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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산행

충남 태안군 안면도 핵심지역 동그라미 산행

by 박달령 2009. 12. 27.

단기 4342년(2009) 12월 27일(일요일).

새벽 04:00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산행 복장을 갖추고 나서 05:00경 처가 챙겨주는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 수원역으로 나간다. 05:55에 수원역에 도착하여 06:10에 출발하는 장항선 열차에 올라 자리

에 앉아 홍성역으로 향한다.

 

오늘은 <대충산사(대전 충청지역의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기 산행일이다.

지지난 주부터 대충산사 카페에 산행 공지가 있었고, 내 이 블로그 방명록에 12월 24일 장끼님께서 참

석을 권유하시는 글이 올라왔었고, 홍성의 산꾼 회장님은 나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내가 전화

를 안받아 통화를 못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동안 고독한 방랑자의 산행 스타일을 유지하느라고

<대충산사> 정기산행을 장기간 참석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참석을 하기 위한 결심을 하였다.

 

내 휴대전화에는 장난전화가 많이 걸려와 요즈음 발신자 표시를 보아 생소한 번호 같으면 전화를 안받

았는데 산꾼 회장님의 전화는 번호가 저장이 안되어 있어 안 받게 된 것이라 대단히 죄송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어제 점심때쯤 해서 허허자 님의 전화가 걸려와 받으니 이번 산행에 참가할 것인지 여부를 묻기

에 아침 06:10에 출발하는 장항선 열차를 타면 홍성역에 08:00경에 도착할것이므로 기다렸다가 대전

에서 오시는 회원님들의 전세버스에 편승하여 산행지인 안면도로 가면 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07:50경에 홍성역에 정차하는 열차에서 하차하여 화장실을 다녀온 후 역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행인에

게 버스터미널을 물으니 방향을 가리키며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 버스터미널을 가려는 이유는

홍성역사가 새로 이전을 하여  역 주변에  식당이 없어 해장국이라도 한그릇 먹고 싶어서이다. 아침밥을

새벽 05:00에 일찍 먹고 약 3시간이 지나니 다시 배가 고파온 것이다.

 

그런데 10여미터 앞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산꾼 회장님이시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고  어찌 알고서 나오셨느냐고 물으니 허허자님한테서 들었노라는 것이

었다. 해장국이라도 한그릇 하려고 버스터미널로 가려던 참이라고 했더니 운전하고 온 승용차에 타라고

하기에 승차하고 한참 가다가 홍성읍내 어느 식당 앞에 정차한다.

 

식당에 들어가 떡국 한그릇을 시켜 먹는동안 산꾼 회장님께서는  대전을 출발하여 오고 있는 버스와 그

리고  허허자님과 번갈아가며 통화를 하여 상황을 파악한다. 떡국을 다 먹고나니 식대를 산꾼 회장님이

지불해 버리신다. 내가 공짜를 좋아하다 공산명월 대머리가 된 것 같은데 ...

 

식사를 끝내고 홍성 읍내의 홍주의총(洪州義塚) 정문 앞에 차를 대놓고 대전팀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회장님이 동행할 홍성 분께 부탁하여 내 몫으로 사오게 하신 김밥 두줄을 배낭에 수납한다. 계속 신세만

진다. "홍주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결전하다 옥쇄하신 선열들의 무덤이다.

이윽고 09:10경이 되자 대전팀 버스가 도착하여 오래만에 만난 대충산사 일행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아우라지 고문님, 허허자 고문님, 신샘님 내외분, 초향(초원의 향기)님, 하얀미소님, 상수리님 내외분, 문

필봉님, 식장산지기님, 산사내님, 사중사님, 필례님 부자, 날맹이님, 강산에님, 장끼님 내외분과 그 외에

처음 뵙는 낯서른 분들 합하여 약 30여명의 일행이 탄 버스는 서산간척지 방조제를 따라 조성된 도로를

달려 안면도로 향한다.

 

09:40경에 꽃지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서산 <괜챠뉴>님이 소속하신 <서산마루산악

회>버스를 기다리니 금방 도착하는데 약 40여명이나 된다. 대충산사와 마루산악회 합동산행인 것이다.

아니 서산마루산악회에서 대충산사를 초청한 산행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괜챠뉴>라는 닉네임은 <괜찮아유 ~ !>라는 충청도 사투리에서 따온 것으로 매우 낙천적이고 정겨운

별명이다.)


양측 산악동호회 회원들간 간단한 인사가 있고 나서 꽃지해수욕장 모래사장을 출발하여 길을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오늘 산행할 경로는 꽃지해수욕장을 출발하여 -> 수목원 -> 안면도자연휴양림 -> 안면고등학교 ->

승언1저수지 -> 안면고등학교 -> 안면읍 소재지 -> 방포해수욕장 -> 방포항까지 안면도 핵심지역을

한바퀴 동그라미를 그리며 종주하는 코스인데 거리는 잘 모르나, 약 6시간 코스라 한다.

