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4347년(2014) 9월 27일(토)새벽 03:00에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입고
배낭을 들쳐메니 04:30이다.
집을 나서서 수원역으로 들어가 잠시 기다렸다가 05:10 하차를 한다.
도중에 서울역 직전에서 지상철로 운행하던 전동차는 지하철로 바뀐다.
청량리행 열차는 08:15에 출발하므로 30여분 기다리는 동안에 동두천역 밖
으로 나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여서 역 구내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유사품
햄버거 11 개를 사서 먹고, 출발을 기다리는 통근열차에 승차한다. (요금 = 1,000원)
동두천역을 출발한 열차는 옛날의 종점인 신탄리역을 지나 그 다음역이자 종점인 백마
고지역에 09:10경 도착한다. 강원도 철원군의「백마고지역」은 신탄리역에서 연장
공사를 하여, 단기 4345년(2012년) 11월 20일에 개통한 역이다. 6.25 한국전쟁의 치열
하였던 격전지 중 한 곳인 백마고지의 남남서쪽 약 2. 5 ~ 3Km정도의 거리에 위치
한 곳이다. 백마고지 역에서 09:10경에 하차하여 화장실에 들어가 큰(?)볼일을 보고, 역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니, 백마고지역의 광장 마당 한켠에 포장마차가 있어서 다가가서
아침 식사로 뭐 할만한 거 있느냐고 물었더니 국수밖에 없다고 한다.
역 건물 2층 식당에서 밥도 파는데 점심때가 거의 되어야 시작한단다.
할 수 없이 잔치국수(4,000원)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나니 10 : 00시가 넘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배낭을 들쳐메고 10:20경에 백마고지역을 출발하여 북쪽
으로 3번도로를 따라 대마 4거리를 향하여 걸어간다. 이 일대는 철원평야의 한 복판으로 3번
도로와 87번 도로가 관통하는 곳이다.이로써 오늘도 고독한 방랑자의 유랑 산행은 시작된다.
▼ 09;10경에 하차한 백마고지 역 (수원역에서 05:10에 출발하여 장장 4시간이 걸렸다. 지루
하게 멀고도 멀다)
▼ 아침식사(잔치국수)를 한 백마고지역의 포장마차 (뒷쪽의 섬유지붕 건물)
(오른편 건물 1층은 매점이고, 2층은 식당인데 점심식사부터 가능하단다.)
▼ 안보관광 신청/ 접수 받는 관광 사무실 (매일 1회씩 12:00 경에 출발하여 약
3시간씩 시행한다)
▼ 출발지인 동두천역 방면으로 되돌아본 열차선로 시설 현황
▼ 10:20 경에 백마고지역을 출발하여 대마4거리 방면(북쪽)으로 3번도로를 걷는다.
▼ 드넓은 철원평야의 한자락
백마고지역에서 3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15분가량 걸으니 대마4거리가 나오는데 3번도로로 직진하면 월정리역으로 가는 길이다. 이 대마4거리에서부터 민간통제선이고, 좌회전하면 463번 지방도로가 시작되는데 대마리 향군촌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몇 걸음 더 걸어가면 백마고지 전적지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우회전하면 87번도로로 "노동당사" 및 오늘의 산행목표인 소이산 가는 길이다.
왼쪽길로 좌회전 하자마자 커다란 바위돌에 "大馬里 백마고지"라고 큰 글씨로 새겨놓았다.
강원도 철원은 수십년 전에 내가 34개월 15일간이나 장기간 지루하게 군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이처럼 만 3년 가까이 군 복무기간이 길고 지루하였었다.
당시 제대를 앞두고 사회로 복귀하려니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빈털터리인데다가,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 등을 모두 따져봐도 어디에 기댈 곳 한군데없는 막막한 처지였었다.
배운 일이라고는 군 입대시까지 지어본 농사 뿐인데다, 그 이외에 배운 기술도 없고 농사 이외에 그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밥과 음식을 먹어 대변(大便)을 만들고, 물을 마셔 소변(小便)을 만드는「인분(人糞) 제조기술」딱 한 가지밖에는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제대하기 전전 해에 대마리에 향군촌을 조성하면서 청년 농민을 모집한다는 말을 전해듣고,
대마리 향군촌 조성 담당기관에 농민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해 봤지만, 적합 판정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렸던 몇 십년 전의 추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 때 받아들여졌더라면 지금도 여기서 농사를 짓고 있었을텐데...
장구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오늘에 와서 길가의 대마리 표지석을 바라보며 잠시 가슴 아리는 옛 추억에 젖어보다가 오늘의 진로를 생각해 본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먼저 둘러보고 소이산으로 갈까 생각해 보다가 그냥 소이산으로 바로 가기로 한다.
