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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권 산행

계방산의 상고대

by 박달령 2010. 3. 1.

단기 4343년(2010) 2월 27일(토). 밤

강원도 평창군 계방산을 가려고 저녁에 일기예보를 검색해보니 다음날은 날씨가 맑다고 한다.

계방산은 아직 춥기 때문에 눈이 녹지 않고, 상고대가 화려하게 피었을걸로 짐작하고 잠자리에 든다.

 

단기 4343년 2월 28일(일).

새벽에 잠을 깨니 04:00이다.

처에게 점심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황급히 산행준비를 한 다음 배낭을 들쳐메고 고독한 방랑길을 시

작한다.

 

05:00에 집을 나서서 05:10경에 사당역행 777번 시내버스에 오른다.(차비 1,500원)

사당역에 도착하여 05:50경에 강변역행 지하철을 탄다.(차비 1,110원)

06:10 강변역 앞에 있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행 첫차 06:32발 버스를 진부까지 표 한장 구입한다.

(버스요금 : 11,900원)

 

버스에 올라 끄덕끄덕 졸면서 장평터미널을 지나 진부터미널에 08:40경에 도착하여 하차한다.

홍천군 내면행 09:30발 버스표를 운두령까지 한 장 사고 터미널을 나선다.(차비 2,400원)

파출소 건물이 정면에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몇걸음 가면 <나드리>김밥천국이 있다.

 

들어가서 제육덮밥 한 그릇을 시켜 아침식사를 한다.(식대 3,500원)

식사를 마치고 다시 터미널에 가니 홍천군 내면행 버스가 기다리고 있어 승차한다.

 

출발시간이 조금 남아있어 버스기사에게 계방산 산행지도를 꺼내 보여주면서, 운두령에서 계방산을

거쳐 주목삼거리에서 노동골로 하산하여 이승복 소년 생가를 거쳐 아랫삼거리로 나올 계획을 설명하

고, 아랫삼거리에 버스가 정차하는지 여부를 물으니 정차한다고 한다.

 

이어서 오후에 홍천쪽에서 진부 방면으로 이 지점을 통과하는 버스가 몇시쯤 있느냐고 하니 일정하지

않지만 15:40까지는 도착하여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윽고 버스는 운두령을 향하여 

불구불한 구절양장의 산길을 헉헉대며 올라서 자동차길 중에 남한에서 제일 높은 표고 1,089m나

는 고개인 운두령에 10:00경에 도착한다.

 

계방산(1577. 4)은 백두대간 두로봉에서 갈라진 한강기맥의 첫번째 구간인 두로봉 - 운두령 사이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남한에서 한라산(1950), 지리산(1915), 설악산(1708), 덕유산(1614)에 이어

5번째로 높은 산이기도 하다.

 

▼ 계방산 산행지도


 

▼ 진부 버스터미널


 

▼ 아침 식사를 한 <나드리 김밥천국> (진부에서 아침 일찍 식사를 할 곳은 이곳 뿐인듯 하다.)


 

▼ 진부 터미널의 시외버스 시간표와 요금표 (진부 → 홍천군 내면행 첫차가 09:30이고 하루 세번밖에 없다.)

 


▼ 진부 터미널의 시내버스 시간표


 

운두령에는 큰 매점이 있고 그 마당에 관광버스가 두대, 승용차가 10여대 주차해 있다.

모두 계방산 산행객들이 타고 올라온 것이다. 오늘도 계방산이 장터가 될 징조를 나타내고 있다.

10:10에 운두령을 출발하여 계방산 방면 목재계단을 향하는데 예측대로 계단 오르는 사람들로 역시

장터를 이루고 있다.


 

▼ 운두령(雲頭嶺) 들머리에 서있는 계방산  등산로 안내도

 


▼ 운두령에 서있는 홍천군과 평창군의 경계 표지석

 


▼ 장터가 될 조짐을 예고하는 운두령 들머리의 산행객들

 


운두령 절개지의 목재 계단을 올라서니 바로 찬란하게 핀 상고대가 고독한 방랑자를 반긴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맑을거라던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오보(誤報)가 되어 안개구름이 짙게 산기슭과 능선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상고대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옥의 티다.

 

그러나, 이 안개구름은 사진의 화질만 부옇게 보이게 할뿐, 오히려 천상의 화원을 거니는 듯한 신비감을 자

아내어 가슴을 설레게 한다.


 

▼ 찬란하게 고독한 방랑자를 맞이하는 계방산의 상고대



 

 



 



 



 



 



 



 



 



 



 



 



 



 



 


▼ 운두령과 계방산 중간지점의 이정표

 


▼ 계속하여 찬란해지는 상고대

 



 



 



 



 



 



 



 



 



 



 


▼ 계방산 정상을 700m 남겨놓은 이정표

 


▼ 계속되는 상고대

 



 





 

 


계방산 정상까지 계속되는 환상적인 상고대에 가슴이 설레이면서 한걸음 한걸음 옮기자 드디어 계방

산 정상이 나온다. 예측대로 계방산 정상은 장터처럼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사람 없는 정상표지석 촬

영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지경이다.


