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벼락틀 (하)
- (상편에서 계속) -
이포수는 총을 점검했다.
3년 전에 영국의 귀족들을 사냥터로 안내해 준 사례로 받은 것으로 왕실 어용엽사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최신형 엽총이었다. 영국의 그라나사(社)가 만든 총은 좌우 2연신(二連身)이었으며 좌우 총신
이 거의 동시에 불을 뿜는다.
그러나 그 총은 라이플이 아닌 산탄총이어서 그 총을 준 영국 포수는 그 총으로는 범이나 곰같은 맹수
사냥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산탄총은 아무래도 라이플보다는 사정거리가 짧았고 관통력도 약하기
때문이었다.
이포수는 영국 포수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 총으로 맹수사냥을 해왔다.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으로도 범과 싸운 한국의 포수들 아닌가.
그러니 산탄총이면 능히 범들과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모험이었다. 산탄총의 유효사거리는 불과 50m였는데 그 거리는 범의 공격가능
거리이기도 했다. 범은 눈깜짝할 사이에 50m를 달릴 수 있었다.
날 듯 덮쳐드는 범의 급소를 단 한발로 맞히지 못하면 포수는 범의 발톱에 찢겨져 죽어야만 했다.
범의 급소는 눈과 귀 사이였으며 라이플보다 관통력이 약한 산탄총으로는 오직 그 급소를 맞혀야만
총탄이 연한 연골을 뚫고 뇌를 파괴할 수 있었다.
이포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천천히 범의 발자국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범이란 적이 뒤를 따라온다는 걸 알면 스스로 반격을 해오는 짐승이니까 ….
범과 포수의 대결은 어느쪽이 먼저 적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결판이 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포수가 범보다 먼저 적을 발견한 사례는 드물었다. 거기다가 범은 그 거대한 몸집을 몇포기
의 마른 풀이나 자그마한 돌멩이 뒤에서도 숨길 수 있는 은신술의 명수였다.
만주범은 우선 그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나려고 꽤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있었다.
놈은 바로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도처에 벼락틀이 설치된 위험스러운 이국 땅을 버리고 고향 만주
로 되돌아가려는 것일까.
이포수는 서두르지는 않았다. 서두른다고 해서 다리가 둘뿐인 사람이 네다리 짐승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포수가 범에게 이길 수 있는 길은 인내와 끈기 뿐이었다.
놈이 지쳐서 화를 낼 때까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범이란 맹수는 어차피 언젠가는 되돌아서
서 추적자에게 덤벼드는 법이니까 ….
이포수는 그날 하오 늦게 어느 산기슭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노인이 젊은 아들과 함께 숯을 굽고 있었다.
"아이고, 포수님.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부자는 아직도 불안한 얼굴들이었다. 조금 전에 황소만한 범 한 마리가 지나갔다고 한다.
범은 서른 발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더니 사람들을 노려봤다. 눈에선 푸른 불빛이 일고 콧등이 실룩
거리더니 으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 같았으나 사람들 옆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이 마음에 걸리는 듯 그대로 가버렸
다. 놈은 이미 사람을 죽여 복수를 해 놓고도 아직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포수는 그날밤은 그 부자와 함께 토굴에서 지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새 눈이 내려 온 산림에 하얀 백포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눈이었으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범의 발자국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포수는 범사냥을 단념하지 않았다.
놈은 나침판을 보고 가듯 북쪽으로만 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범이란 추운 곳에 사는 짐승답지 않게 털이 눈에 젖는 걸 싫어하는 습성이 있었다.
이포수가 생각했던 대로 북쪽으로 얼마 못 가서 어느 바위 밑에서 범이 쉬다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놈의 잠자리에는 털이 많이 빠져있었고 불그스레한 핏자국도 보였다.
벼락틀에 쌓여 있던 돌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범은 그곳에서 푹 쉬다가 눈이 그친 다음에 떠나간 듯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길조(吉兆)였다.
'이제 네놈은 죽은거야.'
햇볕에 흰 눈이 은백색으로 번쩍거렸다.
