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산골아이들과 산양새끼(상) - (글 : 김왕석)
포수마을의 이종달 포수와 동료포수 두 사람은 그때 노루 한 마리를 잡아 산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다.
초봄이라 계곡에는 아직 눈이 깊이 쌓여 있었는데 눈 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움직이는 동물이 눈 속에 있는 것 같았으나 아직 곰이 겨울 잠자리에서 나올 시기는 아니었다.
이포수는 화포를 들고 그곳으로 가봤다.
눈 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화포를 받쳐들고 구멍 속을 들여다보니 두자나 되는 구멍 속에서 어떤 하얀 색깔의 짐승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산양이야 ! 산양새끼야."
이포수가 활짝 웃었다.
해가 기울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음씨 착한 이포수는 동료포수들에게는 먼저 가라고 해놓고 혼자 남아 눈을 파헤친 다음 산양새끼를 끄집어냈다.
아직 어린 산양은 맑은 두 눈이 말똥말똥했다.
이포수는 산양새끼를 품에 안고 밤늦게 마을에 도착해 그대로 저녁 밥상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열 세살 난 아들과 그와 동갑인 사촌동생이 준 밥을 아직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포수의 품에서 나온 짐승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산양새끼는 꼭 염소새끼같이 생겼으나 하는 짓은 아주 딴판이었다. 산양새끼는 방바닥에 내려놓자 팔짝팔짝 뛰다가 방구석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함부로 덤비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태도였는데 그놈의 머리에는 아직 뿔은 없었다. 방안에서는 한바탕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놈을 어디서 잡았지요 ?"
"그럼, 왜 저놈은 엄마 곁에서 떨어져나와 그런 속에 파묻혀 있었지요 ?"
그건 이포수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아마도 어미를 따라다니다가 벼랑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아주 높은 벼랑이었으나 그 밑에는 소나무가지와 잡풀들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기 때문에 산양새끼는 다친데 없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그럼, 왜 산양어미는 새끼를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
이번에는 일찍 부모를 여윈 준이가 질문했다.
"죽은 줄 알았겠지 ! 그렇게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는 법이거든. 그리고 그 어미에게는 다른 새끼들이 있어 그 새끼들도 돌봐줘야 할 것 아니냐."
소년들은 납득을 했다.
그리고 서로 눈짓을 하더니 밥을 얼른 먹업치우고 바깥으로 나갔다.
소년들은 잠시 후 이웃집 소녀와 함께 염소 젖을 그릇에 담아왔다. 이웃집에서 기르는 염소의 젖이었다.
산양새끼는 코 앞에 밀어 준 질그릇을 보더니 홱 돌아서서 뒷발로 걷어차버렸다. 그릇이 깨졌다.
"저런 못된 놈 같으니 !"
이포수가 화를 냈으나 소년들과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거야."
"아냐 !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런거야."
이웃집 소녀 갓난이가 깨진 그릇을 주워모으고 있을 때 산양새끼는 발 밑으로 흘러가는 염소젖에 코를 갖다대더니 핥아먹기 시작했다.
"먹는다 먹어 !"
소년 소녀들이 함성을 울리자 이포수도 웃었다.
산양새끼는 배가 몹시 고팠던지 쏟아진 젖을 말끔히 핥아먹었다.
소년들은 이포수에게 산양새끼를 자기들이 기르게 해달라고 졸랐고 이포수는 그걸 승낙했다. 소년들은 그날밤 산양새끼를 그들의 방에 데려다가 함께 잤다.
야생 산양새끼는 처음에는 완강히 소년들의 애무를 거부했으나 나중에는 방구석에서 얌전하게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이포수는 소년들에게 염소들의 똥오줌을 산양새끼의 몸에 발라주고 그놈을 염소들의 울타리 속으로 넣어보라고 알려 주었다.
염소들은 예민한 후각으로 자기들의 가족을 식별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미염소가 산양새끼를 염소 울타리 안으로 넣는 데는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울타리의 틈새가 너무 벌어져 있어 자그마한 산양새끼가 빠져달아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소년 소녀 다섯 명이 반나절 동안 열심히 일을 하여 나뭇가지들로 울타리 틈새를 좁혔는데 마을사람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부지런히 일을 하는 것은 처음 본다며 웃고 있었다.
"자, 이젠 됐어 ! 산양새끼를 데려와 !"
준이가 말하자 갓난이가 염소똥을 잔뜩 묻힌 산양새끼를 데려와서 조심스럽게 울타리 안으로 넣었다.
산양새끼는 자그마한 염소새끼 두 마리가 어미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더니 염치없이 그리고 조르르 달려갔다. 어미염소는 난데없이 나타난 이상한 놈을 보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고 새끼들도 어미를 따라갔다.
그러나 배가 고팠던 산양새끼는 어젯밤에 맛본 달콤한 젖냄새가 나는 어미염소의 젖을 보고 다시 돌진했다.
어미염소는 이번에는 머리로 산양새끼를 밀어냈으나 산양새끼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미염소와 산양새끼의 몸싸움은 한참동안 계속되었지만 결국은 어미염소가 지고 말았다. 어미염소는 산양새끼의 몸에서 염소새끼와 같은 냄새가 났고 또 그 이상한 놈이 별로 위험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내버려두었다.
산양새끼는 머리로 난폭하게 염소새끼들을 밀어붙이고 젖을 빨기 시작했고 염소새끼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야 ! 젖을 빤다, 빨아…"
아이들이 환성을 지르며 산양새끼를 격려했다. 산양새끼는 염소새끼들과 어울려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밤 갓난아이가 염소 울타리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가보니 산양새끼가 울타리로 돌진하며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갓난이는 뿔쌍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어미염소와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넣고 방으로 되돌아갔다.