 

해변에 구릉처럼 이어지는 산줄기인데 표고 50 ~ 60m, 높아봐야 100m도 채 안되는 구릉 수준의 산들

로 이어져 있어 박달령의 체질에 안성맞춤인 산길이다.


 

▼ <괜챠뉴> 님께서 올려주신 산행지도

 


오늘 걷게 되는 안면도는 조선왕조 인조때까지는 섬이 아니고 본래 태안반도에 붙은 육지였다.

그런데 육지가 섬이 된 내력을 설명하자면 <굴포운하>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는 ‘마(魔)의 바다’라고 불릴만한 거친 바다가 적지 않았다.

 

태안반도의 안흥량(安興梁)(태안반도 서쪽 안흥항 앞바다)이나 인천 강화도의 손돌목, 전남 진도의 울

돌목, 황해도 장연군의 장산곶 등은 한결같이 물살이 빠른 조류가 심한데다 해저 지형도 복잡해 암초가

많아 뱃사람들에게는 공포와 경이의 바다였다. 그 중에서도 안흥량은 수로가 험난하고 암초가 많아 선

박이 파손되거나 침몰하는 일이 허다했다.

 

고려, 조선시대에 서남 해로는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세곡(稅穀)을 개경이나 한양(서울)으로 운송하기

위한 불가피한 경로였지만 그만큼 희생도 감수해야 했다. 조선시대 태조(太祖) 4년부터 세조(世祖) 1년

에 이르는 60년간, 안흥량에서 파선되거나 침몰된 선박 수가 무려 200척에 사망자 수는 1200여 명, 미

곡 손실은 1만5800석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태종 14년에는 66척의 선박이 파손, 침몰되고 5천

8백석의 미곡이 수장되기도 했다. 당시 선원들은 안흥량을 지나는 조운 선단의 승선을 기피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이 험난한 뱃길인 안흥량을 피하는 항로를 새로 개척하기 위하여 천수만과 가로림

만을 관통하는 <굴포운하>를 파게 된다. 고려 인종(1134) 때에 착공하여 조선 중기까지 무려 400여년

간 10차례나 시도하여 공사를 벌인 굴포운하(掘浦運河)는 세계 최초의 인공 바닷물길의 대역사로 기록

된다. 이 굴포운하만 완성된다면 항해의 안전은 물론 물길이 약 800Km나 단축된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천수만과 가로림만 6.8km를 연결하는 굴포운하는 2.8km밖에 뚫지 못한채 해저 지층에 화강암

반이 깔려 있어 당시의 장비로는 공사가 어려웠고 또한 간만의 차이가 큰 조수가 밀려오면 허물어지곤

하여 공사를 중단해야만 했던 것이다. 현재에도 남아 있는 운하 유적지는 수많은 백성들이 흘렸을 피와

땀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이처럼 굴포운하 공사가 실패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대안으로 조선조 인조 16년

(1638년)에 안면도와 육지 사이인 현재의 교량 밑 부분을 파내어 바닷물길을 냄으로써 안면도가 섬이

되었으며 안면도 서쪽 바다를 항해하던 선박은 천수만으로 들어왔다가 이곳을 통과하여 다시 서해바다

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공사 감독은 충청감사 김규류 였다 한다.


 

▼ 꽃지해수욕장 앞에 있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가 있는 섬.(산행 시작점)


 

▼ 꽃지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 꽃지해안공원 정문


 

▼ 꽃지해수욕장 백사장으로 향하는 일행


 

▼ 망망대해


 

▼ 한참 걸어서 옆에서 본 할아버지바위, 할머니바위 그리고 왼쪽 끝의 등대


 

▼ 한참 걸어서 옆에서 본 할아버지바위, 할머니바위


 

▼ 꽃지해수욕장 앞의 등대


 

▼ 꽃지해수욕장의 백사장을 출발하는 산행객 일행


 

▼ 산행 들머리


 

몇 년만이던가. 70여명의 대부대와 일행이 되어 산행을 해본지가...

고독한 방랑자 박달령은 본래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의 산행을 고집하다 보니 항상 혼자서 고독을 씹으며

산길을 걷는데 익숙해져 있어 단체산행에 적응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 산길을 걸어가는 일행들


 

▼ 안면도에는 소나무가 많아 한겨울인데도 산이 푸르다.


 

▼ 이런 도로도 수시로 건너게 된다.


 

▼ 안면송이 우거진 송림(황장산 일대 황장목, 춘양면 일대 춘양목이 있듯이 안면도에는 안면송이 있다)


 

▼ 울창한 소나무 숲길 사이로 난 호젓한 산길


 

고만고만한 낮은 봉우리가 계속되는 구릉을 한참 걸으니 이윽고 수목원이 나타난다. 길은 이 수목원을 통

과하여 계속된다.