 

▼ 계방산(桂芳山)[1,577. 4m] 정상 표지석과 그 옆의 돌탑

 


▼ 가까이서 본 정상 표지석(상고대가 발길을 잡는 바람에 운두령에서 여기까지 두시간 반이나 걸렸다.)

 


 ▼ 계방산 정상의 이정표

 


계방산 정상 부근은 산행객들이 눈을 밟아 다졌다가 요 며칠 따뜻한 날씨에 맨땅이 드러날만큼 녹았다.

계방산 정상에서는 남쪽 능선을 따라 바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동쪽 능선을 따라 주목삼거리에서 남쪽 노동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길이 있는데, 나는 주목삼거리로 향한다.


 

▼ 계방산 정상 일대의 상고대

 



 



 


▼ 주목 삼거리까지 계속되는 상고대

 

 


 

 



 



 



 



 


정상에서 500m 가량 동진하니 주목삼거리가 나오고, 오대산쪽 능선길로는 출입금지 규제 안내판이 꽂혀

있다. 이곳에서 노동계곡쪽으로 우회전하여 하산을 하는데 몇걸음 내려가지 않아 상고대는 없어지고 두껍게

깔린 눈길만 보인다.


 

▼ 주목 삼거리의 이정표

 


▼ 주목 삼거리에서 오대산 방면의 출입금지 규제판

 


▼ 주목 삼거리의 명칭이 유래한 우람한 주목

 


▼ 주목 옆에 서있는 주목 설명문

 


▼ 두아름은 됨직한 속이 텅 빈 대형 주목

 


▼ 상고대가 없어지고 눈밭만 보이는 노동계곡길

 


▼ 눈길

 


그러나, 약 2Km 정도 하산을 하자 눈이 녹은 물에 계곡의 개울은 물이 불어 철철 소리를 내며 흐르는 것을

보니 이제 봄이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 봄이 왔음을 알리는 눈이 녹으면서 불어난 계곡물

 


▼ 계곡물

 


노동계곡은 장마철 집중호우시에는 등산로로 이용을 하다가는 조난 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눈 녹은 물에 불어난 계곡물에도 개울을 건너야 하는 장소가 15 ~ 20여 차례나 되며, 건널때마다

힘겹게 넘게 되니, 집중호우라도 내리면 길이 끊겨 조난을 당하겠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평창군청에서 시공하는 아직 약간 미완성된 제2 오토캠핑 야영장이 나타

나고, 캠핑장을 지나니 이승복 소년 생가가 나타난다. 이승복 소년은 1968년의「울진 삼척 무장공

비 침투사건」당시 북한 무장공비들에게 처참하게 사살당한 초등학생이었다.

 

북한은 대남공작이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이래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지하조직

및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민중봉기를 획책하여 전쟁도발의 구실을 모색하고 지하조직의 사기진작과

직간접 지원으로 이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무장공비 침투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만큼 투입인원 규모와

그 잔인함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무장공비 침투는 남한 사회를 극도로 혼란하게 하였을 뿐

만 아니라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조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무자비한 테러 및 파괴활동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상적 중립층

의 확대와 당국에 대한 협력을 저지하며, 전후방 동시전투 식의 모택동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군경부

대의 분산과 병력소모 및 피로를 촉진시키고, 위조지폐의 대량사용으로 남한의 경제 질서를 혼란시키

고자 기도하였다.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

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신사복·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무장공비들은 1차로 2개조 30명이 1968년 10월 30일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에 침투하였다.

 

그리고 2차로 2개조 30명도 11월 1일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으며, 3차로 4개조 60명이

11월 2일 삼척시 원덕면 월촌리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다. 생포된 무장공비의 진술에 의하면, 제2차

침투조는 1968년 7월 9일부터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군부대 1기지에서 부국장의 지시로 15명

2개조 30명이 평양에서 3개월간 유격훈련을 받고 10월 1일 기차 편으로 영산리에 도착, 30일간의 훈

련이후 10월 30일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였다.


3차 침투는 해상 및 해안 경계병에게 발견되기는 하였지만 아군의 조치미흡으로 침투에 성공하였다.

11월 3일 새벽 울진군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하였다.

 

내용인 즉 이날 아침 무장공비 30여명이 산간마을인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

고 북한을 찬양하면서, 이에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이다.


또 신고할 경우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노동당, 여성동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하였다는

이다.

 

공비들은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하여 많은 희생

을 치른 끝에 군경의 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 모두를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측도 군인, 경찰, 일

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렀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 활동 가능성을 탐

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지를 시험해본 것이었다.


