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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썰매 사냥꾼들(상)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썰매 사냥꾼들 - (글 : 김왕석)

1920년 정월 어느날 이윤회(李潤會) 포수는 강원도 설악산 인근 어느 야산에서 멧돼지 발자국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 멧돼지는 어깨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벌써 몇 십리를 도망가고 있었다.

이포수는 새벽부터 그놈을 추적하다가 어느 계곡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가물가물 들리는 소리였으나 사람의 소리가 분명했다. 그는 소리나는 곳을 살펴봤다.

저쪽 산봉우리에서 웬 사람 둘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불을 가지고 있느냐는 소리 같아서 불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담뱃불을 좀 빌리자는 말이었다. 거기까지는 족히 5 리나 되는 거리였다.
'저런 미친 놈 같으니, 산봉우리에서 담뱃불을 빌리겠다니."

이포수는 '미친 놈들' 하면서 더 이상 말대꾸를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열서너 발도 못갔을 때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담뱃불을 빌리자는데 왜 그대로 가고 있소."

깜짝 놀라 돌아서보니 산봉우리에 있던 두 친구가 어느새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이 친구들이 축지법을 쓰는 건가.'
그들은 강원도의 썰매 사냥꾼들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산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온 것이었다.

"아니 여보시오. 담배불을 빌려 줄 거요. 안 빌려 줄거요."
이포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담배불을 빌려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30대로 보였다. 그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짐승털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길이가 두 자 반쯤 되는 썰매를 신고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와 창을 들고 있었다. 허리에는 토끼와 오소리를 차고 있었고….

또 둘 다 얼굴들이 새까맣게 타서 입을 벌려 웃을 때는 유난히도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당신은 멧돼지를 쫓고 있군요."
"그렇소만…"
"멧돼지는 저렇게 빨리 도망가고 있는데 언제 잡을 거요."
"벌써 몇십리나 추적을 하고 있지만 오늘은 잡기 어려울 것 같소."

이포수는 아차했다. 멧돼지를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냥꾼들의 관례에서는 사슴이나 노루같이 상처에 약한 짐승은 먼저 상처를 입힌 포수에게 기득권이 있었다. 내버려둬도 사슴이나 노루는 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멧돼지나 곰과 같이 상처에 강한 짐승은 그 반대였다.
멧돼지나 곰은 맨 나중에 치명상을 입힌 포수에게 그 짐승을 차지할 권리가 주어졌다. 물론 다른 포수가 먼저 상처를 입혀놓고 추격을 하고 있는 짐승을 다른 포수가 잡는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아무튼 멧돼지는 맨 마지막에 숨통을 거두게 한 포수에게 권리가 주어졌다.

그때의 경우도 그 썰매꾼들이 모른 체하고 멧돼지를 잡아가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멧돼지를 잡으면 나누어 가지자는 썰매꾼들의 제안에 이포수는 대답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썰매꾼들은 또 눈 깜짝할 사이에 계곡을 타고 내려가 버렸다.
이포수도 천천히 발자국 추적을 계속했으나 얼마 안가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강원도의 눈은 번번이 짐승 추적을 방해하곤 했는데 그때도 그랬다.

쌓이는 눈에 멧돼지 발자국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으나 이포수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눈은 강한 비바람과 함께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포수는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광막한 설악산의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을 깨달은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이포수는 산골 마을을 찾기로 했으나 강한 바람과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거기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이포수는 어둠 속을 몇 시간이나 헤맸다. 그리고 기진맥진해졌다.
그는 눈 위에 주저앉아 최악의 경우까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 불그스레한 빛이 보였다. 횃불인 것 같았다.
"거기 누구요. 사람 좀 살려 주시오."
"어디에 있소."
"여기요. 여기."

횃불이 다가왔고 그 빛 속에 낮에 만났던 썰매 사냥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포수는 그들의 안내를 받아 얼마 후엔 어느 산간마을에 도착했다. 여섯 채의 집들이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썰매사냥꾼들의 마을이었다.

"아, 아랫목으로 오시오."
"어떻게 나를 찾게 되었소."
"아, 멧돼지를 잡으면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았소."

"뭐요, 그럼 멧돼지를 잡았단 말이오."
"그야, 물론이지. 멧돼지는 네 다리로 도망가지만 우리는 썰매로 미끄러져가니까."
그들은 쉽게 멧돼지를 창으로 찔러 죽여 마을까지 갖다놓고 이포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색에 나섰던 것이다.

그건 강원도 사냥꾼들의 의리였고 따뜻한 정이었다.
이포수는 그들의 정에 취해 그 마을에서 나흘 동안 지내면서 썰매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구경도 했다.

