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육군에 입대하여 모 사단 직할중대에 배속되어 상등병이 되었을 때였다. 사단 직할중대면 보병이 아닌
특수병과로 구성된 부대이다. 하루는 키가 작달막하고 체격이 빈약한 이등병 하나가 우리 중대로 전속을 왔
는데 사회에서 목공(木工) 기술을 배워 군대에서도 그 특기를 살려 중대 영선병(營繕兵)의 임무를 부여받고
전입을 온 것이었다.(그런데 그 영선병의 이름이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가 집이라는 이 영선병은 언제 기술을 익혔는지 목공 일을 그럭저럭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슨 물건을 제작하거나, 대규모 건축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중대 내의 건물이나 구조물 중에서 수리할 때가
된 부분만 수리를 하면 되는 비교적 한가한 직책이었다. 그는 마음씨도 착하고 순진하였으며 과묵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 영선병이 전입을 오고 나서 10여개월쯤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중대의 야간 당직실로 사단사령부에서 긴급 전통(電通)이 하달되었는데, 부산 다대포 출신의 OOO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는 즉시 보고를 하라는 내용의 전통이었으며, 바로 우리 중대의 그
영선병이 해당 당사자였다.
당직사관은 보고를 받고 중대장 숙소에 전화로 사유를 보고하자 중대장이 즉각 사단사령부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당직사관은 지체없이 사단사령부에 영선병이 우리 중대에 근무중이라는 보고를 했다.
이렇게 하여 그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 일과시간이 되자마자 중대장은 사단장실로 호출을 당하여 사단장
에게 불려가 장시간동안 불벼락을 맞은 다음 중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대장은 중대 인사계(이름은 백숙명 상사로 기억된다.)를 불러다 호통을 치면서 혼을 내었다.
내용인즉 중대장 명의로 병사들의 각 가정에 6개월인가 한 번씩 당해 병사가 부대에서 건강하게 잘 근무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라는 소위 가정통신문을 보내게 되어 있는 것이 당시의 규정이었는데, 이 규정
이 보병부대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었지만, 비교적 군대생활을 편하게 한다는 특수병과 장병들로 구성된
사단 직할중대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우물우물 그냥 넘어가는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지휘관이 가정통신문을 보내지 않아도 비교적 군대생활을 편하게 하고 있는 특수병과의 병사
들은 한달이 멀다하고 가족, 친인척, 친지들에게 편지 쓰는 걸 낙으로 삼다시피 했으니 별 문제가 일어
나지 않았던 것이 이 업무를 소홀히 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대장이나 중대 인사계도 당시에 이 가정통신문 발송 업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가 아닌 밤중에 홍
두깨 벼락을 맞은것이다.
이윽고 중대장과 인사계가 합석한 자리에 그 영선병이 불려가서,
"너 이녀석, 군 입대 후 왜 집에다가 부모님께 편지를 한번도 쓰지 않아 중대장을 곤욕을 치르게 했느냐"
라고 추궁을 하자 이 영선병의 대답인즉,
"글씨를 쓸줄 몰라서 편지를 못썼습니다"
라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다시 중대장이,
"그럼 다른 전우들에게 부탁하여 쓰면 되지 않느냐"
고 다그치자 영선병은,
"창피해서 차마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므로 할 말을 잃은 중대장과 인사계는 더 이상 영선병에게 책임추궁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까닭은, 부산 다대포에 사는 그 영선병의 부모가 아들이 육군에 징집된지 1년
이 다 되어 가는데 소식이 전혀 없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속앓이를 하다가 견디다 못해 국방부장관에게
자식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진정서를 올리게 되자 국방부에서는 즉각 육군참모총장에게 불벼락을 때리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육군본부가 발칵 뒤집혀 오밤중에 전 군에 긴급 전통이 육본에서 각 군사령부, 그리
고 군사령부에서 군단, 군단에서 사단, 사단에서 연대, 대대, 중대로 순차 하달되어 육본 휘하의 전 군이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아닌데 때아닌 비상이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 때가 1968년도 였으며, 당시에는 컴퓨터라는게 개발되지 않았을 때라서, 모든 문서를 수기(手記)로만
작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이니 빨리 그 영선병의 소재를 찾아내라는 참모총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화
급한 상황에서 육본에 보관되어 있는 50만여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량의 육군 개별 인사기록을 제한된 소
수의 인원으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일히 까발려 들춰 찾아낼 수도 없고 하니 궁여
지책으로 예하부대에 야간에 긴급 전통을 하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 영선병은 무슨 사연이 있어 문맹자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내가 군대생활을 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처럼
가끔가다가 문맹자인 상태로 육군에 입대하는 병사들이 드물지만 발생하였으니 지금의 군 조직과 비교하
면서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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