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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장백산맥의 홍호자(紅胡子)(하)

by 박달령 2008. 11. 7.

★ 한국민담 수렵사 - 장백산맥의 홍호자(紅胡子) (하) - (글 :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다갈색의 나뭇가지 같은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미록의 뿔이었다.
이포수가 총의 안전장치를 풀자 그 순간에 미록은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워낙 잡초들이 밀식하고 있는 곳이어서 미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잡초들이 좌우로 갈라지는 것만이 보였다.

이포수는 그 잡초를 향해 발사했다. 다른 방향에서도 총소리가 들렸고 총탄들이 집중되었다.
"그만, 이제 그만 !"
이포수가 고함을 지르자 총성은 멈췄다.

삼림은 또다시 조용해졌고 미록의 움직임도 없었다.
포수들의 사격은 정확했으며 미록은 모두 네 발의 총탄을 맞고 숨져 있었다.

"빨리 조치해."
강포수의 말에 두 사람의 포수들이 미록의 몸을 재빨리 분해했다.
그 사이에 강포수와 이포수는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대가리만 갖고 가고, 나머지는 버려."
강포수가 그렇게 독촉하고 있을 때 이포수가 쉿 하고 제지했다.

저쪽 숲속에서 뭔가 번쩍하는 빛을 발견했던 것이다.
총신이 햇빛을 받아 반사한 것 같았다.

"잘못 본거야. 그러나 빨리 이 자리는 떠나야 돼 !"
총을 발사했던 그곳에서 우물우물하다가는 산적들이나 홍호자들에게 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일행은 소리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네 사람의 포수들은 현장에서 10리나 떨어진 자그마한 구릉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잘라낸 미록의 대가리가 부패하지 않게 조치를 했다.
대가리를 그대로 두면 이내 부패하기 때문이었다.

녹용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걸 연기에 쐬어 건조시켜야 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을 피워야만 했다. 불을 피운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의 포수들이 불을 피워 미록의 대가리를 건조시키는 사이에 강포수와 이포수는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강포수는 구릉의 아래쪽을 이포수는 위쪽을 경계하기로 했는데 이포수는 아무래도 아까 숲속에서 번쩍거리던 빛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가 자기들을 감시하고 미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포수는 숲속에 엎드려 소리없이 기어다녔다.
구릉 밑에는 불을 피워 미록의 대가리를 건조시키고 있는 동료 포수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보호해야만 했다.
적어도 그 주위 50 m 이내에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불을 피운지 약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포수는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것을 들었다. 잡풀을 밟는 발자국 소리였다.

'놈들이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나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포수는 더 기다렸다.
한 사람이 네 명을 상대해야 할 싸움이었으나 이포수는 자기의 총을 믿고 있었다.
윈체스터 5연발은 네 명을 모두 죽이고도 한 발이 남을 게 아니겠는가 !

발자국 소리는 더 가까워지고 이젠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이포수는 위쪽으로 15 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잡풀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이때다'

윈체스터 5연발이 발사되었다. 총은 마치 기관총처럼 연달아 발사되었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찢어질 듯한 사람의 비명도 들렸다.

이포수는 단숨에 다섯 발을 모두 발사하고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날렸는데 바로 그때 윙하는 소리를 내면서 총탄이 귓전을 스쳐갔다.

총을 발사했던 그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이포수에게 명중될 총탄이었다.
이포수는 바위 뒤로 뛰어들어 재빨리 재장탄을 했다.
그때 저쪽 삼림 속에서 또 총소리가 나고 불빛이 보였다.

이포수는 그 불빛을 보고 연사를 퍼부었다.
어림으로 쏜 사격이었으나 5연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으악 하는 비명이 들리더니 달아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이번에는 응사가 없었고 삼림은 조용해졌다.

한참 후에 아래쪽에서 강포수의 소리가 들렸다.

"이포수 이포수 ! 어떻게 됐어."
"놈들은 달아났어."

그러나 그들이 반격해 올 위험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러시아인이란 복수심이 강한 민족이었고 끝까지 싸우는 성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포수들은 모닥불을 꺼버리고 잡풀 속에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건 긴 밤이었다.

달아난 놈들이 언제 역습해 올지도 모르는 불안한 속에서 이포수 일행들은 밤을 보냈다.
다음날 새벽 날이 밝자 한무리의 까마귀떼들이 날아와 어젯밤 이포수가 사격을 가했던 곳에 모여들었다.

"시체가 있는 모양이군."
이포수 일행들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면서 그곳으로 가봤다.

그건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곳에서는 두 사람의 시체가 있었다.
모두 러시아인들이었는데 한 사람은 6척 거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애꾸눈이었다.

큰 사나이는 이마에 총을 맞아 눈을 뜬 채 죽어 있었고, 애꾸눈의 사나이는 가슴에 두발의 총탄을 맞아 기어다니다가 숨진 것 같았다.

시체는 또 있었다. 이포수가 두 번째 사격을 했던 곳이었다.
역시 러시아인이었으며 얼굴 한가운데에 총탄이 명중되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달아난 한 놈도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큰 상처를 입고 있어 살아나지 못할걸."

그 홍호자는 계곡에 쓰러져 있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총을 들어올릴 힘도 없는 것 같았다.
목과 복부에 총탄을 맞아 전혀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더니 일행을 보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물을 달라는 것 같아."

이포수가 물병의 물을 입 안에 넣어주자 서너 모금 마시더니 마지막 홍호자는 숨을 거두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