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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

선인들의 해학 - 고금소총(古今笑叢) - 제174화

by 박달령 2007. 10. 16.

♥ 잠시화복(暫時禍福)

 

호남에 체류중인 나그네가 있었는데 9월이 되자 수심이 자못 심란하여 밤에도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인집 할머니가 그런 그를 보고 위로하며 말하였다.
"내 알고 있는 옛날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들어보시겠소 ?"


"한번 이야기해서 나의 근심을 없애 주시오."

 

"저는 본래 서울 사대부가의 계집종이었죠.  부모 형제와 멀리 떨어져 서울에서 종살이하였는데, 제 나이 17세 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날아갈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는 남장을 하고서 도망쳐 돌아가는 중이었지요.

 

동작진에 이르렀는데 어떤 스님이 저를 뒤쫓아와 '수재(秀才)께서는 어디에 사시며 어디를 가시는 중이냐' 고 물었습니다.

저는 '호남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라' 고 대답했지요.

 

스님은 '우연히 서로 만났는데, 마침 제가 원하던 분이구료. 저 역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중이니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그 스님의 용모를 보니 수려한데다 청춘이었습니다. 곧바로 사모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머나먼 남쪽 노정을 여자 혼자서 가는 것 또한 켕기는 바였던지라 더불어 동행하는 벗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갈산(葛山)땅의 한 여각(旅閣)에 들어갔는데 마침 다른 나그네는 없고 단지 우리 두 사람만이 한 방에서 동숙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이 되자 스님은 저를 끌어당기더니 바야흐로 일을 벌이려 하였습니다.  저 역시 정욕에 동요됨이 없지 않았던지라 다리를 벌리고 그를 따뜻한 제 몸 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스님은 풍류의 혈(穴)을 난생 처음 맛보았던지라 그 즐거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지불식중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아 ! 이곳이 어느 곳이오 ?'

 

그때 마침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각에서 일하는 사람이 몽롱하게 졸음에 빠져 있던 참이었던지라 그 소리를 여각에 찾아온 과객의 소리로만 알았지요.  그래서 깜짝 놀라 일어나 급히 응대하였죠.


'이 곳은 갈산의 여각입니다. 방은 따뜻하고 이나 벼룩은 없습니다.  들어와 머물다 가십시오.'
이 어찌 포복절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 그날 밤의 스님이 바로 파계환속하신 오늘날 저희 서방님이지요."

 

속담에 이르기를 '하늘에는 예측하지 못할 비바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잠깐 사이에 화복이 엇갈린다' 하였으니 이 같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