토가 날것 같다.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하고 있으려니 뒤따라온 일행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여기 신의터재까지가 오늘의 목표지점이라 귀가한다고 한다.

 

12 : 00  6인의 대간 종주객 일행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신의터재 출발.
얼마 가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12 : 30  아주 굵은 빗방울은 아니나 빗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판초우의를 꺼내어 입으니 비는 점점 더 거세어진다.

 

13 : 00 비가 많이 내려 점심을 끓여 먹을 데가 마땅치 않은데 고개 하나를 넘어 완만한 내리막길을

지나 안부에 도달하니 좌측으로 희미한 농로가 보이고 포도넝쿨 위로 비닐막을 씌운 넓은 포도밭이

나온다.


마을에서 뚝 떨어진 이 정도 넓이의 포도밭이면 포도농사를 위하여 비바람을 피할 조그만 농막 정도

는 지어 놓았겠지 하는 직감에 포도밭 옆의 농로로 내려서서 200여 미터 정도의 길을 따라가니 10여

평은 됨직한 비닐하우스에 보온덮개 천으로 지붕을 덮어씌운 농막이 나타난다.

 

그 50여 미터 아래에 소형 트럭을 대놓고 농사일을 하는 40대 부부가 보이기에 다가가서 농막에서 잠

시 비를 피하여 쉬어가기를 청하니 갈때에 문만 꼭 닫아 잠가주고 가라 한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철

사로 비끌어 맨 농막 문을 끄르고 문을 받쳐놓은 시멘트블록을 밀치고 들어가니 실내는 제법 큰 흙바

닥에 3평 정도의 마루가 한쪽 편에 깔려 있다.  그리고 찬장과 취사도구, 그릇 등이 있다.

 

배낭을 풀어 라면에 누룽지를 넣고 끓여 참치통조림 1개와 소주 반주로 점심식사 후 휴식을 취하니

아주 그치지는 않았으나 빗줄기가 상당히 가늘어진 것 같아 출발하기로 하다.

 

14 : 00  농막 출발
비는 처량하게 내리는데 대간 표지기는 끊어질듯 하다가는 이어지고, 이어지는 듯 하다가는 끊어졌다

또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약 두시간 정도 걸어 윤지미산 못 미친 곳에 이르니 비가 그친다.

물을 마시며 휴식 후 판초우의를 벗어 배낭에 넣고 출발하다.

 

16 : 10  윤지미산(538)을 통과하여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니 잡목의 저항이 센 야산길이 나타나 나

뭇잎에 빗방울이 맺혀있어 비닐 앞치마를 꺼내서 허리에 둘러 하반신을 가리고 출발하니 잡목이 키가

서 양어깨로도 빗방울이 떨어져 상체가 젖으므로 판초우의를 꺼내어 목도리처럼 양 어깨와 배낭을

감싸고 진행하다.

 

길은 오르내림이 별로 없이 평탄하다.
화령재가 가까워지니 길가에 "도로"라고 페인트로 쓴 나무 말뚝이 몇 개 보이는 걸로 보아 도로를 새로

내려고 하는 것 같다.

 

17 : 40  화령재 도착
윤지미산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빗물방울이 맺힌 잡목의 저항으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화령재를 넘나

드는 자동차가 가끔 지나간다.

 

길 건너 팔각정이 보이는 화령재 광장으로 가니 길가 나무에 매달린 대간 표지기는 광장 마당 서쪽 끝

에서 서편 숲속으로 매달려 있다.


오늘은 이곳에서 마감하고 내일 북진할 대간 들머리를 찾기 위하여 광장 마당 끝 서쪽 숲으로 올라서

도로 확장공사를 위하여서인지 30 - 40년 생 키가 큰 참나무를 무수히 베어서 쓰러뜨려 놓았다.

쓰러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대간 표지기를 따라 몇 걸음 가니 표지기도 안보이고 길도 안 보인다.

 

쓰러진 나무를 어렵게 타넘으면서 약 50분을 헤매었으나 들머리를 찾지 못하고 날은 저물어온다.

