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록(追憶錄)46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3회) [3] 강간죄로 체포 구금된 서교주 번영을 구가하던「용화왕국」에도 흥망성쇠라는 우주의 섭리에 의함인지 이 왕국을 와해시키는 계기가 되는 모반이 일어났으니 그 주인공들이 바로 서교주의 엽색행각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성화대의 여승들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이 꽃다운 나이의 여승들은 그들의 부모에 의하여 강제로 입산한 것이며 빠른 경우에는 10대 초반에도 입산을 시켰다 한다. 그리고 늦은 경우에는 고등교육을 받던 20대 초중반의 여인들도 입산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자발적으로 신앙심이 우러나서가 아니고 실연(失戀) 등의 이유에서였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여승들이었으니 어린 여승들도 점차 나이 들어 사춘기를 지나면서 춘정(春情)을 느끼기도 하고 이성적인 판단력도 가지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4회) [4] 서교주 암살사건 발생 서교주는 구속당하였다 석방된 후 표면적인 활동은 없었다. 종전처럼 교세확장을 위한 포교는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타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흐트러진 교세를 내부적으로 재정비 하는데 조용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약 1~2년 간은 이탈되고 남은 신도들만으로 용화교는 그럭저럭 현상은 유지해 나갔다. 그런데 마침내 서교주에게 인간세계와의 인연이 소멸되어버리는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서교주는 그 당시 전주 원각사에 기거하고 있던 중 계절이 초봄이었던 1966년 3월 22일 새벽 02 : 20경에 휴가를 나온 23세의『소윤하(본명 소재열)』라는 이름의 육군 병사가 휘두르는 군 전투용 대검(帶劍)에 찔려 숨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 병사는 피묻은 대검을 손에 든 ..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5회) [5] 서교주와 정치인들간의 거래 지금부터 말하려 하는 서교주와 정치인들 간에 모종의 거래관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세상에 공식적으로 공표 된 적은 없다. 다만 성화대 주위와 고향 마을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유언비어 비슷하게 떠도는 풍문을 얻어들은 것들이므로 사실과 부합..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6회) [6] 금산사를 수중에 넣으려 했던 서교주의 좌절 서교주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 불교의 1종파로 인정받아 떳떳하게 행세해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불교의 교리를 표절하였고, 용화교 내의 조직 구성이나 생활양식, 제반 의식 절차 등을 불교와 유사하게 행하던 집단의 교주인 그의 속마음은 잘 알 수 없으나 궁극의 목적은 불교의 한 종파로 행세하면서 불교계의 사찰 및 신도들을 흡수하여 한국 불교계를 석권함으로써 교세확장의 극치를 이루어 보고자 의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그의 신도들 중에는 애당초 불교신도가 십중팔구였다. 서교주는 그리하여 그 첫째 목표로 삼은 대상이 금산사(金山寺)였다. 금산사는 전라북도 북부지역을 관장하는 조계종 제17교구본산 사찰이며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대 사찰이다. ..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7회) [7] 서교주에게 사기를 친 남자 맹수의 어금니에 충치가 먹었다 라고 한다면 비유치고는 좀 어색한 느낌이 들겠으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서교주에게 사기를 쳐 먹은 남자가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1년 말 겨울로 기억된다. 당시 40대 후반쯤으로 기억되는 이 남자는 말솜씨가 청산유수가 ..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8회) [8] 서 교주의 장남 [미륵봉] 서교주의 본처 소생 장남은 내 큰형님과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가 아니면 1~2년 선배로서 내 큰형님 연배의 청년들과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중키에 건장하면서도 귀공자 풍의 용모, 박식하면서 구수한 화술을 가진 그는 불우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한다. 일찍이 서교주는 본처를 어린 장남과 함께 소박을 놓아 내쫓았다 한다. 그래서 서교주의 장남은 어린 나이에 출가 입산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法名)을 「미륵봉」이라 하였는데 본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팔도강산을 부운유수(浮雲流水)처럼 떠돌면서 수도를 하던 전형적인 착실한 승려였다. 내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 그는 금산사에 와서 오랫동안 수행을 한 일이 있었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금산사 아래 약 100여m 떨어진..