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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야화

-- 한국민담 수렵사 - 사향노루 이야기(하)

by 박달령 2008. 11. 6.

★ 한국민담 수렵사 - 사향노루 이야기(하)

- (상편에서 계속) -

사향노루 이야기의 발단은 중국인 한의사였다. 그는 명의로 소문난 의사였으며 오래 전부터 궁중 귀인(貴人)들의 병을 봐 준 사람이었다.

늙은 중국인 의원은 돌아가기 전에 단골 귀인들을 마지막으로 만났는데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사람이 그에게 호소를 했다.
상감과의 잠자리가 여의치 않다는 호소였다.

그래서 상감의 내실 방문이 뜸해지고 그분이 다른 내실로 드나든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후궁은 어느 요리사를 궁중에 불러들여 천하 진미의 음식을 장만하고 술을 빚어 상감을 유혹하는 바람에 우리 마마님께선 매일 독수공방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호소를 들은 중국인 의사는 비밀리에 비방을 알려 주었다.
사향노루의 사향을 급히 구해서 내실 문지방에 미량(微量)을 바르고 좀더 많은 양은 침구에, 그리고 더 많은 양은 여체의 음문 주위에 바르라는 말이었다.

문지방에서 나는 향기가 밤의 방문자의 주의를 끌어 유인하고 침구에 묻은 향이 그를 유혹하고 몸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강력한 향기가 그를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사향노루의 향은 남체뿐만 아니라 여체의 몸에도 불을 지르는 약효가 있어 마마님 또한 열렬한 사랑으로 님을 즐겁게 해 주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궁중에서의 미약(媚藥) 사용은 엄금되어 있었다. 미약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면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엄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궁중에는 쥐도 못듣는 밤말도 새어나가게 되어 있었다.

마마님은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심복 나인을 불렀다. 몇 년 전에 아비가 진 막대한 노름 빚 때문에 색주가에 팔려갈 뻔했던 소녀가 있었는데 그 후궁이 큰 돈을 주고 구출해 낸 적이 있었다. 그 소녀가 바로 김포수를 찾은 나인이었다. 나인은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사향노루를 구해 오겠다고 맹세했다.

"사향노루를 잡아 주시는 건 소녀의 목숨을 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김포수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김포수는 여인을 데리고 사향노루 사냥에 나섰다. 음력 10월이면 산중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초겨울이다. 궁중에서만 살았던 나인에겐 너무나 추운 날씨였다.

더구나 그때쯤의 사향노루는 첩첩산중 응달진 산림속에서 조용히 숨어 살고 있기 때문에 그걸 잡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포수는 여인에게 주막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으나 여인은 한사코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사향노루를 꼭 잡겠다는 집념이 그녀를 그렇게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사실 사향노루 사냥은 고행(苦行)이었다. 매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수십리를 걸어야만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피부는 까맣게 탔으며 눈자위는 움푹 꺼졌다. 그리고 발바닥이 헐어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으나 그녀는 잘 견뎠을 뿐만 아니라 그 고행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원시림 속에서 단 둘이서 소꿉장난하듯 밥을 지어먹는 일이 즐거웠다. 날이 어두워져 동굴이나 바위 틈 사이에서 억센 사나이의 품에 안겨 잠을 잘 때면 그녀는 삶의 희열을 느꼈다.

추적 사흘만에 사향노루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산중복 울창한 산림 속에 두껍게 깔려 있는 낙엽 위에 두 마리의 노루가 걸어간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짝이었다. 사향노루는 엄격한 일부일처의 규율을 지키는 짐승이었으며 언제나 짝지어 사이 좋게 돌아다녔다.

김포수는 조심스럽게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사향노루는 매우 겁이 많은 짐승이어서 추적자가 있다는 걸 눈치채면 아주 꼭꼭 숨어버릴 염려가 있었다.

10월은 사향노루들이 발정(發情)을 하는 시기였으며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곳에는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향기 때문인지 그날밤 어느 동굴 안에 마련된 잠자리에서는 두 사람의 몸이 더 한층 뜨겁게 달아 올랐다.

그들은 다음날 새벽 아쉬움을 남겨둔 채 일찍 일어났다.
그날 하오 늦게 높은 산에 둘러싸인 어느 잡목림을 발견했을 때 김포수는 그곳이 바로 사향노루의 은신처라고 확신했다.

노루들은 여름과 가을에는 저지대 산림 속에서 살지만 몸을 숨길 풀들이 말라 죽어버린 초겨울부터는 깊은 산으로 올라가는 법이다.

