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 〈강원일보〉에「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
★ 한국민담 수렵사 - 산군(山君)님 시해(弑害) (상) <글 : 김왕석>
이윤회(李潤會, 1871 ∼ 1935, 왕실어용엽사) 포수는 고종(高宗) 35년(1898) 가을, 강원도 회양군 어느 산골 주막에서 아침 밥상을 받고 있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헐레벌떡 뛰어들면서 간밤에 이웃 마을에 줄범(대호)이 나타나 황소 한마리를 물어갔다고 말했다. 이포수는 밥상을 밀쳐놓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집에는 아직도 피비린내가 감돌고 있었고 외양간은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마당과 돌담에까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범은 자정이 좀 지났을 무렵에 그 집 외양간에 들어온게 분명했다. 열자나 되는 돌담을 훌쩍 타넘어 외양간에 있는 황소를 덮쳤다.
그 집 소는 백관이 넘는 황소였으나 이렇다 할 저항도 못했다. 다른 짐승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밀림의 살육자에게 소는 일순간에 무참하게 도살되었다.
범은 벌써 외양간 바깥에서부터 날아들어오면서 외양간 구석에 몰린 소의 대가리를 앞발로 후려쳤다. 황소는 그 일격에 저항 한 번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범은 쓰러진 소의 몸 위로 올라타면서 앞발로 짓눌렀다. 그리고 소의 목을 아가리로 물어 광포하게 대가리를 흔들면서 목줄과 핏줄을 몽땅 뜯어내버렸다.
소는 이미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가 살육자에게 대항한 유일한 몸부림은 "으메!" 하는 처절한 울음뿐이었다.
주인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몽둥이를 찾아들고 바깥으로 나갔으나 그때는 벌써 범이 황소를 물고 담을 타넘고 있을 때였다.
몸무게 육십관(240Kg)의 범이 백관(400Kg)이 넘는 황소를 물고 어떻게 열 자 높이의 돌담을 타넘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현장엔 그 말을 뒷받침해 주는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범은 우선 소의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소의 상처를 크게 벌려 놓았다. 그러자 소의 피는 거의 모두 쏟아져 버렸고 오줌똥을 산더미같이 싸 놓았다.
놈은 그만큼 무게가 준 소의 시체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돌담까지 끌고 갔다. 범은 거기서부터 재주를 부렸다.
놈은 아가리로 소의 목덜미를 콱 물고 제 대가리를 비틀어 들어올리면서 소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놈은 그렇게 소의 시체를 들어올리면서 어깨를 소의 겨드랑이에 끼워넣어 소의 무게를 서서히 자기의 몸으로 옮겼다. 그리고 앞발을 들어올리면서 갈고리같은 발톱으로 돌담에 박혀 있는 돌과 돌 사이에 찍어 넣었다. 여섯자 정도의 높이에 발톱을 찍어넣은 범은 온 힘으로 자기 몸 위로 소의 시체를 끌어당겼다. 범의 몸과 소의 시체는 거의 바로 선 자세가 되었다.
그때 범의 뒷발이 용수철처럼 땅을 찼다. 범은 몸이 공중으로 뜨는 순간 앞발을 빼면서 돌담 위에 걸쳤다.
그래서 놈의 앞발은 더 강한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놈은 앞발을 당기면서 또한번 뒷발로 돌담을 찼다. 동시에 대가리를 흔들면서 물고 있던 소의 시체를 담너머로 던졌다.
줄범은 과연 무서운 힘과 재주를 갖고 있었다. 황소를 물고 열자나 되는 담을 타넘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황소가 범을 물리친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들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범은 소의 시체를 끌고 마을에서 서너 마장쯤 떨어진 산으로 올라갔다. 범은 거기서 소의 몸을 해체하고 뜯어먹었다.
놈은 배를 갈라 내장들과 갈비등을 뜯어먹고,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놈은 남은 고기는 나중에 먹기로 하고 부패를 막기 위해 내장부터 먹어치운 것이었다.
범은 그 인근에서 먹이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마을 장정 30여명과 지방포수 한 사람이 그 일대를 포위해 버렸다.
이윤회 포수가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냥대를 지휘하고 있던 지방포수가 놈은 이제 독안의 쥐가 되었다고 큰소리를 쳤다.
만용이었다. 범이 그렇게 쉽사리 쥐가 될 수 있겠는가. 백관이 넘는 소를 물고 열자 담을 타넘어간 범이었는데 … .
이포수는 지방포수를 꾸짖고 몰이꾼들에게도 경고를 했다. 꽹과리를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범을 산 위쪽으로 몰되 꼭 범을 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만약 범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려고 덤벼들면 얼른 길을 터 주라는 말이었다.
다른 짐승은 모르되 범을 몰이로 잡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언제 몰이꾼들에게 덤벼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엔 그 사냥은 포기해야만 한다. 그게 원칙이었다.
이포수는 산 뒤쪽에 두개의 목을 만들어 그중 하나는 자기가, 다른 곳은 지방포수가 지키도록 했다.
몰이가 시작되었다. 산 주위에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30여명의 몰이꾼들은 천천히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산중복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몰이꾼들은 신이 나 있었다. 다수의 힘을 믿고 범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멀리서 범의 모습이 보였다. 꽤 큰 범이었다.
범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천천히 산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가끔 몰이꾼들을 돌아보고 있었으나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범은 산중복에 있던 잡목림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포수는 그놈이 자기가 지키고 있는 목 쪽으로 올 것임을 믿었다. 지방포수가 있는 목쪽에는 산불이 일어났던 공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범은 자기 몸이 노출될 위험이 있는 그런 곳으로 갈 리가 없었다.
이포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의 총은 영국제 횡(橫) 이연신(二連身) 라이플이었다.
왕실 어용엽사들만이 갖고 있는 최신 맹수용 총이었으며 그 값은 장안의 날아갈 듯한 기와집보다도 비쌌다.
이포수는 바위에 총신을 단단히 받쳐놓고 범이 잡목림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은 그때까지는 순조로웠고 범을 잡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잡목림 속에서 꽝하는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뒤이어 으르렁거리는 범의 노호가 들렸고 찢어질듯한 사람의 비명도 들렸다.
산정에서 목을 지키고 있던 지방포수가 이포수의 지시를 어기고 잡목림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 (하편에 계속) -
'수렵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민담 수렵사 - 산군(山君)님 시해(弑害) (하) (0) | 2008.11.07 |
---|---|
★ 한국민담 수렵사 - 벼락틀 (상) (0) | 2008.11.07 |
-- 한국민담 수렵사 - 벼락틀 (하) (0) | 2008.11.07 |
★ 한국민담 수렵사 - 백두산의 심마니들 (상) (0) | 2008.11.07 |
-- 한국민담 수렵사 - 백두산의 심마니들 (하) (0) | 2008.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