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9회) [9] 서교주의 또 다른 아들 나의 고등학교 동창생 중에 전주 노송동에 살던「한상협(韓相協)」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전라북도의 최고 명문고교였던 [전주고등학교] 재학 당시 농구선수였는데, 도중에 일신상의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놀다가 내가 금산상업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내가 다니던 시골 농촌의 [금산상업고등학교]로 편입해 온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상협]이가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여, 근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한 친구이다. 한상협이는 먼 곳에 있는 전주의 집에서 통학할 형편이 안되어 내가 다니던 금산상업고등학교 근처에 셋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와 친하게 된 나는 그의 자취방에 자주 놀러 가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10회) [10] 어느 용화교 신도의 생활 금산사에서 동쪽으로 금산사계곡을 따라 약 2Km쯤 올라가면 심원암(深源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금산사의 부속암자이다. 이 심원암에서 동남쪽으로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약 300~400m쯤 가면「마당재」라는 이름의 산골짜기에 외딴집 한 채가 있었다. 이 외딴집에는「정씨」성을 가진 1962년도 당시 나이로 40대 중반의 경상도에서 이사 온 남자가 처와 세명의 아들 딸들을 거느리고 살았다. 이 가족들은 [마당재] 일대의 산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부부간에 용화교로 인하여 싸움이 잦았다. 정씨는 용화교 신도였는데, 부부싸움의 원인은 처가 남편 정씨의 용화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정씨의 처는 한글해독 정도의 학력밖에 안되었지만 순박한 농사꾼으로서의 생.. 2011. 1. 22. ☆ 용화교(龍華敎) 이야기 (11회) [11] 내 친구의 여심(女心) 편력과 용화교 고향의 한 마을 친구이며 고등학교 동창인「최○○」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위이다. 그는 고교 2년 때 한 반 여학생과 열애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시골 농촌지역이라 학생 수가 전교생이 100명도 안되게 아주 적었던 미니형 학교여서 남녀공학을 하였으며 남녀 학생들이 학년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었다. ○○이와 열애에 빠졌던 여학생은 이름이「최☆☆」이라 하였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용화교 신도였고 또한「성화대 원장(聖華臺院長)」이라는 그러니까 용화교 총본부인 용화사(성화대)의 관리 운영 책임과 권한을 가진 용화교 수뇌급 인물의 노인이었다. 이 노인은 부부 단 둘이서 내 고향 마을에서 커다란 기와집을 신축하여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2011. 1. 22. 심증(心證)은 가나 물증(物證)이 없는 살인사건 최전방 사단에서 군복무를 하던 1968년 초여름이었다. 내가 소속된 사단의 OO포병대대 어느 중대에서,하사 한 사람이 야간 경계근무중이던 초병이 발포한 총탄에 사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 초병은 사살당한 하사 소속 중대원이었으며 경계근무를 충실하게 했다 해서 표창장을 받고 포상휴가까지 갔다고 했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당시 최전방 사단의, 예하의 각 부대 주둔지는 주둔막사 주변에, 담벽이나 철조망 등의 시설이나 장애물이 없었고 중요 지점에 경계초소를 만들어, 초병들이 주야간 경계근무를 하며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계근무 중인 초병에게, 밤중에 사살당한 하사는, 그 중대의 내무반장이었다. 내무반장은 병사들이 주간근무나 훈련 등의 일과가 끝나고 17:00.. 2011. 1. 17. 트럭 바퀴에 갈리고도 살아난 전우의 추억 문득 육군에 복무하던 당시의 사고 하나가 생각난다. 소속 중대원 중에 전남 출신의 김경배라고 하는 나보다 3~4개월쯤 후임병이 있었다. 내가 복무하던 지역의 부대는 어느 부대나 막론하고 막사(幕舍)를 비롯하여 연병장(練兵場) 기타 시설물 등에 보수나 증, 개축 등의 공사를 위하여 모래가 자주 사.. 2011. 1. 17. 왼손 등의 작은 흉터 - 소꿉친구의 추억 나의 왼 손등, 정확한 위치는 태권도에서「정권」이라 일컫는 부분, 즉 주먹을 쥐고 보면 둘째와 셋째 손가락 사이의 골이 진 부분에 폭 1mm, 길이 5mm 가량의 약간 움푹 패인 거뭇한 흉터가 조그맣게 언뜻 보면 표가 나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이 흉터는 김명곤(金明坤)이라고 하는 나와 동갑내기(다만, 생일은 내가 5개월이 빨랐다) 고향의 소꿉친구에게 입으로 물어뜯긴 자리이다. 그 때가 아홉 살 때였다. 당시 고향에서 나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명곤이는 생일이 늦어 2학년이었다. 코흘리개 시절의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또래가 한 자리에 많이 모이면 그 중 두 사람을 지목하여 서로 충동질을 하여 싸움을 붙이고서 곁에서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패를 갈라 한쪽씩을 응원도 하면서 재미를 붙여.. 2011. 1. 11.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