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담 수렵사 - 산골아이들과 산양새끼(중) - (글 : 김왕석)
- (상편에서 계속) -
하지만 아이들이 엄하게 경계하는 가운데 아무일 없이 산양새끼는 계속 뛰어 놀고 있었다.
산양새끼는 그후 성장하여 머리에 제법 뿔같은 것이 돋아나고 있었으며 염소새끼들은 그 뿔에 받히면 비명을 지르면서 어미염소 곁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어미염소는 산양새끼에게 비교적 관대했으나 언젠가 한번 몹시 화를 낸 일이 있었다. 까불이가 어미염소의 아랫배를 뿔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만은 어미염소도 화가 나서 머리로 까불이를 들이받았으며 까불이는 바닥에 뒹굴었다.
어미염소는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은 듯 두 번 세 번 받았다. 갓난이가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까불이란 놈은 상처를 입을 뻔했다.
4월(음력)이 되자 강원도의 산들은 연분홍색 꽃들이 다 지고 푸른 풀들이 무성해졌는데 그러던 어느날 일이 벌어졌다.
그날 아침은 구름 한점 없는 날씨였는데 정오쯤 저쪽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들이 덮쳐들더니 갑나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빗줄기가 마치 폭포처럼 소리를 내면서 쏟아졌고 그 빗줄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야 ! 염소들을 이리로 몰고 와 !"
준이가 고함을 질렀으며 네 명의 아이들이 우왕좌왕하는 염소들을 한 군데로 몰고 있었다.
소나기는 한동안 무섭게 쏟아지다가 좀 덜해졌고 아이들은 염소들을 한 군데에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때 준이는 말썽꾸러기 산양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산양새끼는 소나기가 쏟아진 틈을 타 탈출한 것 같았다.
"산양새끼뿐만 아니라 갓난이도 없어졌어."
다른 아이들은 탈출한 산양새끼를 못봤지만 늘 산양새끼만 살피던 갓난이는 그걸 뒤쫓고 있었다.
아이들은 큰소리로 갓난이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준이는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는 계속 내리는데 이제 열 두살 밖에 안되는 소녀가 혼자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했다.
준이는 소나기가 내리기 전에 저쪽 능선에서 두 마리의 늙은 늑대가 서성거리고 있는 걸 봤으며 어제는 인근 산에 표범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안되겠어 ! 난 갓난이를 찾으러 갈 테니까 너희들은 염소를 몰고 마을로 돌아가 빨리 어른들께 내가 갓난이를 찾으러 갔다고 얘기 해 !"
준이는 대나무창 한 자루를 들고 갓난이를 찾으러 나섰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자국도 없었으나 준이는 마음에 지피는 곳이 있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준이는 그 산양새끼가 잡혀온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가기로 한 것이었는데 그곳은 산을 네 개나 넘어야 하는 험산이었다.
준이가 갓난이를 찾으러 나섰을 무렵에 갓난이는 산양을 추적하고 있었다. 갓난이는 벌써 험한 산을 두 개나 넘어갔으나 추적을 포기하진 않았다.
산양새끼는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깡총깡총 뛰면서 달아나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놈은 마치 빨리 따라오라는 듯이 갓난이를 뒤돌아보며 도망쳐 갔다.
산은 점점 험해지고 있었으나 갓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자란 소녀였기에 갓난이는 이를 악물고 추격을 하고 있었다.
'요 나쁜 놈 ! 네깐 놈을 내가 못잡을 줄 알고.'
그러나 갓난이도 서너 시간 동안 쫓아다니다가 지쳐버렸다.
그리고 산양새끼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져 그놈은 건너에 있는 산정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나쁜 놈 !'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날은 어두워졌다.
갓난이는 비로소 자기가 너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고 겁이 났다.
갓난이는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산양새끼는 어미를 찾아가고 있으니 내버려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때 갓난이는 산양새끼가 서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중복에 뭣인가 달려가고 있는 걸 보았다.
두 마리의 늑대가 산양새끼를 쫓고 있었다.
"도망가 ! 도망가란 말이야 ! 늑대들이 너를 잡아 먹으려고 쫓아가고 있어 !"
갓난이가 그렇게 고함을 치는 순간 산양새끼도 늑대들을 발견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갓난이는 늑대들이 쉽게 산양새끼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바위들이 많은 산마루를 타고 도망치는 산양새끼는 놀랄만큼 민첩했다.
비록 어리기는 했으나 바위산에서는 어떤 짐승도 따라잡지 못한다는 강원도 산양의 핏줄을 타고난 것이다.
"달아나, 달아나, 빨리 달아나 !"
계속 고함치는 갓난이의 소리에 갓난이를 찾고 있던 준이가 그 소리를 들었다. 준이가 어느 바위틈에서 갓난이를 찾았을 때는 비를 맞은 갓난이가 덜덜 떨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어.'
