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4341년 4월 20일(일요일)
아침 잠을 깨니 늦은 시각이다. 산행을 준비하기도 어정쩡하여 오늘은 한국민속촌에 봄소풍을 가기로 한다.
한국민속촌은 수원역에 부설된 민속촌 연락사무실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는 관람객에게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하여 쉽게 접근이 가능하므로 1년에 한 두 번씩은 찾는 편이며, 눈이 나빠지기 전에 약 10여년 간은 필름카메라로 작품사진을 찍는다고 1년이면 10여 차례씩 들르기도 했는데, 사진촬영은 핑계요, 사실은 감칠맛 나는 동동주에 취해서 해롱거리는 날이 더 많았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보라리에 있는 한국민속촌은 사라져 가는 우리 조상의 슬기와 지혜가 스며있는 전통생활모습을 총체적으로 재현, 전시한 야외민속박물관으로 조성된 국제적인 관광지로 우리 한국인은 물론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볼 수 있다. 연간 약 170만 명의 관광객들이 다녀가며, 외국인 관광객이 30%를 차지한다.
1973년 8월 5일 착공하여 1974년 10월에 준공한 한국민속촌은 총면적 54만 5,490㎡로 기와집 132개동, 초가집 143개동이 있으며, 2만 1,150여 점의 민속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각 도(道)의 민가·관아(官衙)·토호저택(土豪邸宅)·양반가옥 등을 비롯하여 대장간·한약방·글방·장터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 서 있다.
민속촌의 전통 한옥 건물들은 착공전에 수년간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실제 건물들을 사들여 해체 운반하여다 그대로 조립한 것들로 그 당시에는 흔한 건물들이었으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민속촌 내의 전시가옥들은 거의 대부분이 실재(實在)했던 건물들이며 민속촌을 꾸미기 위해 창작으로 만든 건물들이 아니다. 민속촌 시설은 한 집도 빼지 않고 샅샅이 다 살펴보려면 하루 가지고는 안 되고 며칠동안 돌아봐야 할만큼 규모가 큰 곳이다.
민속박물관에는 사농공상의 계층별 의식주 용품과 민구(民具)가 전시되어 있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풍습과 생활양식을 재현해놓고 있다. 민속놀이로 혼례행렬과 농악놀이가 행해지며, 전국민속연날리기대회(매년 2월), 전국민속놀이경진대회(매년 5월), 전국민속그네뛰기 및 널뛰기대회(매년 5월) 등의 민속행사가 열린다.
▼ 목장승
▼ 목장승
▼ 효자정문(孝子旌門)
▼ 효자 이덕규의 효행을 기리는 정문(旌門) 안에 걸려있는 편액
▼ 냇물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청둥오리떼
▼ 돛단배와 그 뒤로 보이는 뗏목
▼ 관람객을 태우고 노를 저어가는 나룻배
▼ 충현서원 안내판
서원(書院)은 조선시대의 사립학교이다. 서원에 대응하는 향교는 국립학교이고, 성균관은 국립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 서원 정문앞의 홍살문
▼ 충현서원의 출입정문인 솟을대문
▼ 여름철에 주로 사용하던 사방이 벽 없이 트인 강의실 구시재(求是齋)
▼ 서원 정면 안쪽의 사당 출입문
▼ 사당(충절사<忠節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 책을 보관하던 서고(書庫)
▼ 서원 내의 살림집 출입문
▼ 살림집 전경
▼ 차거운 날씨에 사용하던 강의실
▼ 가까이서 본 뗏목
(장기간 운항을 위해 비바람을 피할 오른쪽 끝의 움막과 세탁물을 건조하는 왼쪽끝의 빨래줄)
▼ 돌로 만든 석장승
마을 지킴이 ‘장승’
툭 튀어나온 눈, 주먹만한 크기의 코, 들쑥날쑥 톱날처럼 생긴 이, 귀밑까지 찢어진 입..
예로부터 ‘마을의 수문장’으로 불리는 장승의 모습이다.
무척이나 못생기고 무서운 모습의 장승은 대개 마을 어귀에 세워졌다.
그런데, 왜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워 두었을까?
잡귀ㆍ재앙ㆍ전염병을 몰고 오는 역신을 겁주어 쫓아내기 위해서이다.