왜냐하면 6. 25 한국전쟁의 격전장 백마고지는 오를 수 없는 통제구역이고, 멀리 공원 비슷한 시설을 조성해놓고 위령비를 세워놓은 곳은 오를 수 없는 백마고지를 조망하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굳이 가고 싶다면 소이산을 오른 다음 되돌아와서 시간이 남으면 그 때 가보기로 하고서
대마4거리에서 87번 도로를 따라 약 3Km가량의 포장도로를 걷는다.
▼ 463번 지방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의 대마4거리에 서있는 바윗돌 표지석
▼ 가까이 보이는 소이산(왼쪽)과 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금학산(왼쪽)과 고대산(오른쪽)
▼ 소이산 가는 87번 포장도로
▼ 도로 양편에는 출입을 하지 못하도롤 철조망을 설치하고 "지뢰" 표시를 해놓았다.
▼ 소이산 가는 도로 왼쪽에 세워진 청백리 박병(朴炳)공 송덕비
▼ 청백리 박병(朴炳)공의 일생 행적을 새겨놓은 비문
▼ 청백리 박병(朴炳)공의 송덕비 아래에 뒤늦게 피어난 민들레꽃
대마4거리에서 약 45분간 쉬엄쉬엄 걸으니 "노동당사 삼거리"가 나온다. 소이산 산행기점이
되는 곳이다.
노동당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제2땅굴 및 월정리역 가는 민간인 출입통제선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관인, 철원읍사무소로가는 87번도로이다. 87번도로 건너편에 노동당사
가 보인다.
이 노동당사는 단기 4278년(1945) 8. 15 해방 직후 철원땅이 38선 이북이었을 당시
구철원 시가지 중심부였던 이곳에 북한에서 건축한 건물이다. 내부는 폭격으로 죄다
망가지고 겉모습만 간신히 남아있는 건물인데, 옛날 군생활 당시에는 폐허에 방치된
상태였지만 45년만에 다시 와보니 지금은 안보관광지로 조성해 놓았다.
노동당사를 구경하고 곁에 있는 매점에서 캔맥주 1개를 사서 목을 축이고 87번도로로 나가 이정표가 관인 방면을 가리키는 쪽으로 도로를 따라 200여m쯤 진행하니 소이산으로 가는 농로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에서 농로방면으로 접어들며 소이산으로 향한다.
▼ 노동당사 삼거리의 도로 표지판 (길 건너편으로 노동당사가 보인다)
▼ 가까이 가서 본 옛 노동당사 (겉만 파괴되지 않았지, 내부는 거의 다 파괴되었다)
▼ 노동당사 내역 설명 안내판
▼ 한글판 설명문만 당겨서...
▼ 파괴된 흔적이 역력한 노동당사 내부 중 일부...
▼ 노동당사 옆의 쉼터와 매점
▼ 노동당사 앞에서 건너다 보이는 소이산
▼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안내표지 (여기서 비포장 농로로 접어들어 소이산으로 향한다)
▼ 옛 철원읍 시가지터임을 알리는 안내표지 (철원읍 시가지는 광활한 농경지로 바뀌었다)
▼ 지루한 농로를 따라 걷는다.
▼ 한참 걷다 보면 삼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 좌회전하라고 안내표지가 안내를 한다.
▼ 노동당사 삼거리의 도로 표지판 (길 건너편으로 노동당사가 보인다)
▼ 가까이 가서 본 옛 노동당사 (겉만 파괴되지 않았지, 내부는 거의 다 파괴되었다)
▼ 노동당사 내역 설명 안내판
▼ 한글판 설명문만 당겨서...
▼ 파괴된 흔적이 역력한 노동당사 내부 중 일부...
▼ 노동당사 옆의 쉼터와 매점
▼ 노동당사 앞에서 건너다 보이는 소이산
▼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안내표지 (여기서 비포장 농로로 접어들어 소이산으로 향한다)
▼ 옛 철원읍 시가지터임을 알리는 안내표지 (철원읍 시가지는 흔적도 없고 광활한
농경지로 바뀌었다)
▼ 지루한 농로를 따라 걷는다.
▼ 한참 걷다 보면 삼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 좌회전하라고 안내표지가 안내를 한다.
▼ 안내표지는 이 곳이 철원공립보통학교 옛터였음을 말하고 있다.
▼ 길가에 솟대가 서 있는 지점을 지나서...
▼ 조그만 가건물을 중심으로 갈라지는 길 중에서 오른편 계단길을 올라서면 본격적인 생태숲길이다.
▼ 계단길을 한참 올라선 다음에...
▼ 몇 걸음 더 걸으면 시작되는 생태숲길로 접어든다.
