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썰매 사냥꾼들(하) -
(상편에서 계속)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창에 찔린 멧돼지는 아래쪽으로 굴러떨어졌고 멧돼지를 찌른 창꾼은 멧돼지와 부딪치는 충격으로 공중에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서포수를 덮쳐 두 사람이 함께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서포수는 굴러떨어지다가 나무에 걸려 다리가 부러졌고 창꾼도 얼굴에 상처를 입었으나 모두 목숨만은 건졌다.
그리고 멧돼지는 계속 하얀 눈을 온통 붉게 물들이면서 죽어 있었다.
"아, 다리가 부러진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 만약 그 친구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난 그때 세상을 하직했지."
그러나 썰매사냥에는 언제나 그런 행운이 뒤따른다는 법은 없었다.
썰매마을 사람들은 장비포수의 비극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장비포수는 서포수의 삼촌이었다. 장비라는 별명처럼 대단히 용맹한 사냥꾼이었으나 용기가 지나쳐 무모하다는 평도 들었다. 그는 여럿이서 사냥을 할 때 협동작전을 무시하고 불쑥불쑥 뛰어나가 엉뚱한 짓을 하곤 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냥꾼들에게서 경원을 당해 혼자서 사냥을 했다.
당시 설악산 일대에는 범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범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산간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냥꾼들도 당분간 사냥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장비포수는 그게 불만이었다.
그는 촌장과 심한 언쟁을 했다. 범이 돌아다닌다면 마땅히 범사냥을 해야지 사냥꾼이 범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으나 촌장은 마을사람들의 안전을 내세웠다.
장비포수는 언쟁을 한 다음 집에 돌아와 홧술을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식구들이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장비포수가 없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썰매와 창 등 사냥도구까지도 없어졌다.
새벽에 집을 빠져나간 것이 분명했고 그가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는지도 분명했다. 장비포수의 그 다음 행적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밝혀진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장비포수는 그 길로 산에 올라가 혼자서 범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날 정오께 어느 산기슭에 있던 화전민 마을에 들러 점심밥을 얻어먹으면서 '범, 범 하더니 범의 그림자도 없었다.'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는 '범이 발견되기만 하면 껍질을 벗겨 놓겠다.' 는 말을 남기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장비포수는 그날 하오 늦게 범과 만났다. 어느 쪽이 먼저 상대를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장비포수는 산봉우리에서 산중복에 있던 범을 발견하고 그대로 썰매를 타고 습격을 했다.
그건 썰매꾼들이 늘 하는 수법이었다. 짐승들은 대개 질풍같이 덮쳐드는 썰매꾼을 보면 아래쪽으로 달아나다가 결국엔 썰매사냥꾼에게 추격을 당해 잡혔다.
그러나 그건 대개의 짐승들이 그렇다는 말이고 범도 그렇다는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때 범은 썰매를 타고 돌진해 오는 사냥꾼을 보고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썰매사냥꾼이 덮쳐드는 앞길을 막아섰다. 제 발로 뛰어든 먹이를 어찌 놓질 수가 있느냐는 태도였다. 그때만 해도 장비포수는 범과의 정면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썰매의 방행을 조금만 바꿔도 범을 피할 수 있었고 설사 범이 추격을 한다고 해도 썰매의 속도에는 따르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비포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놈, 창을 받아라 !"
장비포수는 그대로 범에게 덮쳐들었다.
장비포수와 범과의 싸움은 일순간에 끝난 것 같았다. 장비포수는 창을 날렸고 범은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앞발로 장비포수를 후려쳤다.
장비포수는 다음날 그를 찾으러 나온 수색대들에게 발견되었다. 장비포수는 커다란 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가 터져 있었으나 그래도 두 눈만은 부릅뜨고 있었다.
장비포수는 그렇게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으나 범은 어떻게 되었을까.
범은 피를 흘리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범은 그곳에서 5리쯤 떨어진 어느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장비포수가 던진 창은 범의 아랫배 깊숙이 박혀 있었다.
범은 그 창을 뽑아내지 못한 채 도망가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사고는 전 해에도 일어났다.