장승은 대개 나무로 만들었고, 몸 기둥에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나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써있다. 나무로 만든 장승은 세월이 지나면 썩기 때문에 지금은 박물관 등에서만 보관하는 경우가 많다.
이 가운데 나주의 불회사 돌장승 표정은 조선 후기 백성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뿐 아니라 이정표 역할을 하고,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보통 10 리나 30 리마다 세워, 길을 안내했던 것이다.
장승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에서 어느 방향으로 몇 리 떨어져 있고, 이웃 마을 이름이 무엇인지를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한편 장승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전라도나 경상도는 ‘벅수’,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이라 부른다.
또 동네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부르는데, 이는‘장승이 박힌 곳’이란 뜻이다.
서울 동작구 장승배기가 대표적이다.
▼ 돌로 만들어 세운 솟대
행운과 풍요를 상징하는 ‘솟대’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 있는 신이 솟대를 통해 오르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솟대를 세워 하늘을 섬기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던 것이고 솟대 끝에 앉아 있는 새는 풍요를 상징하며, 인간 세상과 신의 세계를 이어 주는 심부름꾼으로 여겼다.
솟대는 장승보다 더욱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과거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솟대는 예로부터 나무나 돌로 새를 만들어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혔다.
마을 입구에 홀로 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 장승 등과 함께 세웠다.
솟대의 새는 대개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물새인 오리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 주거나, 홍수를 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리는 또한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까마귀ㆍ기러기ㆍ갈매기ㆍ따오기ㆍ까치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새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태양을 상징하는 까마귀인 삼족오가 있고 박혁거세 신화를 비롯해 많은 건국 신화에 ‘알’이 나타나는데, 알도 새와 관련이 있다.
전통 혼례식 때 닭을 올리는 것도 새가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솟대는 장승과 함께 오랜 기간 조상들로부터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우리 민족의 뿌리 신앙문화이다 .
▼ 제주도 민가 안내판
▼ 제주도의 장승 돌하르방
▼ 제주도 민가의 대문역할을 하던 정낭과 정주석
정낭은 제주도 대문을 가르키는 말이다.
나무를 보통 3개를 끼워 넣는다.
양옆은 구멍난 돌(정주석)을 세워서 긴 나무를 끼워 걸쳐 놓는다.
3개가 다 끼워져 있으면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
2개가 끼워져 있으면 집주인이 조금 멀리 갔다는 뜻.
1개가 끼워져 있으면 집주인이 옆집 이나 가까운 곳에 가서 금방 돌아온다는 뜻.
모두 벗겨져 있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의사표시를 하였다 한다.
제주도는 그냥 소나 말들을 방목을 많이 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정낭이 필요한 것이라 한다.
▼ 제주도 민가 (1)
▼ 빗물받는 항아리
제주도의 지질은 화산암으로, 비가 내릴때만 개울이 흐르고 비가 개이면 지하수로 깊이 흡수되어 바다로 빠져버려 우물 파기가 힘들던 옛날에는 빗물을 항아리에 받아 생활용수로 쓸만큼 물이 귀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나무의 몸통에 짚을 둘러 끝을 항아리에 담가두어 비가 오면 나무 줄기를 타고 내려오던 빗물이 항아리에 고이도록 하였는데, 이를 제주도말로 "참"이라 불렀고, 참의 "ㅏ"는 아래아를 써왔다 한다.
▼ 제주도 민가 (2)
▼ 제주도 민가(3)
▼ 돌하르방
▼ 제주도 아닌 본토의 일반 민가 뒤뜰 굴뚝의 모습
▼ 곡식을 도정하던 디딜방아
▼ 소변이나 인분을 논밭에 져나르던 "장군 "
▼ 대나무를 엮어 만든 닭장(닭들이 밤이 되면 잠자는 숙소)
▼ 개울에 놓인 좁은 다리
▼ 규모가 큰 나무다리
▼ 중부지방 양반가 <99칸집> 안내표지판
중부지방 양반가는 1862년(철종 12년) 수원 화성 내에 지어졌던 만석꾼 부자 양반의 실재했던 집을 뜯어다 그대로 조립하여 놓은 것으로서 옛날 부잣집의 규모와 생활상을 가늠해 보는 역사적 유물이다. 옛날 한국에서는 제아무리 권세 있고 재물이 넘쳐나는 부자라도 집을 99칸밖에 짓지 못하였다 한다. 100칸이 넘는 집은 오직 제왕만이 지어서 왕궁으로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일반인이 100칸집을 지으면 제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온한 사상을 품은 세력으로 간주하여 역모로 몰았다 한다. 그래서 "99칸 집"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리라.
