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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백두산의 심마니들 (상)

by 박달령 2008. 11. 7.

★ 한국민담 수렵사 - 백두산의 심마니들 - (상) - (글 : 김왕석)

그 사나이는 숲속에서 소리도 없이 일어났다. 혹시 위험한 야수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 .

1918년 5월 초 백두산 동남쪽 원시림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원시림 속에서 만나는 사람은 범이
나 곰보다도 더 위험한 적이 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영준비를 하고 있던
이윤회(李潤會)포수는 저도 모르게 총을 들어올렸으나 윤제인포수(尹濟仁·무산 포수)가 제지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 사나이는 심마니 같았다. 40대의 뼈가 굵은 사나이였으며 시커멓게 햇볕에 탄 얼
굴, 날카로운 눈, 산발머리, 도토리로 물들인 옷, 허리에 찬 망태, 그리고 굵은 지팡이 등이 그가 심마
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포수님들. 아직 밤이슬이 찹니다. 오늘밤엔 저희들의 산막에서 유하시지요."
그의 말대로 그들의 산막은 가까이에 있었다. 통나무와 흙으로 만든 집으로 반쯤은 땅 속에 들어가
있었으나 꽤 넓은 산막이었다.

산막에는 다른 심마니 두 사람이 감자 산나물 토끼고기 등으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뜻밖
의 환대였다. 심마니와 포수는 다같이 삼림(森林)을 떠돌아다니는 유랑자들이었으나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어쩌다 삼림 속에서 만나도 서로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사이였는데 그건 심마니들이 살생을 일삼는
포수들을 기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밤의 심마니들은 달랐다. 그들은 공손하게 포수들을 접
대하고 있었다.

이포수는 거기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녁 대접이 끝나자 포수들을 데리고 온 사
나이가 머뭇거리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열흘 전에 산삼을 캐러 나갔던 동료 두 사람이 아직도 돌아오
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심마니들은 그 산막을 본거지로 삼고 삼을 캐러 나가도 닷새 이내에는 반드시 돌아오도록 되어 있는
데 그들은 전혀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심마니들도 그동안 그들을 찾으러 다녔으나 허탕만 쳤
다고 했다.

가장 젊어 보이는 친구는 실종된 사람중에서도 강(姜)가 형님은 야수들에게 당하거나 사고를 낼 사
람이 아니라고 아쉬워했다. 실종된 강가 형님은 30년 동안 삼림을 돌아다닌 사람이니 그에게 죽음이
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포수들을 데리고 온 진(陳)가라는 심마니는 시종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강가는 떠나기
며칠 전에 큰 실수를 저질러 부정(不淨)을 타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강가는 여인을 범했던 것이다.
강가와 그 여인은 우연히 만났으나 어쩌면 그건 숙명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심마니들은 백두산 동남쪽 어느 야산 언덕 밑에서 불을 피워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자리
엔 강가, 진가 등 모두 다섯 명의 심마니들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강가의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심마니란 평생을 세속 사회와 떨어져 산에서 살고, 산에서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그것
을 팔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심마니들은 평생에 한두번은 그 팔자를 거역하려는 몸부림을 친다는
말이 있다. 강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강가는 노련하고 훌륭한 심마니였다. 그는 함경도 일대의 원시림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
으며 그곳에 숨겨져 있는 산삼을 누구보다도 많이 캐냈다.

그러나 그는 요즘 처자도 없이 홀로 이산 저산을 떠돌아다니는 심마니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으며
그때도 역시 진가에게 그런 팔자타령을 하고 있었다.

그때 심마니들의 야영장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엔 짐을, 등엔 이불 보따리, 허
리엔 냄비 등을 차고 늙은이와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고국 땅에서 살다살다 못
살아 만주땅으로 넘어가는 유랑민들임이 분명했다.

유랑민은 네 가족에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늙은 부부와 아들, 젊은 부부 두 쌍, 그리고 30대 과부와 그
의 어린 딸 등이었다.
"여보시오. 여기서 만주땅은 아직도 멉니까 ?"

심마니들, 특히 인정이 많은 강가는 그들에게 쉬어가라고 권했다. 유랑민들은 그의 권유대로 그날밤
을 그곳에서 지냈다.

지칠대로 지친 유랑민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가족끼리 모여 잠들었으나 밤이 깊어지자 그런 상황 속에
서도 젊은 부부들은 그대로 잠을 자지 않았다.

늦봄의 향기로운 꽃냄새 등이 그들을 자극했던지 젊은 부부들은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소리를
들은 과부가 긴 한숨을 쉬면서 일어나더니 계곡 쪽 숲속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시집 온 지 2년만에 과부가 되었다는 그 여인은 갖은 고생을 했는데도 그녀의 몸매는 아직 윤기가 남아
있었고 얼굴에는 남자를 이끄는 매력이 넘쳐 흘렀다.

