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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산군(山君)님 시해(弑害) (하)

by 박달령 2008. 11. 7.

★ 한국민담 수렵사 - 산군(山君)님 시해(弑害) (하) - (글 :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그 지방포수는 그 일대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포수였고 불범(표범)을 두 마리나 잡은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줄범(대호)을 잡은 경력은 없었다. 대호를 잡아야만 포수는 제대로 행세를 할 수 있었는데 그에겐 그게 없었다.

그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줄범을 잡으려고 했으나 젊은 한성포수가 뛰어드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질 것 같았다. 그는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의 사냥복을 입고 있는 그 젊은 포수가 아니꼬웠다.

지방포수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잡목림 속에 들어간 범이 자기가 지키고 있는 목 쪽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목을 버리고 잡목림 속으로 들어갔다. 범을 먼저 잡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는 잡목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송아지만큼이나 큰 범을 쉽게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들이 드문드문 있는 잡목림이었으니 그 큰 범이 어디에 숨겠는가.
하지만 그건 착오였다. 잡목림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범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차 !"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범은 보이지 않았다. 범이 정말 없는 것일까.
범은 있었다. 다만 교묘하게 숨어 있었기 때문에 그 포수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었다. 범은 누렇게 말라붙은 마른 풀 속에 엎드려 있었다.

범의 누런 바탕색은 마른 풀 속에 은폐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무의 그늘들이 범의 검은 무늬를 감추어 주고 있었다.
범은 위장의 명수였다.

지방포수는 자기 주위엔 범이 없다고 판단하고 잡목림 안쪽으로 들어갔다.
범은 그 사이에 포수의 등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풀 속에 납작 엎드려 소리도 없이 기어가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게 고양이과 동물들의 특성이다.

지방포수는 범이 등 뒤 십 보 지점에 다가설 때까지 그걸 몰랐다. 포수는 자기의 등 뒤에서 풀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섰다. 그리고 발포했다.
그의 총은 총신 앞쪽에서 탄환을 장탄하는 구식 산탄총이었다. 화승포보다는 나은 총이었으나 그래도 범사냥을 할 수 있는 총은 아니었다.

지방포수가 쏜 총탄은 빗나갔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을 순간엔 범은 이미 땅을 차고 공중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지방포수는 범이 덮쳐드는 걸 보고 총신을 두 손으로 옆으로 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범의 앞발치기를 그것으로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무늬범(표범)과 싸울 때 그렇게 해서 위기를 모면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줄범과 무늬범은 달랐다. 몸무게가 무늬범의 서너배나 되는 줄범이 그까짓 무늬범과 같을 리가 없었다.

범은 총신을 후려쳤고 총신은 지방포수의 머리에 부딪쳤다. 지방포수는 그 타격으로 팽이처럼 뒹굴었다. 범은 쓰러진 포수에게 덤벼들어 한입에 목줄을 물어버렸다.
총소리를 듣고 이포수가 잡목림 속으로 달려갔을 때도 범은 사람의 시체를 뜯고 있었다. 시체를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잔인한 살육행위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범은 그 때문에 발자국 소리를 죽이면서 달려온 이포수를 보지 못했다. 이포수는 15 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범은 그제서야 이포수를 발견했다. 범이 홱 상체를 돌리는 순간에 이포수는 총을 발사했다.

완전한 기습이었으며 범이 반격할 틈이라곤 없었다. 이포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총탄은 낑 하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면서 범의 대가리에 명중했다.
"됐다."
그 순간 이포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큭 하는 소리와 함께 범의 몸이 길길이 공중으로 날아 올라갔다. 범은 그 자리에서 열서너 자나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리고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이포수에게 덮쳐들었다.
만약 그때 이포수가 조금만 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면 이포수는 범의 앞발치기에 맞아 절명했을 것이다.

범은 약 15 m 거리를 한꺼번에 뛰어넘지는 못했다. 범은 일단 땅에 내려와 다시 도약하려 했다.
그때 이포수의 이연신 총의 바른쪽 총신이 또 불을 토했다. 범은 이번엔 가슴팍에 치명상을 입고 뒹굴었다.

이포수는 얼핏 재장탄을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범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범은 두 눈을 멍하니 뜬 채 숨을 거두었다.
몰이꾼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범의 시체와 무참하게 찢겨 죽은 지방포수의 시체를 우두커니 지켜보고 서 있었다.

"돌아가신 포수의 가족을 데리고 오슈."
이포수가 조용하게 말했다. 죽은 포수의 장례식은 포수 사회의 관례에 따라 치러졌다.
이포수는 마을사람들이 데리고 온 지방포수의 아들에게 범의 간을 잘라 먹였다.
아들은 그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셈이었다.

마을에서 지방포수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을 때 이포수는 또 하나의 귀찮은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산골 백성들이 어른으로 모시는 산군(山君)님을 시해(弑害)했으니 그의 영을 달래고, 산군을 자기의 화신으로 지상에 내려보내신 산신령님의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그건 북쪽 대륙으로부터 내려와 대대로 이어진 의식이었다. 만주의 산골사람들은 범을 왕대(王大) 님이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화신으로 숭배했으며 범사냥은 금지되었다.
만주의 산림에서는 범은 절대자였고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 화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범에게 그렇게까지 맹종하지는 않았다.
그때도 이포수는 제단을 만들어 산신령님에게 그 산군은 함부로 사람의 집을 습격하여 소를 물고 가고 사람을 죽였으므로 부득이 응징했노라고 보고했으며 산신령님도 그걸 용서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이포수는 산군을 죽였으므로 한국의 관습에 따라 현실적인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이포수는 그곳 원님(군수)에게 사실을 알리고 대죄(待罪)했다.
군수도 또한 관례에 따라 산군을 시해한 포수에게 태형(笞刑)을 선고하고 매로 볼기를 세번 때리도록 했다. 물론 형식적인 처벌이었으며 때리는 시늉만을 냈을 뿐이다.

처벌이 끝난 후 군수는 자리를 달리 만들어 인축을 해친 해수(害獸)를 잡은 포수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다섯 냥의 포상금을 주었다. 군수의 조치는 거기까지는 잘 한 일이었다.

그러나 군수는 그 다음에 실수를 범했다. 그는 이포수가 잡은 범의 호피를 돌려주지 않았다.
내 고을에서 잡은 범이니 호피는 당연히 내 것이라는 생각인듯 했다.
이포수는 머리를 들어 군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원님은 사람들은 다스리겠지만 범은 다스리지 못함니다. 범을 다스리는 건 포수이지요."

군수는 대노했다.
"네 이놈 누구 앞에서 감히 그런 소리를…"
시골 원님은 궁중의 사정을 잘 몰랐으며 어용엽사가 어떤 사람인줄을 몰랐다.
궁중에는 10명 내외의 어용엽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왕실에서 소요되는 녹용, 웅담, 호골(虎骨) 등을 조달했고 왕족 또는 외국의 고관들을 사냥터로 안내했다.

그리고 때로는 왕명에 따라 인축을 해치는 맹수들도 퇴치했다.
그들은 모두 당대의 명포수들이었으며 최신형 총을 갖고 있었다. 궁중에서도 그들을 중인 이상으로 대접했고 대관들도 그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시골 원님은 그것도 모르고 어용엽사가 잡은 호피를 몰수한 것이다. 이포수는 항의를 했으나 군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포수는 한성으로 돌아가자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다. 궁중이 발칵 뒤집혔다.

즉각 사실조사가 시작되었고 사실이 밝혀지자 군수는 해임되었다. 일개 포수가 지방 원님을 해임시킨 결과가 됐던 것이다.

- (끝)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