이포수가 계곡에서 불을 피워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북쪽 산정에서 범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이 추적자를 발견하고 대노한 것이다.
포효 소리가 온 산림에 울려 퍼지자 꿩들이 놀라 후두둑 날아 올라갔다.
나는 새도 저렇게 놀라는데 네 다리의 짐승들은 오죽이나 겁을 먹었을까.
산림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오냐 이놈. 이제부터 한판 벌여보자.'
이포수는 모닥불을 끄고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범도 한판을 벌이려는 게 분명했다.
북쪽으로만 가고 있던 놈이 포효소리가 들렸던 산정에서부터는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서북쪽은 험준한 산들이 톱니처럼 이어져 있었으며 멀리 백두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범이 올라가고 있는 산의 높이는 2,000m가 넘는 고산이었으며 크고 작은 바위투성이의 암산이었다.
그건 범이 좋아하는 싸움터였다.
범은 그 바위들을 마음대로 타면서 포수들의 전후좌우뿐만 아니라 아래에서나 위에서도 덮쳐들 수
있었다.
이포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경험으로 그럴 때는 범의 발자국만을 추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범은 단 한번의 도약으로 능히 10m를 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m의 높이도 가볍게 뛰어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범들은 훌쩍 큰 바위 위로 날아올랐다가 포수 머리 위에서 덮쳐들었고 바위가 많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산에서 무수한 포수들이 당했던 것이다.
이포수는 범의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고 지형을 보고 추적을 했다.
이쪽 바위 위와 저쪽 바위 뒤 그리고 뒤쪽 바위들의 사이까지를 살피면서 한발한발 옮겨 놓았다.
그럴 때는 눈보다는 귀, 귀보다는 코를 믿게 된다.
놈이 바위를 밟는 부드러운 소리와 몸에서 나는 그 노리끼리한 냄새를 절대로 놓져서는 안된다.
신경이 닳을 것 같은 추적이 계속되다가 이포수는 드디어 뭔가를 감지했다.
산 위쪽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속에 이상한 냄새가 스며 있었다. 바로 그 노리끼리한 범의 냄새
였다.
냄새가 나는 곳은 산정 바로 밑에 있는 큰 바위 뒤쪽이었다.
거리는 쉰 발쯤이었는데 범이 바위를 차고 아래쪽으로 뛰어내리면 총을 쏠 틈도 없이 당하게 된다.
'네 이놈, 누구에게 그따위 잔꾀를 부리느냐.'
이포수는 서서히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작은 바위와 마른 풀더미에 몸을 숨기면서 기어갔다.
범이 은신술의 명수라면 포수도 은신술을 써야만 했다.
놈에게 이쪽 소재를 알려주면 안된다.
지형은 범에게 유리했지만 바람은 포수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강한 바람이 범이 있는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사람의 냄새가 범에게 전달될 염려는
없었다.
문제는 소리를 내지 않는 일이었다.
이포수는 뱀처럼 기면서 범이 숨어 있는 바위 뒤쪽으로 돌아갔다.
'됐다. 이젠 됐다.'
이포수가 도착한 곳에서 바위까지는 서른발 정도의 빈 터가 있었고 범이 그 빈 터를 통과할 때 총을
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포수는 마른 풀덤불 속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으며 이젠 놈과 한판을 벌여야 할 차례였다.
범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바위 위였다. 놈은 5 ∼ 6m 높이의 바위 위에서 이포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포수는 범의 가슴팍을 겨냥하고 엽총을 발사했다. 범이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놈은 다시 일어났으나 이포수의 제2탄이 이번엔 놈의 대가리를 뚫고 들어갔다.
범은 다시 쓰러졌다. 대가리와 가슴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범은 이포수가 네 번째로 잡은 줄범(대호)이었다.
- (끝) -
◎ 참고 :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윤회(李潤會) 포수의 약력
1871년 출생 - 1935년 졸
조선왕실 어용엽사
한국과 만주 일대를 무대로 사냥을 함
맹수로는 줄범(대호) 8마리, 불곰 13마리를 잡음
포수들 세계에서의 별명 : 불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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