대간 들머리 길 찾기에 실패하다.  산림파괴로 대간길을 찾지 못하도록 만든 자들에 대하여 욕지거리

나온다.

 

18 : 10  다시 광장 마당으로 되돌아 나오다.
054 - 114에 상주시 화서면 개인택시도 좋고 일반택시도 좋으니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화서

면에는 전화번호에 등록된 택시는 없다고 대답한다.  하도 황당해서 눈앞이 캄캄해진다.  

해는 져서 날은 저물어 사방은 어두워지는 데다 그쳤던 비는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화서면에 택시

전화번호가 등록된 게 없다니 이 무인지경의 화령재 광장에서 어쩌란 말인가 ?

 

다시 054 - 114에 전화를 하여 분명히 상주시 화서면이 지도상에 나타나 있고 지도를 보니  상주, 보

은, 추풍령이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인데 택시가 없을 리가 있느냐고 안내원에게 항의를 하였더니 전화

를 받는 여직원이 잠시 기다리라 하더니 옆자리의 다른 동료직원과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는 말소리가

들리고서 "그럼 화령 개인택시라도 가르켜 드릴까요 ?" 라고 말하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전화

번호를 러준다.

 

7- 화령 개인택시 : 한영수 씨 054 - 533 - 8160, 011 - 421 - 2611.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나서 다시 백두대간 지도를 보니 화서면 소재지 일대에 "화령전적비" "화령초

등교" "화령중고교" 등의 명칭이 보인다.


그래서 순간 직감적으로 아하 이곳을 화령재라고 부르니 화서면 소재지도 다른 이름으로 화령이라고

부르기도 하나보다 하고 감이 잡혀 택시를 호출하였더니 곧바로 달려와 승차를 하다.
한영수씨에게 물으니 화서면에 여관은 화령장여관 한 군데 뿐이란다.

 

18 : 30  화서면 소재지 화령장여관 도착. (택시비 4,000원, 여관비 20,000원)
제일식당에서 해장국(4,000원)으로 저녁식사후 김밥집을 물으니 "자매분식" 가는 길을 가르쳐 준다.

 

자매분식(054 - 531 - 3477, 533 - 0550)에 가서 김밥 2인분(6,000원)을 여관으로 배달 부탁하고

가게에 들러 초콜렛 2개, 소주 1병, 참치 통조림 2개 등 합계 6,000원어치의 물건을 구입 후 여관으로

돌아오면서 시가지 주위를 살피니 화령우체국, 화령공용버스터미널 등의 간판이 보이는 걸로 보아서

이곳을 화서라고 하지 않고 아예 화령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니 전화국 안내원이 화서면은 모르고 화령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겠다.  이는 마치 주민들이  경기

도 용인군의 내사면을 "원삼"으로, 외사면을 "백암"으로, 안성군의 이죽면을 "죽산"으로 호칭하여 행정

상 명칭과 사실상의 명칭이 달라 혼란을 일으켰던 사례와 같은 현상이다.  그래서 경기도에서는 7 - 8

년 전에 이미 "원삼면" "백암면" "죽산면" 등으로 내무부의 승인을 받아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였는데

이 곳은 아직도 변경을 하지 않았다.  여기도 "화령면"으로 변경을 하는 것이 좋겠다.

  

- (후에 나는 인터넷으로 상주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화령면으로 행정구역 명칭 변경이 필요함을 건

의하였더니, 상주시에서도 진즉에 변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있어 추진중이라는 답변을 받은 바 있다.)

 

화령장여관으로 돌아와 샤워 후 집의 처에게 전화를 하다.
낮에 비에 젖은 양말을 빨아 판초우의, 비닐 앞치마와 함께 옷걸이에 널어놓으니 김밥이 도착한다.

여관방에는 냉장고가 없어 주인 아주머니에게 내일아침 05 : 00경에 찾아 먹겠다고 말하고 냉장고에

관을 부탁하고 방으로 돌아오다.

 

 21 : 30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