그때 썰매 사냥꾼들이 모두 들떠 있었다. 기다리던 첫눈이 내려 온 산이 눈에 뒤덮였기 때문이었다.
눈은 썰매를 타기에 충분했다. 사냥꾼들은 출동을 했다. 맨 먼저 4인조가 사슴 발자국을 발견했다.
사슴은 가장 값비싼 매화록(梅花鹿)이었다. 사냥꾼들은 녀석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사로잡은 사슴을 사슴목장에 팔년 대단한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슴을 발견한 4인조도 능숙한 사슴 사냥꾼들이었다. 두목격인 선창 정포수는 이미 사슴을 여섯마리나 사로잡은 사냥꾼이었다.
사슴을 발견하자 썰매꾼들은 추격하기 시작했다. 사슴은 산을 타고 서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서쪽으로 가는 산길은 오르막길이어서 추격이 어려웠다.
그러나 추격이 10리나 계속되자 설악산 쪽으로 뻗은 산들이 점점 내리막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썰매꾼들이 더 빨라졌고 그걸 알게 된 사슴은 방향을 바꾸어 산 밑으로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썰매꾼들에게 기회가 왔다. 아래쪽으로 달리게 되면 썰매는 사슴보다 몇배나 빠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창인 정포수는 주저했다. 그들은 너무 멀리 사슴을 추적했으며 이미 그들의 사냥터를 벗어나 있었다.
위험했다.
늘 썰매를 타던 사냥터라면 어디가 급경사가 지고 어디에 바위나 나무뿌리가 있으며 눈 밑이 바위인지 흙바닥인지까지도 알 수 있었지만 거기서는 그걸 알 수 없었다.
사슴이 도망가고 있는 아래쪽은 경사가 급했고 요동이 심한 지형이었다.
게다가 눈은 초설이었다. 솜처럼 부드러운 눈이 쌓였기 때문에 썰매가 깊이 빠져들어가 부드러운 눈 밑에 숨겨져 있는 장애물에 부딪칠 위험이 많았다.
정포수는 뒤따라오는 친구들에게 손을 들어 위험하니 저속으로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썰매의 속도를 죽이고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크게 지그재그를 그리면서 사슴의 뒤를 쫓았는데 그래도 사슴이 산기슭의 소나무 삼림에 들어갈 때까지는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젊은이들이 선창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혈기왕성한 그들은 하던대로 일직선으로 썰매를 몰았다. 단숨에 사슴을 추월하면서 창을 사슴의 다리 사이로 던져 쓰러뜨려 잡겠다는 생각들이었다.
젊은이들은 질풍처럼 달려 사슴 바로 뒤까지 육박하면서 한 손으로 창을 들어올렸다. 바로 그때 사고가 일어났다.
부드러운 첫눈 밑에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바위가 숨겨져 있었다. 칵 하는 소리와 함께 맨 먼저 따르던 친구의 몸이 팽이처럼 돌면서 나가떨어졌고 미처 방향을 바꾸지 못한 다음 친구도 공중에 높이 날아갔다.
정포수는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현장에는 유혈이 낭자했고 먼저 바위에 부딪친 친구는 머리가 깨져 큰 바위 밑에 있었다. 하얀 뇌가 쏟아져나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다음 친구는 저쪽 계곡까지 굴러가 신음하고 있었는데 그도 입과 코에서 피거품을 토하고 있었다.
정포수는 가망이 없는 친구는 내버려두고 그 친구를 등에 업고 썰매를 몰아 아래쪽 마을까지 데리고 갔다.
부상한 친구는 목숨을 건졌으나 머리가 깨진 젊은이는 죽었다. 무모한 사냥의 희생이었다.
"하지만 그후 그곳의 지형을 잘 알게 돼 사냥터를 거기까지 넓혔지요. 이제 그곳 산들도 안심하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정포수가 네 사람을 데리고 그곳으로 떠났으니까 내일 아침엔 돌아올거요. 그곳엔 멧돼지가 많으니까 빈 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다음날 아침 이포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썰매마을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안 사냥터에 나갔던 사냥꾼들과 바깥 사냥터에 나갔던 사냥꾼들이 한꺼번에 돌아왔던 것이다. 안 사냥터란 마을주면 산들을 의미했고 바깥 사냥터란 마을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먼 산들을 가리켰다.