그때 준이의 머리에는 언젠가 다른 아이들과 놀았던 동굴이 인근에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동굴이라면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이는 갓난이를 데리고 그 동굴로 갔다.
동굴은 허리만 좀 굽히면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안에는 마른 풀들과 타다 남은 나무토막들이 있었다.
준이는 늘 갖고 다니는 부싯돌로 불을 일으키려 했으나 솜이 물에 젖어 잘 되지 않았다.
준이는 솜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는 체온으로 말린 다음 부싯돌을 때려 마침내 불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준이는 불이 붙은 솜을 마른 풀 안에 넣고 입으로 훅훅 불었다.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났으나 그래도 덜덜 떨고 있는 갓난이를 살린다는 생각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불꽃을 일으켰고 거기에 나무토막을 걸쳐 모닥불을 만들었다.
준이와 갓난이는 불이 타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그때처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준이는 생각이 깊은 아이였으며 땔감이 모자랄 경우를 생각하여 인근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 미리 관솔가 나뭇가지들을 많이 꺾어와서 모닥불 옆에서 말리며 조금씩 불 속으로 밀어넣었다.
초여름이었기 때문에 얼마 후 준이와 갓난이의 옷들은 다 말랐고 체온도 되찾았다.
"이젠 됐어 ! 배가 고프겠지만 내일 아침까지만 참으면 돼 ! 내일 아침이면 어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올 거야."
"난 배고프지 않아 ! 그것보다는…"
갓난이는 산양새끼를 생각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늑대들의 추격을 피해 요리조리 깡총깡총 뛰어다니던 산양새끼가 불쌍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 아직도 살아 있을까 ?"
그러나 준이는 그 말썽꾸러기에게 몹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놈은 우리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도망갔으니까 벌을 받아야 돼 !"
갓난이는 그래도 그게 준이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산신령님에게 빌고 또 빌고 있었다.
'산신령님, 신령님, 제발 산양새끼를 살려 주세요.'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방울 소리야 ! 산양새끼야 !"
정말 산양새끼가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비에 젖은 채 몹시 지쳐 있었으나 그래도 눈은 말똥말똥했다.
늑대에게 쫓기다가 불빛을 보고 뛰어든 것 같았다.
준이와 갓난이는 산양새끼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했으나 어쩌면 그것이 화근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늑대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준이는 밝은 날 같으면 늑대 따위에게는 자신이 있었으나 그때는 달랐다.
늑대들은 어둠을 믿고 바싹 가까이까지 와서 으르렁거렸는데 그건 산양새끼를 내놓지 않으면 너희들까지도 잡아먹겠다는 위협 같았다.
갓난이는 산양새끼를 꼭 껴안고 있었고 준이는 대나무창을 들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덤빌테면 덤벼 ! 내가 네깟 놈들을 겁낼 줄 알아 ?"
늑대들도 불을 앞에 두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소년에게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놈들도 산양새끼를 포기할 생각은 없는 듯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그중의 한 놈이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궁창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과 같이 더러운 놈이었으나 두 눈에는 무서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준이가 대나무창을 꽉 잡고 일어서자 갓난이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걸 던져."
갓난이는 어느새 동굴 안에서 주먹만한 돌 하나를 주워 준이에게 건네주었다.
준이는 그 돌을 등 뒤로 감추고 있다가 늑대가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섰을 때 힘껏 던졌다.
어깨를 맞은 늑대는 킥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물러났다.
"맞혔다. 맞혔어 !"
갓난이가 환성을 질렀고 준이도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도망갈 늑대들은 아니었다.
그놈들은 먼저처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짓은 하지 않았으나 계속 동굴 앞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실 늑대들에게도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준이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문제는 땔감이었다.
동굴 안에 있는 소나무가지들은 거의 없어져 갔지만 땔감을 구하러 나갈 수는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늑대들과 싸울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불 꺼진 동굴 속에서 그대로 있을 수만도 없었다.
준이는 땔감을 아껴쓰면서 불씨만 남겨둔 상태에서 버티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불빛이 있으면 덤벼드는 늑대의 모습을 볼 수 있을테고 그때 대나무창으로 찌를 생각이었다.
준이는 갓난이와 산양새끼를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고 창을 들고 버티고 있었다. 동굴 안의 모닥불이 점점 약해지자 늑대들은 또 으르렁거리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갓난이가 또 돌을 두 개 주워 준이에게 건네 주었는데 그건 아주 작은 돌멩이였다.
그래도 준이는 그걸 위협용으로 던졌고 돌에 혼이 난 늑대들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늑대들은 이젠 동굴 입구에까지 들어와서 으르렁거렸으며 준이는 놈들의 파란 눈빛을 향해 창을 겨냥하고 있었다.
산양새끼는 불안한 듯 가냘프게 울고 있었다.
- (하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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