토벌작전에서 국군은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

세를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이승복(李承福, 1959년 12월 9일 ~ 1968년 12월 9일) 소년은 1968년에 발생한 울진·삼척지구 무장

비 침투사건의 희생자이다. 이승복 소년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지금의 용평면) 도사리에서 태어나

1967년 3월 2일에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했다. 1968년 11월 2일 울진군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한의 무장공비 잔당 5명에 의해서 12월 9일 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다.

 

12월 11일 조선일보는 3면에 이 사건을 〈“共産黨(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抗拒(항거) 입 찢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는 현장을 목격하고 유일하게 살아 남은 이승복의 형의 증언을 인용하

며, 무장공비가 가족을 몰아 넣고 북괴의 선전을 하자 이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대답

하여 공비들이 이승복의 입을 찢고 가족들을 몰살시켰다고 보도했다.

 

12월 13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705호 〈남침공비를 무찌른다 - 제3신〉 편에서는 이 사건을 “공산

당이 싫다고 해서 어린 젖먹이를 돌로 때리고 입을 찢어죽인 이들의 만행”이라고 보도하면서 일가족

의 시신을 공개했다.

 

이후 이 사건이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고, 국민학교마다 이승복의 동상이 세

워지는 등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되었다. 교과서에서는 이 내용이 제6차 교육 과정에서부터 빠졌다.


 

▼ 이승복 소년 위령비

 


▼ 위령비 앞면 확대촬영

 


▼ 위령비 옆의 생가 안내문


 

▼ 그 옆의 또 다른 안내문

 


▼ 생가 우물터

 


▼ 생가 전면

 


▼ 생가 마당가의 움집처럼 생긴 화장실

 


▼ 가까이서 본 화장실

 


▼ 장독대

 


▼ 장독대 곁의 이승복 소년의 아버지가 돌담을 넘어 탈출한 장소 안내판

 


▼ 생가 후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과 그 10개월 전에 일어난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사건(1. 21사태) 당시 나는

육군 졸병(등병)으로 강원도 철원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두 사건으로 1년 내내 비상출동

을 밥먹듯 했었다. 그 후 이승복 소년 사건이 떠오를 때마다 당시 정부의 국민에 대한 시책이 미흡하였

음을 생각하게 된다.

 

무장공비가 출현하여 행한 행동을 보고 받았으면, 전국민에게 신속하게 사태를 전파하고, 무장공비들

이 출현하면 그들을 안심시키고 시키는대로 협조하여 행동하며 그들의 세뇌공작에 찬성하는 체 하면

서 환심을 사서 일단 목숨을 보전하도록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국민 홍보를 했어야 한다.

 

그런 다음 기회를 보아 생명의 안전이 담보된 다음에 군경부대에 신고를 하도록 국민들을 교육하였더

라면 이승복 소년처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등등의 죽음을 자초하는 발언을 함부로 하지않고 목숨

을 보전했을게 아닌가 하고 항상 생각케 되는 것이다. 이는 분명코 당시 안보 수뇌부의 직무태만이라

생각한다.

 

위에 잠시 언급한대로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1개 소대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폭파

시키기 위해 침투했던 김신조 사건과 그 해 10월 말 ~ 11월 초에 울진 삼척 무장공비 120명 침투사건

등으로 나의 군대생활은 무척이나 고달펐다.

 

북한 특수 8군단인 124군 부대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여 완전군장을 메고

서 한시간에 8 Km를 달린다는 특수 게릴라전 부대로 양성된다는 사실을 무장공비 김신조를 생포하여

진술을 듣고 알게 된 군 당국에서는 전군에 강도 높은 훈련 지시를 하여 그 바람에 내가 소속한 부대

도 틈만 나면 전투훈련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내느라고 무지무지하게 힘이 들었었다.

 

그 뿐 아니라 낡아서 버리는 군복을 잘라서 한쪽에 1 Kg씩의 모래가 들어가는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아침 기상시부터 저녁 취침시간까지 하루 종일 양 다리에 차고 생활을 해야 했다. 전시가 되어 모래

주머니를 벗고 전투에 임하면 몸이 날렵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래주머니를 차고 1969년 가을까지 1년 이상을 지냈을 무렵 당시 육군 제2야전군사령관이었

한신(韓信)대장이 내가 소속된 제1야전군사령관으로 부임해 와서 1군사령부 예하 사단을 시찰하

던 도중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장병들을 보고 그 까닭을 물은 후 즉석에서 장병들을 고생 그만

시키고 이 시각 이후부터 모래주머니를 모두 떼어내라고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모래주머니로부터 해방이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처럼 한신대장은 군 지휘관으로서의 소신이 이른바 "사병(士兵) 제일주의" 였다.

그리고 그가 제창한 사병제일주의 3대 실천구호는 "잘 먹여라.", "잘 입혀라.", "잘 재워라." 였다.