이 99칸집은 1910년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근택(1865~1919)이 사용하던 집으로, 지난 1973년 민속촌 건립 당시 수원 남창동에서 이전.복원된 것이다. 또한 이 99칸집은 지난 1950년 6.25 전쟁 당시 서울지방법원 수원지원. 검찰청 수원지청의 임시청사로 사용되기도 했고, '여인천하' '대장금' '다모' '황진이' 등 역사 드라마물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기도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99칸집 정문인 솟을대문
▼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 솟을대문 옆으로 지어진 하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
▼ 전돌(벽돌)로 쌓아올린 굴뚝이 이 집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굴뚝 앞의 네모진 돌을 둘러쳐 뚜껑을 덮은 우물도 보인다.
▼ 중문을 들어서면 안주인 마님이 기거하는 내당이다.
▼ 내당과 바깥 사랑을 연결하는 통로인 회랑(복도)
옛날 양반가에서는 남편은 사랑채에서 기거하고, 부인은 내당에서 기거하는 별거형태의 생활을 하였다 한다. 그러다가 부부가 동침하고자 하는 날 밤이 깊어지면 은밀히 남편이 사랑채에서 내당으로 들어가곤 하였는데, 부잣집에서는 이 때에 남편이 내당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길고 긴 회랑으로 연결한 통로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 곳간(창고) 뒤의 텃밭에 꽃이 활짝 피었다.
▼ 사당 출입문
▼ 사당
▼ 외별당 뒤에 지어진 정자
▼ 외별당 뒷마당에 설치한 활터의 과녁 (체력단련 스포츠센터 역할을 하던 곳이리라.)
▼ 외별당
▼ 외별당 마당 가운데의 연못
외별당 연못옆의 마당을 지나면 정문이 아닌 외별당에서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문이 별도로 있다.
▼ 관아 정문 앞마당에서 열연중인 농악공연(1)
▼ 마상재(馬上才) 공연장의 한가로운 말 모습
▼ 목, 부, 군, 현 등의 지방관이 정사를 살피던 관아 정문
▼ 관아 외벽에 붙은 범인 현상수배 방문
현상수배
왼쪽 그림과 같은 인상착의의 범인이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과 소를 강탈하여 갔으니,
체포하거나 관아에 급히 신고하라.
인상착의의 특징은 얼굴에 검은 점이 두 개 있고, 키는 6척 5치(195Cm)이다.
범인을 체포하거나 신고하여 체포되게 한 사람에게는 현상금 5천냥을 지급한다.
- 수원현감 -
▼ 관아 중문
▼ 목사, 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 지방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東軒)과 마당의 곤장을 치던 형틀
▼ 옥사(감옥) 출입문
▼ 감옥
▼ 형구(족쇄, 칼, 고문기구 등) 창고
▼ 옥방(감방)안의 죄수들(경범자들이라 칼과 족쇄를 안채웠다.)
▼ 중범죄수들이라 목에 탈옥방지용 칼을 씌웠다.
▼ 옥사 내부 전경
▼ 줄타기 공연(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쯤의 복장으로 보인다.)
▼ 줄타기 공연
▼ <중부지방 산촌 민가> 안내표지판
이 산촌민가는 민속촌이 설립되기 전 이곳이 심심산골이었을 당시 원주민이 실제로 살던 집을 없애지 않고 보존하고 있는 것인데, 옛날 영세 빈민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집이다.
▼ 중부지방 산촌 민가 (1)
▼ 중부지방 산촌 민가 (2)
▼ 중부지방 산촌 민가 (3)
▼ 농가 마당가의 돌담 풍경
▼ 농가 뒷마당의 돌담 풍경
▼ 중산층 정도 규모의 농가
▼ 농가 안마당.
▼ 장독대
▼ 서민층 규모의 농가
▼ 우리의 나무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는 염소. 자유가 그리운가보다.
▼ 나귀나 소를 매어 돌리며 곡식을 도정하던 연자방앗간
▼ 민속촌에는 야생화를 비롯한 많은 꽃들이 봄의 향연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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