산앙새끼는 그후에도 밤만 되면 그런 짓을 계속 했으나 1주일쯤 지나자 도저히 탈출이 안되겠다고 체념한 듯 조용해졌다.
"됐어 ! 이젠 됐어."
산양새끼는 무럭무럭 자라나 한달쯤 뒤에는 머리에 불룩한 것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때 그놈은 다른 염소새끼들과 같이 풀을 뜯고 있었으나 그렇게 되니 또 문제가 생겼다.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포수마을의 아이들은 마을에서 사육하던 양이나 염소들을 산으로 몰고 가 신선한 풀을 먹여야 했는데 산양새끼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산양새끼는 그동안 아이들과도 친해져 아이들의 손에서 바로 먹이를 받아먹거나 스스로 가까이 와서 재롱을 떨기도 했는데 그건 울타리 안에서나 하는 짓이었다.
산양새끼를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자유롭게 풀어놓게 되면 어떻게 될까 ?
마을 어른들은 그렇게 되면 산양새끼는 그대로 달아나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염소는 염소고 산양은 산양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산양새끼만은 울타리 속에 남겨두고 염소들만 몰고 산으로 가려 했는데 산양새끼도 같이 따라나서려고 날뛰고 있었다.
갓난이는 마을에 남아 그 산양새끼를 돌봐 주었지만 혼자 남은 산양새끼는 토라져서 성질만 부렸다. 갓난이를 뒷다리로 찼고 머리를 들이대고 덤비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 놀던 산양새끼는 나중에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봄볕에 졸고 있는 갓난이에게 다가가서 슬그머니 등을 기대기도 했다.
갓난이는 그걸 보고 자신이 생겨 다음날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산양새끼를 산으로 데리고 가도 괞찮을 거야. 이젠 그놈도 염소가족이 되었으니 도망가지 않을 거야."
아이들이 의논한 결과 산양새끼를 데려 가기로 결의했다.
그대신 그놈은 개처럼 목띠를 걸고 갓난이가 끌고 다니기로 하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마을아이들을 총동원하여 감시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일곱 명이나 되었으니 산양새끼의 탈출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갓난이는 산양새끼의 목띠에 방울을 두 개 달아주고 긴 줄을 걸어 끌고다녔는데 산에 도착하자마자 산양새끼는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놈은 다른 염소새끼들처럼 얌전하게 어미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염소새끼들은 앞에 바위들이 있으면 옆으로 돌아서 갔으나 산양새끼는 그 바위 위로 올라서 갔다.
본디가 바위산에서 사는 산양이기 때문에 그 동작은 민첩했으며 절대로 미끄러지거나 비틀거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산양새끼도 다른 염소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고 있었고 그 대열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갓난이는 그걸 보고 또 말했다.
"그것 봐 ! 내가 뭐랬어 ! 이놈도 이젠 염소가족이 되었다고 그랬잖아."
갓난이는 그렇게 선언해 놓고 줄을 놓아 주었다. 산양새끼는 기다란 줄을 끌고 방울을 달랑거리면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아이들은 기급을 하고 주위를 포위하여 산양새끼가 가까이 오면 고함을 지르면서 쫓았는데 산양새끼는 그게 재미있는 듯 이리저리로 뛰어다니면서 아이들을 괴롭혔다.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산양새끼는 달아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들도 그 점은 안심했으나 다른 걱정이 또 있었다. 그들이 염려하는건 늑대들이었다.
염소들을 방사하는 인근 산에는 전부터 두 마리의 늑대들이 돌아다녔다. 누런 색깔의 늙은 늑대들이었는데 능청맞을 정도로 침착한 놈들이었다.
그놈들은 늘 염소떼들을 노려 부근을 돌아다녔으나 한번도 성공을 한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대나무창을 들고 있었다. 또 호주머니 속에는 주먹만한 돌들을 잔뜩 넣어가지고 다녔다.
언젠가 그놈이 아이들을 만만히 보고 슬금슬금 다가온 일이 있었다. 그때 대장인 준이는 모른 척하고 늑대들이 아주 가까이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던졌다.
첫번째 돌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돌은 보기 좋게 늑대의 대가리에 명중되었다.
늑대는 킥하면서 쓰러졌다가 일어나더니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렸다. 그후부터 늑대들은 절대로 돌멩이의 사정거리 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늑대들이 염려되어 어른들에게 그놈들을 잡아달라고 부탁했고 어른들은 그때마다 늑대사냥에 나섰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늙은 늑대들이 사냥꾼들을 알아 차리고는 멀리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늑대사냥을 포기해 버렸다. 그까짓 놈들 내버려 두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늙은 늑대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놈들은 자기들이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걸 알고 있는 듯 멀리서 아이들과 염소들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아이들은 그럴 때마다 걱정했다. 그놈의 산양새끼 때문이었다.
다른 염소들은 늑대를 겁내어 아이들이 있는 곳 가까이에 몰려 집단으로 움직이는데 비해 까불이 산양새끼는 여전히 제멋대로였으며 늑대들도 그놈을 눈여겨 보는 듯했다.
- (중편에 계속) -
◎ 참고 : 저자 김왕석 님의 약력
1927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상대 중퇴.
〈대구일보〉〈대구매일〉〈서울신문〉〈경향신문〉〈신아일보〉등 기자.
경제과학심의회의 연구원. 문화공보부 전문위원.
〈스포츠서울〉에 「맹수와 명포수」를, 〈경남신문〉및〈강원일보>에
「세기의 사냥꾼」,
〈광주일보〉에 「사냥꾼이야기」,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등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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