  

▼ 수목원에 서있는 장승


 

▼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은 나무에 빨간 열매가 이채롭다.


 

▼ 가까이서 바라본 열매


 

▼ 수목원 대장군, 수목원 여장군


 

▼ 수목원 안내도 게시판


 

▼ 수목원 차도를 따라 걷기도 한다.


 

▼ 한겨울인데도 시들지 않은 풀


 

▼ 도로를 건너 시작되는 산길


 

수목원에서 산봉우리를 넘어가자 안면도 자연휴양림이 시작된다.


 

▼ 자연휴양림 내의 모시조개봉 정상표지석


 

▼ 잠시 정지해서 사진을 찍는 일행들


 

▼ 자연휴양림 내의 바지락봉 정상표지석


 

▼ 자연휴양림 내의 새조개봉 정상 표지석


 

▼ 자연휴양림 내의 넓은 산길


 

▼ 자연휴양림 내의 삼해봉 정상표지석


 

▼ 자연휴양림 내의 키조개봉 정상표지석


 

▼ 키조개봉의 돌탑


 

안면도 송림을 걷자니 아름드리 소나무에 일제시대 세계 제2차대전 당시 왜군의 군용으로 공출 하였다던

송진 채취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자주 눈에 띈다.  이렇게 공출한 송진을 모아서 정제하여 전투기 항공유

로 사용했다 한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벌였던 제2차대전은 자원 빈국이었던 일본으로서는 애초에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

었다.  미국은 유전에서 무한정 뽑아내는 석유에서 풍부하게 휘발유를 생산하여 전쟁에 사용했는데, 일본

은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으로부터 해상 봉쇄를 당하여 석유 공급이 원활치 못하여 이런짓까지도 했

으니 말이다. 결국 일본은 당시 세계 제1의 공군과 해군 전투력을 보유하고도 군수물자 특히 석유류 자원

확보에 뒤져서 패전을 하게 된 것이다.


 

▼ 일제의 자원착취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


 

▼ 일제의 공출명령에 따라 송진을 채취한 흔적(벗겨진 껍질에 콘크리트 땜질을 하였다.)


 

자연휴양림을 벗어나니 안면고등학교가 나온다. 여기서 일행은 고등학교 교정 한모퉁이를 차지하고 자리

를 잡아 점심식사를 한다. 일행들이 배낭에서 꺼내는 막걸리, 인삼주, 복분자술 등을 각각 한잔씩 얻어 마

시며 점식식사를 하였다.


 

▼ 안면고등학교 표지석과 학교 건물


 

점심식사를 마치고 승언1저수지로 가서 저수지 구경을 한다. 저수지 주변에 갈대밭은 넓은데 철새는 보이

지 않는다. 저수지 구경을 마치고 다시 안면고등학교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산행이 시작되는데 자연휴양

림을 벗어난 지역이라 길은 좁아진다.

 

한참 진행을 하는데 선두대열이 멈춰서서 무언가 구경을 하고 있기에 다가가 보니 너구리 한 마리가 올가

미에 목이 걸려 있는 것을 산꾼 회장님이 올가미 줄매듭을 한참 실랑이 끝에 풀어서 살려 보내신다.

이 너구리는 그나마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귀인을 만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약 40 ~ 50m쯤 진행하니 이번에도 또 다시 올가미에 걸린 너구리가 발견되었는데 이미 죽은지 오

래 되어 살려낼 방법이 없어 그냥 두고 진행하게 된다. 역시 짐승들은 IQ가 낮아서인지 올가미에 걸리기만

하면 살아나지 못한다. 산짐승들이 처음 올가미에 걸렸을 때에 조심조심 뒤로 물러서면서 앞발을 이용해

올가미를 벗겨내기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멍청한 짐승들은 올가미에 걸리면 계속하여 앞으로만 전진하려고 몸부림을 치다보니 올가미의 매

듭이 조여져 목을 압박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면 올가미를 벗겨내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산골마을에서도 겨울이 오면 마을 청년들이 사랑방에 모여앉아 산골짜기마

다 서로 관할구역을 정하여 합의를 한 다음에 올가미를 산비탈에 깔아 사냥을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 승언 1저수지의 풍광(1)


 

▼ 승언 1저수지의 풍광(2)


 

▼ 승언 1저수지의 풍광(3)


 

▼ 올가미에 걸려 죽은 너구리


 

▼ 고개마루 서낭당에 서있는 장승 (새겨진 독특한 글귀 : 소원이 이루어질껄, 돌을 던져봐 !!)