끔찍한 "지뢰꽃길"이 끝나고 비좁은 "생태숲길"로 바뀌면서 산길은 굴곡이 약간 심해지기는 하지만 힘들 정도는 아니다.
▼ 철원군과 북부지방산림청이 생태숲길을 공동 조성한 내역을 설명한 안내표지
▼ "지뢰꽃길"(1.3Km) 시작지점을 알리기 위해 철망담장에 붙여놓은 표지판
▼ "지뢰꽃길"이 끝날때까지 철망담장에 촘촘히 붙여놓은 지뢰지대 표지
▼ 천남성 열매
▼ 비 올때를 대비하여 설치해 놓은 작고 짧은 목재 교량 (이런 다리를 5개가량 건너서 "지뢰꽃길"이 끝난다)
▼ 철망담장에는 시인들의 시를 써놓은 목판이나 펼침막도 무수히 붙어 있다.
▼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지뢰꽃길"
▼ "지뢰꽃길" 중간쯤에 조성된 쉼터
▼ 쉼터 옆의 어느 시인의 시비(詩碑)
▼ 입구에서 쉼터까지는 길바닥에 풀이 자라지 않았는데 쉼터를 지나면서부터는 풀이 자라고 있다.
▼ 쉼터에 붙어있는 설명 표지판(1)
▼ "지뢰꽃길"이 끝나는 지점에 붙어있는 표지판
▼ 넓고 완만한 "지뢰꽃길"이 끝나고, 비좁고 약간 굴곡이 심해지는 "생태숲길"이
시작되는 지점의 계단
비좁은 "생태숲길"로 접어들어 둥글고 가늘은 목재를 걸쳐 설치한 계단길을 한참 오르자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조금 걸으니 목재데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잠시 쉬면서 철원평야의 한자락을 내려다 본다.
철원평야는 호남 곡창의 만경평야만큼은 못해도 굉장히 넓은 들이다.
철원에서 군복무를 시작한 신병시절에 같은 조를 이루어 근무중인 고참 선임병의 이야기가 6.25한국전쟁때에
북한 김일성이 원래 북한땅이었던 철원평야를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고서 사흘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을
하였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으나, 평야지대가 별로 없고 대부분 산악지대인 북한땅에서는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철원평야를 잃었으니 큰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전망대에서 휴식을 끝내고 다시 산길을 걸어보니 "생태숲길"은 밀림이 우거져 조망도 좋지 않고 그저 평범한
비좁은 산길을 지루하게 진행하다가 2.7Km의 "생태숲길"이 끝나고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나는데, 길바닥
에는 연한 붉은색의 빛깔로 착색이 되어 있다. 산 위쪽을 향하여 "정상 0.7Km"라고 가리키는 표지판이 설치
되어 있다.
이곳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봉수대 오름길"이 분명하기에 방향을 틀어 소이산 정상으로 오르는데, 심한 급경
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르막길이라서 조금 힘이 든다. 도로를 따라 구불거리는 길을 한참 올라가니 갈림길
삼거리가 나오는데 안내 이정표도 없다.
그런데 고양시에서 왔다는 10여 명 일행 중의 먼저 앞섰던 한사람이 왼편 길에서 되돌아오더니 군부대 정문
이 나온다 하기에 오른쪽 방면의 도로를 따라 200여미터쯤 오르니 길이 끊겨 없어져버리는 막다른 길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다시 조금 전의 삼거리로 되돌아오니 군부대가 있다는 방향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어 물어
보니 군부대 정문 옆에 소이산으로 오르는 긴 계단 오르막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군부대가 있다는 왼쪽 도로를 따라 두어번 구불거리며 진행하니 군부대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이고
철문은 닫혀있고, 바로 오른쪽으로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목재 계단이 올려다 보이고 계단 왼쪽에는 간이 화
장실도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예산이 들어갔을 시설물 갈림길에 왜 자그마한 이정표 한개를 설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오르막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정상이 나오고, 정상에는 목조건물로 2층의 정자를 지어놓았는데, 소이산
정상 표지시설은 찾아보아도 없다. 삼각점 돌만 보인다. 조망이 가능한 철원평야만 내려다본 후 계단길을
나 혼자 먼저 내려와서 좀 전의 군부대로 보이는 건물 철대문을 기웃거려 본다.
그런데 군부대인줄 알았던 시설물에 인기척이 전혀 없고,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려있는데다가 막사 건물 왼
쪽으로 보이는 길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닫혀 있던 철문 옆을 보니 "소이산 평화마루공원"
이라고 쓴 커다란 입간판도 서 있다.
