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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록(追憶錄)

문맹자였던 어느 병사(兵士)의 이야기

by 박달령 2011. 6. 2.

내가 육군에 입대하여 모 사단 직할중대에 배속되어 상등병이 되었을 때였다. 사단 직할중대면 보병이 아닌

특수병과로 구성된 부대이다. 하루는 키가 작달막하고 체격이 빈약한 이등병 하나가 우리 중대로 전속을 왔

는데 사회에서 목공(木工) 기술을 배워 군대에서도 그 특기를 살려 중대 영선병(營繕兵)의 임무를 부여받고

전입을 온 것이었다.(그런데 그 영선병의 이름이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가 집이라는 이 영선병은 언제 기술을 익혔는지 목공 일을 그럭저럭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슨 물건을 제작하거나, 대규모 건축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중대 내의 건물이나 구조물 중에서 수리할 때가

된 부분만 수리를 하면 되는 비교적 한가한 직책이었다. 그는 마음씨도 착하고 순진하였으며 과묵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 영선병이 전입을 오고 나서 10여개월쯤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중대의 야간 당직실로 사단사령부에서 긴급 전통(電通)이 하달되었는데, 부산 다대포 출신의 OOO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는 즉시 보고를 하라는 내용의 전통이었으며, 바로 우리 중대의 그

영선병이 해당 당사자였다.

 

당직사관은 보고를 받고 중대장 숙소에 전화로 사유를 보고하자 중대장이 즉각 사단사령부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당직사관은 지체없이 사단사령부에 영선병이 우리 중대에 근무중이라는 보고를 했다.

이렇게 하여 그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 일과시간이 되자마자 중대장은 사단장실로 호출을 당하여 사단장

게 불려가 장시간동안 불벼락을 맞은 다음 중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대장은 중대 인사계(이름은 백숙명 상사로 기억된다.)를 불러다 호통을 치면서 혼을 내었다.

내용인즉 중대장 명의로 병사들의 각 가정에 6개월인가 한 번씩 당해 병사가 부대에서 건강하게 잘 근무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라는 소위 가정통신문을 보내게 되어 있는 것이 당시의 규정이었는데, 이 규정

이 보병부대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었지만, 비교적 군대생활을 편하게 한다는 특수병과 장병들로 구성된

사단 직할중대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우물우물 그냥 넘어가는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지휘관이 가정통신문을 보내지 않아도 비교적 군대생활을 편하게 하고 있는 특수병과의 병사

들은 한달이 멀다하고 가족, 친인척, 친지들에게 편지 쓰는 걸 낙으로 삼다시피 했으니 별 문제가 일어

나지 않았던 것이 이 업무를 소홀히 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대장이나 중대 인사계도 당시에 이 가정통신문 발송 업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가 아닌 밤중에 홍

두깨 벼락을 맞은것이다.

 

이윽고 중대장과 인사계가 합석한 자리에 그 영선병이 불려가서,

"너 이녀석, 군 입대 후 왜 집에다가 부모님께 편지를 한번도 쓰지 않아 중대장을 곤욕을 치르게 했느냐"

라고 추궁을 하자 이 영선병의 대답인즉, 

"글씨를 쓸줄 몰라서 편지를 못썼습니다"

라고 답변하는 것이었다.

 

다시 중대장이,

"그럼 다른 전우들에게 부탁하여 쓰면 되지 않느냐"

고 다그치자 영선병은,

"창피해서 차마 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므로 할 말을 잃은 중대장과 인사계는 더 이상 영선병에게 책임추궁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 까닭은, 부산 다대포에 사는 그 영선병의 부모가 아들이 육군에 징집된지 1년

이 다 되어 가는데 소식이 전혀 없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속앓이를 하다가 견디다 못해 국방부장관에게

자식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진정서를 올리게 되자 국방부에서는 즉각 육군참모총장에게 불벼락을 때리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육군본부가 발칵 뒤집혀 오밤중에 전 군에 긴급 전통이 육본에서 각 군사령부, 그리

고 군사령부에서 군단, 군단에서 사단, 사단에서 연대, 대대, 중대로 순차 하달되어 육본 휘하의 전 군이

전쟁이 발발한 것도 아닌데 때아닌 비상이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 때가 1968년도 였으며, 당시에는 컴퓨터라는게 개발되지 않았을 때라서, 모든 문서를 수기(手記)로만

작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이니 빨리 그 영선병의 소재를 찾아내라는 참모총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화

급한 상황에서 육본에 보관되어 있는 50만여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량의 육군 개별 인사기록을 제한된 소

수의 인원으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일히 까발려 들춰 찾아낼 수도 없고 하니 궁여

지책으로 예하부대에 야간에 긴급 전통을 하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 영선병은 무슨 사연이 있어 문맹자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내가 군대생활을 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처럼

가끔가다가 문맹자인 상태로 육군에 입대하는 병사들이 드물지만 발생하였으니 지금의 군 조직과 비교하

면서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