안 사냥터에 나갔던 사냥꾼 여덟 명은 토끼 네마리와 꿩 세마리를 잡아왔다. 그들은 토끼와 꿩을 잡기 위해 날도 밝기 전에 마을을 나섰다. 토끼와 꿩은 날이 밝으면 산에서 내려와 마을사람들이 콩·감자·옥수수·배추 등을 심었던 밭뙈기에서 먹이를 찾았다.
사냥꾼들은 그들을 노려 산 위에서 썰매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덮쳤다. 소리없이 바람을 가르고 내려오다가 점점 속도를 올려 산기슭에서는 질풍처럼 꿩들을 덮쳤다.
썰매가 워낙 빨리 내려오기 때문에 꿩들은 무거운 몸을 공중에 띄우기 위히 후다닥 활주를 하다가 썰매꾼들이 내려치는 지팡이에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토끼들도 우왕좌왕하다가 모조리 잡혔다.
멧돼지를 잡으로 나갔던 정포수 일행은 뜻밖에도 큰 멧돼지 한 마리 외에 표범 한마리를 더 잡아왔다.
"다친 사람들은 없나 ?"
표범을 잡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마을 촌장이 뛰어나오면서 물었다.
"없어요. 그렇지만 큰 싸움을 했어요."
정포수가 시커먼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표범과 큰 싸움을 했던 젊은 사냥꾼들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주위를 에워싼 마을사람들에게 아슬아슬했던 무용담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전날 정오께 사냥터에 도착했으나 멧돼지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멧돼지 뿐만 아니라 노루도 없었고 토끼와 꿩들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노련한 정포수는 그곳에 무엇인가 큰 짐승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산들이 너무 조용했고 살기가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이나 표범이 있을지 몰라. 모두들 조심해."
사실 그곳에는 범과 표범들이 멧돼지를 노리고 돌아다니는 지역이었으며 포수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위험지역이었다.
사냥꾼들은 천천히 썰매를 몰면서 수색을 시작했다. 정포수의 예감은 바로 들어맞았다. 그는 어느 산줄기에서 둥그런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불범(표범)이야."
사냥꾼들의 낯빛이 달라졌다. 불범은 물론 줄범(대호)보다는 체구가 작았으나 칼날같은 발톱과 이빨을 갖고 있는 맹수였으며 그 위험성은 결코 대호에게 뒤지지 않았다. 호전성과 민첩성에서는 오히려 대호보다 더했기 때문이었다.
"형님, 어떻게 하실 거요."
선창인 정포수가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젊은 친구들이 다그쳤다. 정포수는 산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두 사람의 젊은이들이 피를 뿌리며 그중의 한 사람이 죽은 곳이었다.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
"잡아야지요. 포수가 짐승을 피할 수 있습니까."
정포수가 아래턱을 꽉 다물면서 힘차게 썰매를 밀었다.
"자 ! 간다."
그들은 이번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바위와 나무뿌리를 잘 피하면서 썰매를 몰았다.
불범은 산중복에서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뜯어먹고 있다가 눈가루를 날리면서 덮쳐드는 썰매를 보자 격노했다. 으르렁거렸으나 썰매꾼들은 그따위 위협엔 아랑곳없이 산사태와 같이 표범에게 덮쳐들었다.
표범은 당황했다. 그리고 먹이를 버리고 산 아래쪽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썰매는 표범보다 훨씬 빨랐다. 선창인 정포수가 창을 날렸다.
창은 표범의 뒷다리에 꽂혔고 표범은 눈속에 뒹굴었다. 다음 창이 그 아랫배에 꽂혔고 세 번째의 창이 가슴팍에 꽂혔다.
썰매 사냥꾼들은 그렇게 해서 표범을 잡았으나 정포수는 말했다.
"우린 표범에게 이긴 것이 아니야. 산과 싸워서 산에게 이긴 거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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