군부대 막사 시설이 아닌 것이 분명해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자신들이 올라갔다 지금 내려오는
이쪽이 진짜 소이산 정상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열려있는 철문을 지나 산 정상으로 올라가니 소이산 정
상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한켠에 서 있는데 높이는 362.3m로 표기되어 있다. (14:25 정상 도착)
그리고 정상에는 펑퍼짐하게 목재 데크를 깔아놓아 사방을 조망하도록 해놓아서 여기서도 철원평야를 내
려다 본 후 내려온다. 올라왔던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서 내려와 농경지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가니 멀
리 노동당사 건물이 보인다. 노동당사를 향하여 길을 따라 걷는다.
노동당사 매점에 도착하여 점심요기거리를 찾으니 컵라면(2,000원)이 달랑 1개 남았다기에 사서 물을 부
어 기다렸다가 요기를 한 후 잠시 쉬었다가 대마4거리를 향하여 87번도로를 따라 되돌아간다.
▼ "생태숲길"로 접어들어 계단길을 한참 오르면...
▼ 전망대가 나타나고...
▼ 전망대에서 철원평야의 한 자락이 조망된다.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이 백마고지인 것 같기도 하다
▼ 아래는 백마고지를 가까이서 초여름에 찍은 다른이의 것을 퍼온 사진이다
▼ 전망대를 출발하여 한참 진행하니 이런 갈림길도 나타나는데 왼쪽 계단으로 올라선다
▼ 전망대에서 철원평야의 한 자락이 조망된다.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이 백마고지인 것 같기도 하다
▼ 아래는 백마고지를 가까이서 초여름에 찍은 다른이의 것을 퍼온 사진이다
▼전망대를 출발하여 한참 진행하니 이런 갈림길도 나타나는데 왼쪽계단으로 올라선다.
▼ 드높은 석축 옹벽 앞에 설치한 이런 급경사 계단도 올라선다. 숲길은 밀림지대여서 사방이 조망이 없다.
▼ "생태숲길"을 한참 진행하자 산봉우리 하나가 눈 앞에 나타나는데 소이산 정상으로 생각이 든다.
▼ 그러나 그 반대편으로 소이산 정상으로 가는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봉수대 오름길"의 시작점)
▼ "생태숲길"이 끝나고 "봉수대 오름길"이 시작되는 지점임을 안내하는 표지판
▼ 연한 붉은색깔로 착색한 소이산 정상으로 오르는 콘크리트 포장도로
▼ 길가의 야생화
▼ 계단길을 올라간다.
▼ 그러나 정상에 오르니 2층 목재 전망대 정자 시설과...
▼ 삼각점만 있고 소이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이나 기타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 안전시설 밧줄에 표지기만 잔뜩 매달려 바람에 나부낀다.
▼ 전망대 정자에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증명사진 한 장을...
▼ 계단길을 내려와 철대문 안쪽의 입간판을 살펴보니 군부대가 아니고 "소이산 평화마루공원"이다.
▼ 그래서 철대문을 통과하여 정상으로 오르니 여기가 바로
소이산(所伊山, 362.3m) 정상이다.
▼ 소이산 정상은 목재 전망대 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여기서 내려다 보면...
▼ 광활한 철원평야 한자락이 다시 보인다.
▼ 노동당사 앞으로 하산하여 되돌아온 [대마4거리]
대마4거리에 도착하니 16:30이다. 피로한데다 시간도 어중간하여 백마고지 전적지 공원은 가지 않기로 하고
오전에 출발했던 백마고지역으로 되돌아가니 16:45경이다. 역으로 들어가 열차시각표를 보니 15분 후인 17:
00 정각에 출발하는 동두천행이 있다. 플랫폼으로 들어가니 열차가 대기하고 있어 승차한다.
▼ 백마고지 전적지 공원 관람은 뒤로 미루고 백마고지역으로 되돌아와서...
▼ 17:00에 출발하려고 대기중인 동두천행 열차에 승차하고 귀가길에 오른다.
백마고지역에서 동두천역을 향하는 열차에 승차하고 자리에 앉아 귀가길에 오르면서 6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의 치열의 극치를 이루었던 백마고지 전투를 생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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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백마고지 전투에 관한 퍼온 글>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10월 15일까지 10일동안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개요>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 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지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과정>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 병력
4만 4056 명과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
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이 395고지로 맹렬히 돌격해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병력으로 3차례나 전투를 치뤄 중공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대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 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395 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은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선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 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데 성공했으나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 이로써 백마고지 전투는 종결 되었다고 한다.
<결과 및 영향>
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제9보병
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도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 소위(1929년 1월
~1952년 10월), 김광수 대위 등 많은 호국 인물들도 탄생하였다.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은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으며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이 사상했는데 특히 이 전투에서 잃은 병력이 정예병들이라서 차후 신병을 보충 받더라도 숙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 승리의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 등을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고, 이후 제9보병사단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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