 

▼ 낙엽이 덮여있는 돌무더기 서낭당


 

승언1저수지를 지나 산봉우리 두어개를 넘자 승언2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이 산봉우리에는 주변의 풍광을 감상할 전망대와 목조계단 설치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느라고 산봉우리 일대를 광장으로 만들기 위해 건설장비로 밀어 많이 훼손을 시켜 놓았다.


 

▼ 가까이 당겨서 내려다 본 승언2저수지


 

▼ 전망대 설치공사 현장과 훼손된 숲


 

▼ 승언2저수지와 주변 풍광


 

▼ 전망대에 올라서는 계단 설치공사 현장


 

승언2저수지 옆을 지나 산봉우리 몇 개를 넘으니 안면읍 소재지 마을 남쪽으로 해서 큰길을 건너 절개지

에 설치된 철계단을 헉헉대며 오르니 별 특징 없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여기서부터 슬금슬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이 많이 쌓이면 귀가길이 지체될까봐 걱정이 된다.

여기서도 산봉우리 몇 개를 넘으니 방포해수욕장과 마을이 나타난다.


 

▼ 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서는 길가의 해장죽(海藏竹) 대밭


 

▼ 방포해수욕장으로 내려서는 마을 골목길


 

▼ 방포해수욕장의 가게


 

▼ 방포해수욕장의 백사장 (눈이 내리고 있어 먼 곳은 안개가 낀 것 같이 보인다.)


 

방포해수욕장을 끼고 몇백미터 걸어가니 또 다시 산길이 시작되고, 산봉우리 두어개를 넘으니 방포항이

나온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이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하여 옷과 배낭과 모자위에 쌓이기 시작한다.

길바닥에도 2Cm가량 쌓인다. 아침에 안면도에 올때는 노면상태가 좋았는데, 눈이 점점 쌓여가면서 기온

은 낮아 얼어붙으니 길이 미끄러워지기 시작한다.

 

▼ 방포해수욕장에서 산봉우리 두어개를 넘어 내려온 후 처음 만나는 방포항의 횟집


 

14:40경에 방포항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하고, 뒷풀이를 방포항에 있는 다미횟집에서 가지게 된다.

옷과 배낭에 쌓인 눈을 털고 다미횟집 2층에 올라가니 70명 일행들이 다 들어가 앉고도 남을만큼 넓은 방

이다. 서산마루산악회 회장님과 우리 대충산사의 산꾼회장님의 인사말씀에 뒤어어 뒤풀이 회식이 시작되

고 나는 신병치료를 위해 과음을 할 수 없어 소주 3잔으로 만족해야 했다.

 

▼ 뒤풀이 장소 다미횟집


 

▼ 다미횟집 건물 전경


 

▼ 실내 뒤풀이 사진은 몇장 찍었는데 렌즈에 수증기가 서려 실패하고 말았다.


 

16:30경에 뒤풀이가 끝나고 서산의 괜차뉴님 일행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대충산사 버스에 올라 홍성으로

향하는데 눈은 이미 그쳤지만 이미 3 ~ 4Cm가량 쌓여있는 상태라 도로가 미끄러워 차는 서행으로 간다.


아침에 홍성에서 안면도로 올때는 한시간도 채 안걸린 길을 두시간 가까이 18:20경에야 도착하여 대충산

사 일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택시를 타고 홍성역으로 가니 18:30이 조금 지난 시각이다.

17:00가 조금 넘은 시각에 홍성역에 도착할줄 알았는데 길이 미끄러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서울행 18:24 열차는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다음 열차 시각을 알아보니 19:58이다. 그것도 좌석은 없고

입석 뿐이다. 그 다음 열차를 알아보니 21: 10으로 좌석이 있기는 하나 두시간이나 기다려야 되므로 그냥

19:58 입석 열차표를 사고 나서 매점에서 주간지 신문을 한장 사 읽으면서 기다린다.

 

이윽고 열차가 제시간에 도착하기에 객실에 들어가니 좌석은 없으나 입석승객은 많지 않아 배낭을 선반에

얹어놓고 꼿꼿이 선채로 의자나 벽에 기대지도 않고 신문을 읽으면서 가기로 한다.  열차가 흔들리더라도

가능한한 의자 모서리를 붙들지 않고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1시간 40분쯤 달려 21:40경 수원역에 도착한

다.

 

차를 타고서 의자에 앉지 않고 이렇게 서서 흔들리는 몸의 균형을 억지로 잡으며 가면 이것도 대단한 운동

이 된다고 한다. . 내가 지금 앓고 있는 파킨슨병은 가능한한 많은 운동을 하여야만 병세 악화를 예방할 수

있다는 서울대학병원 신경과 전범석 교수님의 처방이어서 이렇게 틈만 나면 몸을 혹사시키는 수준으로 운

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의사의 지시대로 처방약 복용과 운동을 약 10개월간 열심히 한 결과 괴

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던 몸의 컨디션이 지금은 80% 정도 호전되었다.

 

수원역에서 하차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