썰매사냥꾼들의 사냥은 장관이었다. 그들은 눈이 그치자 곧 썰매사냥에 나섰다. 눈이 그친 설악산 일대의 산들은 마치 하얀 베폭에 덮인 것 같았다. 그들은 쉽게 어느 산봉우리에서 노루 발자국을 발견했다. 방금 흰 눈이 찍힌 발자국이었다. 노루는 이미 사람들을 발견하고 산중복 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됐어. 저놈을 쫓아…."
세 사람의 썰매꾼들이 각기 20m쯤의 거리를 두고 가로로 한줄이 되어 내려가고 있었다. 덮어놓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노루의 발자국을 보면서 뒤쫓고 있었다. 노루의 발자국을 따라 나무나 바위 사이를 곡예하듯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질주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사냥꾼 중에서 가운데 선 사람은 선창꾼으로 불리는 사냥대의 두목이라 했다. 전날 이포수에게 담뱃불을 빌렸던 서모라는 사람이었다.
산중복 숲속에 숨어 있던 노루는 추격자들이 정확하게 뒤쫓아오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 후다닥 숲속에서 뛰어나와 아래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노루는 도망가는 데는 자신이 있는 짐승이었으며 눈가루를 날리면서 껑충껑충 뛰었다. 얼마나 큰폭으로 뛰는지 멀리서 보면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바람을 가르며 미끄러지는 썰매는 노루보다도 훨씬 빨랐다. 노루보다도 빠른 사냥꾼, 이포수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저럴 수가.'
노루를 추격하던 썰매사냥꾼들은 어느새 가로에서 세로로 진을 바꾸었다. 노루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수색을 위한 가로대열은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자, 간다."
노루의 바로 꽁무니까지 바싹 추격했던 선창꾼이 노루를 추월하던 순간 그의 창이 날아갔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면서 던진 창이었는데도 어김없이 노루의 어깨에 꽂혔다. 노루는 비틀거렸으나 그래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번째의 썰매꾼이 그 옆을 스치다시피 지나가면서 창을 던졌다.

이번엔 창이 노루의 아랫배에 꽂혔다. 그건 치명상이었다. 노루가 피를 뿌리면서 쓰러지자 세 번째의 썰매꾼은 썰매의 방향을 급히 틀면서 쓰러진 노루 옆에서 멈췄다.
빠른 속도로 내려오다가 급정거를 하는 재주도 놀라웠다.

"뭘 그까짓 노루사냥 따위를…"
사냥이 끝난 뒤 선창꾼 서포수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노루 따위는 쉽게 잡을 수 있지만 멧돼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멧돼지, 50관이 넘는 큰 멧돼지는 바위처럼 단단한 껍질을 갖고 있어 웬만한 창에는 끄덕도 하지 않을 뿐더러 때로는 반격을 하여 도리어 사냥꾼들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작년 이맘때, 바로 저 산 너머에서 내가 죽을 뻔했지."

그 멧돼지는 말 그대로 바위같은 놈이었다.
그때 네 명의 썰매꾼들이 산마루를 타고 있었는데 선두에 섰던 서포수는 전방 10m쯤 앞에 있던 큰 바위가 갑자기 눈가루를 털면서 움직이는 것을 봤다.

멧돼지였다. 옆에 있던 바위들과 같이 눈에 푹 덮여 있었다. 그 멧돼지가 그대로 있었더라면 그 옆을 그대로 지나갈 뻔했었다. 그러나 놈은 썰매꾼들이 워낙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보곤 당황한 것 같았다.
서포수는 뒤따라오던 동료 사냥꾼들에게 창을 들어올려 신호를 보낸 다음 급히 방향을 바꿔 멧돼지를 쫓았다.

멧돼지는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산중복을 향해 뛰고 있었는데 날리는 눈가루 때문에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포수는 속도를 좀 죽이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산중복에서 그 기회를 잡았다. 한참 뛰고 있던 멧돼지가 추격자를 보기 위해 잠시 멈췄던 것이다.

멧돼지는 서포수를 보자 크게 당황하여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때 서포수가 그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창을 던졌다. 선창이란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가 짐승에게 큰 타격을 주어야만 그 사냥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창은 멧돼지의 목덜미에 꽂혔다.

'됐어.'
서포수는 썰매를 털면서 멈췄다.
그렇게 멈춰야만 계속 아래쪽으로 도망갈 멧돼지를 다시 위쪽에서 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잘못이었다.

서포수는 그 멧돼지가 계속 아래쪽으로 도망갈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그놈은 서포수에게 덮쳐들었다.
'아차 !'
멧돼지보다 아래쪽에 있던 서포수는 미쳐 썰매를 돌려 달아날 틈이 없었다. 길이가 두 자 반이나 되는 썰매를 순간적으로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기였다. 그때 두번째의 창꾼이 멧돼지와 서포수의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그는 서포수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창을 날렸으나 창은 멧돼지의 등에 꽂혔다가 빠져버렸다. 아랫배를 노렸던 것이 빗나가 갑옷같은 등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멧돼지는 끄떡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포수에게 덮쳐들었는데 그때 세번째의 창꾼이 멧돼지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나 멧돼지와 서포수가 워낙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창을 잘못 던졌다가는 서포수에게 맞을 위험이 있었다.

그는 순간적인 주저로 그만 창도 날리지 못하고 그대로 밑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네번째의 창꾼은 소름이 끼치는 모험을 했다.
그는 창을 쭉 내밀면서 멧돼지에게 돌진했다.

서포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멧돼지에게 부딪친 것이었다.
'저 미친 친구가'
아래쪽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마지막 썰매꾼이 멧돼지에게 부딪치는 순간에 눈가루가 날아올라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눈가루가 사라진 뒤에는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멧돼지도, 네 번째의 창꾼도, 서포수도….

- (하편에 계속) -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