그는 예고 없이 예하부대를 불시에 암행순시를 하는 도중에 식당을 급습하여 국방부에서 조달되는

육군 정량의 식사배급이 안되고 있으면 부대장은 직위해제를 당하고, 군수보급관과 취사병은 즉석

에서 영창으로 보내는 식으로 사병을 위한 군대 행정을 펼쳤다.

 

낡아서 구멍이 뚫린 옷을 입은 사병이 발견되거나, 야간 순시때 사병들이 취침하는 내무반이 춥거나

하면 위와 마찬가지로 불호령이 떨어지니, 한신장군 휘하부대 지휘관들은 부정부패를 할래야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군 내부에서 유일하게 한신장군이 참된 군인이라는 칭송을 장병들로부터

듣게 되었었다.

 

한신 대장은 고집불통의 장군이기도 했다.

5. 16 혁명으로 군정이 실시될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한신장군은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내무부장관

을 지냈는데 민정이양때 혁명 주체세력들은 모두 군복을 벗고 예편하여 정치계에 입문을 하였으나,

유독 한신장군 혼자서만 혁명공약대로 실천해야 한다며, 군으로 원대복귀 할만큼 고집스러웠다.

 

그래서 혁명주체세력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랬는지 한신장군은 1군사령관을 지낸 후 육군 최고의

영예로운 보직인 참모총장을 지내지 못하고, 바로 합참의장 보직을 받아 복무하다가 예편하고 말았

다.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속담이 맞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사례였다.

 

한신대장의 약력은 1922년 출생으로, 1946년 육사 2기로 임관하여 1950년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안강/기계전투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명장이기도 한데 휴전후 수도사단장, 6

군단장, 2군사령관, 1군사령관, 합참의장 등을 역임하고 1975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위와 같이 한신 장군은 병사 복지구현과 교육훈련 체계를 정립하는 등 전형적인 위국헌신의 군인

으로서, 많은 후배장교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 당시 한신장군 휘하의 부대에서는 절대로 부정

부패가 없었고, 한신장군이 지휘하는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항상 긴장상태에서 벌벌 떨었다고 하는 전

설적인 참군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년 이상을 다리에 착용하고 다닌 모래주머니가 나에게 준 선물은 지금도 내 몸에 남아있다.

바지를 벗고 양 다리 앞정강이를 살펴보면 촛대뼈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 부위는 모래주머니에

뭉개져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털이 자라지 않고, 그 좌우 장단지에만 털이 나고 있는 현상은 그 때

의 모래주머니가 준 선물인 것이다.

 

각설하고,

이승복 소년의 생가를 나오니 제2 오토캠핑 야영장이 나온다. 공사가 거의 완공단계에 접어들어 금년

피서철부터는 이용이 충분히 가능하겠다.


 

▼ 오토캠핑 야영장 관리사무소로 보이는 건물

 


 ▼ 노동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큰 냇물을 이루는 계방 1교 위

 


▼ 계방2교와 제1오토캠핑 야영장까지 1. 5차선으로 포장된 도로

 


계방3교를 지나 조금 걸으니 버스 정류장이 있는 아랫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 옆의 넓은 주차장

에는 관광버스 20여대, 그리고 수십대의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오늘 계방산 일대가 장터처럼

북새통을 이룬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산행객들을 수송한 관광버스들

 


▼ 노동계곡 오토캠핑장 안내표지

 


▼ 홍천군 내면에서 진부방향 버스가 정차하는 삼거리와, 주차장이 모자라 길가에 주차한 관광버스

 


아랫삼거리에 도착하니 15:10이 되었다. 운두령을 출발한지 꼭 5시간이다.

진부행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근처의 식당 겸 매점에 들어가 캔맥주 1개와 초콜릿과자 1개

를(2,300원) 사서 먹으며 주인 아주머니에게 버스 시간을 물어보니 15:50경에 온다고 한다.

 

매점 겸 식당안에는 산행을 끝낸 산행객들이 뒤풀이를 하느라 왁자지껄한 가운데 난로불을 쬐이며 시

간을 보내다가 15:40이 되어 밖으로 나와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길가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고, 50대 초반의 부부로 보이는 산행객 두 사람도 같이 기다

린다.

 

15:53이 되니까 진부행 시외버스가 오기에 손을 들어 승차하고 진부로 향한다.(차비 2,000원)

진부 터미널에 도착하니 16:15인데, 동서울행 버스가 16:35에 있다. 동서울행 버스표 한 장(차비 11,

900원)을 구입하고 대합실에서 기다리니 16:40에야 버스가 들어와 승차하고 귀가길에 오른다.


 

▼ 나를 수송해준 버스 승차권(윗줄 : 진부행, 동서울행 승차권, 아래 : 운두령행 승차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