노루는 김포수가 생각했던대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발자국들이 곳곳에 찍혀 있었고 그들이 잠을 잔 흔적도 남아 있었다. 낙엽이 두텁게 깔린 오목한 곳에서 두 마리가 다정하게 몸을 붙여 잠을 잔 자국이었다.

김포수는 서두르지 않았다. 함부로 추적을 하다가 겁이 많은 사향노루를 놀라게 만드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김포수는 일찌감치 낙엽 속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밤새들의 울음 소리도 끊어졌을 무렵에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향나무의 냄새 같기도 했고 모과의 냄새 같기도 했으나 그것들과는 뭔가 달랐다. 사람의 머리에 스며드는 듯한 야릇한 냄새였다.

'사향노루다. 사향노루가 가까이 오고 있다.'
낙엽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였으나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향노루는 밤의 짐승이었다. 낮에는 숲속에 숨어 있다가 이제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향노루들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고 냄새는 좀더 강하게 느껴졌다.

김포수와 여인은 꼼짝도 않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노루들을 놀라게 하면 안된다.
노루들은 불과 열서너 발 앞까지 다가온 것 같았다. 가느다란 울음 소리까지 들려왔다. 암컷이 사랑을 호소하는 소리 같았다.

노루들은 그곳에서 한참동안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가 버렸으나 그들이 남긴 냄새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김포수와 여인은 어느새 그 냄새 때문에 몸이 뜨거워져 서로의 몸을 당기고 있었다.

김포수는 다음날 새벽에 계속 그 냄새를 따라갔다. 그건 발자국 추적보다도 더 정확했다. 어느 오목한 숲속에서 강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밤새 먹이를 찾아 돌아다녔던 사향노루들이 단잠을 자고 있는게 분명했다. 김포수는 숲속에 엎드려 소리없이 기어갔다.

노루와의 거리가 열 세 발쯤으로 좁혀졌을 때 김포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노루들은 달칵 하는 그 금속의 소리를 들은 듯 후다닥 일어났다.

놀란 노루들이 숲속에서 풀쩍 뛰어나왔다. 그들은 가볍게 날 듯 뛰어올랐는데도 한꺼번에 열 발 이상이나 뛰었다. 갓난 염소새끼만큼이나 작은 노루였다.

몸은 흑갈색이었지만 등에는 노란 반점들이 있었고 뿔 대신 기다란 송곳니가 턱 아래쪽에 솟아나와 있었다.

사향노루는 굉장히 민첩하고 빨랐으며 눈깜빡할 사이에 벌써 30 m나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포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김포수의 총은 총신이 옆으로 나란히 두 개가 있는 영국제 라이플이었으며 사정거리는 200 m나 되었다. 김포수는 총을 들어올린 자세로 기다렸다.

노루들은 잡목림에서 빠져나가 맞은편에 있는 바위산 비탈을 올라가고 있었다. 수컷이 앞장서고 암컷은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먼저 도망가던 수컷이 암컷과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자 멈추었다.

수컷은 멈춘 자세로 뒤를 돌아봤다. 그게 김포수에게 사격의 기회를 주었다. 김포수는 약 50 m의 거리를 두고 쐈다. 그의 솜씨는 어김이 없었다.
총탄은 정확하게 노루의 대가리에 명중했다. 사향노루의 수컷은 그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수컷을 뒤따라오던 암컷도 수컷이 쓰러지자 우뚝 멈췄다. 암컷은 더이상 도망가려 하지 않고 쓰러진 수컷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김포수는 겨냥했던 총을 내렸다.

김포수는 차마 암컷까지 쏠 수가 없었다. 사향노루 수컷이 쓰러지자 여인이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노루의 시체를 꽉 잡아 눌렀다.

그 여인은 사향노루의 시체를 갖고 갔던 자루에 넣어 그 길로 한양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사향냄새가 나지 않게 노루의 시체를 기름종이로 몇번이나 감싸가지고 땔감을 운반하는 소달구지 나뭇단 안에 숨겨 궁중으로 갖고 들어갔다.

김포수는 그후 그 사향노루가 어떻게 처리됐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여인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김포수는 다음 해 2월초에 그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김포수가 전의와 만나고 돌아오는 것을 궁중 뒷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추운 날이었다. 그녀는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말 없이 김포수의 가슴에 안긴 채 흐느꼈다.

"사향의 약효가 있었소 ?"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으나 더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난 아이를 가졌어요. 당신의 아이죠. 그래서 마마님의 허가를 얻어 궁중에서 떠납니다. 당신과 같이 살기 위해…"
김포수도 크게 기뻐하면서 그녀의 몸을 꼬옥 안아 주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