진가도 역시 잠이 오지 않아 눈만 감고 있었는데 그가 눈을 떠보니 저쪽에 누워 있던 강가의 모습이 보
이지 않았다.
그는 강가가 있던 곳으로 기어가 손으로 더듬어보았으나 강가는 역시 그 자리에 없었다.

진가는 그때야 비로소 강가가 그 과부에게 유난히도 친절히 대했던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강가
를 보는 과부의 눈도 그리 싫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안돼, 그래선 안돼."

심마니란 산삼을 캐러 나갈 때는 고사를 지내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만 했다.
살인·도둑질을 하거나 여자를 범하면 안된다.
심마니는 산행 전에는 마누라와도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혼자 자면서 길몽(吉夢)을 꾸어야만 했다.

만약 그 엄한 규율을 어기면 산삼을 못 캘 뿐만 아니라 큰 액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진가는 얼핏 일어나 강가를 만류하기 위해 계곡 쪽으로 내려갔으나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계곡의
숲 속에서는 남녀의 야릇한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래도록 홀로 산에서만 살아왔던 심마니와 청상과부의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강가는 그 다음날 유랑
민들을 만주 땅까지 안내해 주겠다면서 그들과 같이 떠난 지 이틀 후에 돌아왔다. 강가는 그 길로 젊은
심마니 소팔이를 데리고 삼을 캐러 나갔다.
여인을 범했던 부정한 몸인데도….

진가는 마치 자신에게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으나
그 표정은 어두웠다. 하지만 아직 심마니들에 얽힌 금기에 저항감을 갖고 있는 듯한 젊은 심마니가 말
했다.

"강가 형님은 괜찮을 거요. 그는 사고를 낼 사람이 아닙니다."
강가는 캄캄한 밤중에도 원시림을 돌아다녔으며 어떤 맹수에게도 겁을 내지 않았다고 했다. 또 그는
길고 굵은 박달나무 지팡이를 갖고 다니면서 무기로 사용했다.

강가는 그 지팡이로 독사 같은 뱀들을 가볍게 쫓아버렸고 늑대나 오소리 따위는 가차없이 때려 죽였
다. 강가는 몇 년 전에 숲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덮쳐든 불범(표범)과도 싸워 지팡이로 불범의 대
가리를 후려쳐 쫓아버렸다고 한다.

진가도 그 점은 시인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아무리 산과 삼림을 잘 아는 심마니라도 들어가서
는 안될 금기지역이 있는데 강가는 그런 금기 지역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백두산 기슭이 서남쪽으로 완만하게 퍼져가는 곳에는 울창한 잡목림이 있었다.
그곳에는 오직 큰 짐승들만이 서식했고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심마니들은 오래 전부터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곳은 넓은 삼나무 숲으로 되어있고 거기엔 산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어느 심마니도 그곳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강가의 행방을 찾으러 나선 진가는 강가의 발자국이 바로 그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금단의 숲속으로 들어갔지요. 그들을 찾으려면 그 숲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우린 들어가지
못해요."
포수들은 그제서야 심마니들이 자기들을 극진하게 대접해주는 이유를 알았다.

금단의 지역에 들어가서 실종된 동료를 찾아달라는 청이었다.
포수들은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심마니에게는 금단의 지역이 있었지만 포수에게는 그런 것이 있
을 수 없었다.

무산 토박이 포수인 윤포수는 그 일대에는 불곰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 불곰의 영토에는 대호도 침
범 못한다고 말했으나 불곰을 겁낼 이포수는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 포수들이 심마니 산막을 나섰을 때 진가가 따라 나왔다. 다른 심마니들도 같이 가겠다고
말했으나 진가는 그건 위험할 뿐 아니라 필요없는 짓이라고 단호하게 저지했다.

세 사람은 그 날 하오 늦게 백두산의 하얀 정상이 보이는 금단의 숲에 도착했다.
그곳엔 듣던 대로 광대한 삼림이 펼쳐져 있었고 수정처럼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포수들과 심마니는 그 강변에서 그날밤을 보냈는데 심마니는 서너번이나 목욕을 하고 산신령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포수들과 심마니는 다음날 새벽에 금단의 숲으로 들어갔다. 앞장을 선 심마니는 마치 그 원시림 속에
길이라도 있는 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삼나무의 향기를 맡아 삼나무 숲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쪽 구릉 너머에 삼나무들이 있습니다. 강가는 틀림없이 그쪽으로 갔을 겁니다."
그는 두려움도 잊은 듯 삼림 안으로 돌아다녔고 나중에는 신들린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지형과 토질 그리고 삼나무의 형태와 풀들의 종류 등으로 미루어 그는 인근에 산삼이 있다는 걸 확신
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곳엔 산삼이 있었다. 그러나 산삼이 있었던 자리에는 깊숙한 구멍이 남아 있을 뿐이었
다.
"강가란 놈이 캐갔어 ! 아주 크고 늙은 산삼이었는데 그가 캐갔어."

심마니는 구멍 앞에 멍하니 서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산삼을 캔 강가는 어디로 갔을까 ?

- (하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 〈강원일보〉에「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