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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

선인들의 해학 - 고금소총(古今笑叢) - 제57화

by 박달령 2007. 10. 22.
♡ 사슴이 선즉 뿔도 서야지. (鹿立則角立)

어떤 마을에 사는 우둔한 사람이 이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녀에게 깊이 현혹되었다. 하루는 멀리 나가게 되었는데 혹시 그동안에 누가 아내와 간통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아내의 음호(陰戶) 양쪽 언덕에다 누워있는 사슴의 그림을 그려놓아 그것을 표식으로 삼고 떠났다.

그런데 그의 이웃에 사는 소년이 그가 멀리 떠난 것을 알고 그녀에게 가서 한번 안아 보려고 하니 그 여자가,
"남편이 사슴을 그려놓고 갔으니 곤란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년은,
"그것이 무슨 곤란한 일이오 ? 내가 고쳐 그리면 되지 않소 ?"
하고 드디어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런데 일을 마친 후에 보니 사슴의 그림이 많이 지워졌다. 소년이 붓을 들고 사슴을 다시 그리는데 누운 사슴이 아니라 서 있는 사슴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남편이 돌아와서 그림을 보자고 하기에 아내가 음호 양 언덕에 그려진 그림을 보이자 남자가 노하면서,
"나는 누운 사슴을 그리고 갔는데 이 사슴은 서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당신은 물리(物理)를 모르고 있군요. 사람도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데 사슴이라고 해서 오랫동안 누워만 있을 수 있겠소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그린 사슴에는 뿔이 누워 있었는데 이 그림은 뿔까지 서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 하고 다그쳐 물었다. 이에 다시 아내는,
"그거야 당연하지요. 사슴이 누웠으면 뿔도 누웠을 것이고, 사슴이 서 있으면 뿔도 서 있게 될거 아니오 ? 이것은 세상의 상리(常理)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아내의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과연 내 아내는 세상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로다."
하고 칭찬하였더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